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H.A 아이언 사이드
혹 어떤 분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예식이 시작될 때 떡 한 덩이를 상위에 갖다 놓고 나중에서야 그것을 떼는가?
왜냐하면 떡 한 덩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몸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떡을 뗌은 주님의 죽으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잔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으며 또 왜 모두가 그 잔을 마시는가?"
그 잔 안에는 포도주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속의 값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우신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l6) 마치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즙틀에 들어가 어그러져서 소위 성경에 이른바 포도의 피가 흘러 나오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사 죽음으로 어그러지셨을 때 주님의 구속의 보혈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러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용히 묵상 가운데서 잔을 마실 때 우리는 감격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구속의 대가(代價)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고귀하고 거룩한 예식이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지 않는가? 왜 구원의 체험이 있고 주님의 진리를 고백한 사람들만이 그의 만찬상에 참예하도록 하는가?"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나오는 자들 중에서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예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은 자들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고전 5장9~11절 까지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멀리 하라는 것과 어떤 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분명한 금령(禁令)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만찬을 포함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만찬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세심한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필요성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고전5장 (전장을 읽으십시오)과 고후
"왜 이 예식을 위한 미리 준비된 찬송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같은 일정한 예배 순서가 없는가? 설교나 말씀을 듣는 시간이 침묵으로 낭비되지 않는가?"
예배 하는 자가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기도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또는 단순히 찬송을 부르고 서로의 교제를 즐기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인 유일한 이유는 주님을 만나 뵙고 그 분께 사로잡혀 그분께 우리 마음의 예배를 드리고 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겪으신 고난을 기억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경우를 이렇게 말해 보십시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어느 주일 아침에 어느 예배처에 친히 오실터이니
주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에 젖은 마음으로 그곳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이는 사람들에게서 경솔한 언동이나 육적인 희열의 빛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하기 위하여 나오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사모심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은혜로우신 모습을 경배에 어린 눈으로 한 없이 쳐다보고 싶어하는 것뿐입니다. 그리 고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이야기 하는 것과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초를 생각해 보는 것과 또 주님의 빛나는 형상을 뵈올 때 우리의 마음에 넘쳐나는 감사와 경배를 표현하는 말 뿐일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의 놀라우신 인격, 그의 받으신 고난과 현재의 영광을 찬미하는 찬송을 한 목소리로 합하여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육에서 나오는 형식 따위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만일 어느 형제가 말씀을 보아도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찬미하기 위한 것이거나 주님의 인격과 공로를 더 잘 이해하고 감지하도록 성도들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어야지 그러한 때에 주님의 직접적인 지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자의 자세를 취하므로 주님을 한쪽에 제