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그리스도의 부활

노르만 크로포드

 

죽음과 생명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죽음과 영원의 실제를 부인하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 필요불가결한 문제를 뒷전으로 미룹니다. 사실, 현대인은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죽음 저편에 있는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들 수 있습니다.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으려는 많은 사람들도 내세의 존재와 실상에 대해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신앙에 매력을 느낍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소망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모조품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만든 종교가 종지부를 찍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활에 관계된 네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은 주 예수님에 의해 의인과 악인모두의 소생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어 있습니다(5:29). 성경은 형벌의 부활 시에 부활하는 자들의 몸의 성질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불(게에나)을 견딜 수 있는 몸을 가질 것이며, 우리는 이것이 몸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불 자체가 지니는 어떤 성격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상고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악인의 몸이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체입니다.

소위 영적인 부활이란 개념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기초를 공격하는 크나큰 과오입니다. 이 용어를 사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44에서 사용하는(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것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 종교가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어떤 영적인 형태로 살아났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어떤 지도자는 그리스도의 몸은 기체로 해체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살아있다는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는 한결 기만적이기에 더 해롭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주장하는 자들은 부활절이면 으레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말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신도들이 의자에 앉아 목사님이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실은 주 예수님이 실제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몸의 부활 이상입니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나사로등의 부활은 사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은 몸 그대로 살아났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의 부활은 그와 다르다고 말합니다(고전 15:37). 우리의 제한된 지식으로 볼 때, 나사로와 그밖에 사람들은 다시 죽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라는 일반적인 진리에 대한 부인으로 보지 않는데, 이는 그들은 그 법칙에 대한 초자연적인 예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서열과 시간에 있어 첫째를 의미하는 첫열매이시기 때문에(고전 15:20,23, 모두 단수임), 그들은 사실 그분의 부활의 형태대로 부활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죽지 않는 몸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주 예수님은 진정한 첫 열매이며, 모든 수확물은 그분과 같이 영화롭게 된,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되, 영화롭게 된 새로운 형태의 몸의 부활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죽음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되리라(고전 15:54).

 

부활의 의미

부활의 의미는 제자들 속에 일어난 변화에 의해서 가장 강력하게 예시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주 예수께서 진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된 직후 이 동일한 제자들은 얼마나 낙심했는지요! 그들의 태도는 당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 의해 잘 표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4:21)

그들의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베드로는 그 결국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가 관원들 사이에 앉기까지 했었습니다( 26:28), 그것은 그들의 모든 기대의 비극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라고 한 막달라 마리아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20:13).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가져가 버리려는 불신풍조를 바라보는 모든 진실한 신자들의 우려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부활의 중요성은 그 주제에 대한 장려한 장 속에 바울에 의해 명쾌하게 표명되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1)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것이요,

(2)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3)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요,

(4)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5)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요, 그리고

(6)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이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니, 이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승리의 선언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고전 15:12~20).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모든 소망의 기초입니다.

 

부활의 성경적인 기초

신약성경 기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활을 예고했다고 선언합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말했노라고 전하면서 그 증거로 시편 16:8~11을 들었습니다(2:25~32).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전한 메시지에서 시편 2:7(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16:10(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밖에 여러 구약성경 구절들이 인용될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독자는 레위기 23:9~14과 고린도전서 15:1~4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고 시편 22:21 40:2, 이사야 53:8~11 등도 살펴보십시오.

십자가에 앞서 주 예수님은 자신이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분명히 예고하셨습니다. 4복음서에서 한 구절씩만 예를 들어도 그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 마가복음 8:31, 누가복음 18:33, 그리고 요한복음 2:19은 주 예수님께서 자신이 거절과 죽임을 당한 다음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구절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자들이 그분의 부활에 대해 그토록 눈 별고 믿음이 없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성령의 깨우침이 없는 한 우리의 마음도 똑같이 어둡고 무지한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부활의 증거는 많고 확실하다는 누가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이 문제는 주의깊은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1:3). 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거로 보나 논리로 보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완전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이 확증된 역사적인 사실이다.

 

빈 무덤

4복음서는 일제히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고 증거합니다. 누가는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갔으나 주 예수님의 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24:3). 마태는 천사가 여자들에게 와서 주께서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28:6). 여기서 누웠다는 동사는 눕다의 미완료형으로서 주님의 시신이 관습대로 무덤 안에 안치되었으나 지금은 비어있다는 뜻을 암시합니다.

빈 무덤에 대한 불신 세상의 설명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1) 그것은 다른 무덤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실수를 오랫동안 알지 못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매우 특별한 무덤이었으며 제자들 중 하나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산 안에 있는 새 무덤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다른 무덤이었다는 이론을 계속 고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에 아무 흠도 끼치지 못합니다

(2)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

이 널리 알려진 이론은 우리를 의아하게 합니다. 첫번째 제기되는 의문은 왜 훔쳐갔느냐 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무덤을 성지로 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동일한 추종자들이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능력있게 전하기 시작할 때, 분명히 대적들이 그분의 시신을 내보였을 것이며, 그렇게 하여 복음도, 기독교 신앙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4:33). 많은 무리가 그들의 메시지를 믿고 온 예루살렘이 크게 동요했으며, 허다한 제사장들의 무리도 복음에 복종했습니다. 만일 복음의 대적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보일 수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은 역전되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유대인의 침묵은 사도들의 전도만큼이나 분명 했다고 했습니다.

(3)추종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의해 한 특별한 회의를 통해서 꾸며져 유대인들 가운데 널리 공표된 것입니다( 28:11~15). 이 거짓 이론에 답하는 최선의 방법은 증인들의 증거를 자세히 조사해보는 것입니다.

 

목격자들

주 예수님이 동산에서 체포되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좌절과 상심에 빠졌으며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굳게 닫은 채 숨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들도 체포되어 처형될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이 동일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들어 부활의 도를 전하는 메시지로 예루살렘을 들끓게 했습니다(4:2).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두려움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진 이들은 순교자의 용기를 가지고 채찍과 돌에 맞고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감내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도난 당한 시신에 대한 꾸며진 거짓말을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함께 음식을 나누었던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였을까요?

우리는 도마의 불신이나 열한 제자의 회의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증거가 그들에게 제시되어 그들이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능력 있는 증인들이 된데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거짓 소문을 날조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최초의 불신은 그들이 그런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지상의 모든 문명화된 나라의 재판제도는 목격자의 증언을 기초로 합니다. 목격자의 진술이 타당하고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법정은 마치 직접 사건의 경위를 목격한 것처럼 그 사건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그 삶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를 입은 이들 증인들만큼 신빙성 있는 증인들은 없었습니다. 그분을 부인한 베드로, 의심많은 도마,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그분의 말씀을 비웃은 마리아의 아들 야고보, 막달라 마리아, 열한 사도들, 오백여 사람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함으로써 삶이 완전히 뒤바뀐 오만한 바리새인인 다소의 사울 등 모두가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는데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죽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그것이 세상이 주님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1:3).

사도 요한은 무덤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하면서 보다라는 뜻의 세 단어를 사용했습니다(20:1~8). 요한이 처음 무덤 속에서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고(saw, 5), 이어서 베드로가 그 세마포를 보았으며(beheld, 6), 그런 다음 요한이 보고(Saw)믿었습니다. 요한은 첫번째 목격은 세마포가 거기 있었음을 확증해 주었으나, 그의 두번째 자세한 목격은 주 예수님의 시신이 더 이상 그 세마포 안에 없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습니다. 세마포는 개켜있지 않고 시신이 있던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요한은 빈 무덤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자기 앞에 드러난 상황의 의미를 곧 깨달았습니다.

같은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에, 굳게 닫힌 다락방에 한 무리가 함께 모였습니다 그 때 두려움에 싸인 제자들 한가운데 한 사람이 처참했던 죽음의 흔적을 지닌 채 섰습니다. 그분은 먼저 그들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에 평안을 고하고는 그들에게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그 놀라운 광경을 전해 들었지만,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 제자들이 모이고 도마도 함께 있을 때에 그 광경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26).

도마가 과연 이 때 못박힌 자리를 만져보려고 그의 손가락을 뻗치거나 구주의 옆구리로 손을 가져갔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후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그들과 동행하며 이야기도 하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을 만져보고 자신이 살과 뼈가 있는 실제 몸임을 알라고 권하기도 하셨습니다(24:36~44). 그 날에 도마는 모든 의심이 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합당한 태도는 무엇일까요?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로소이다라고 외침으로써 모든 믿는 심령의 고백을 표현했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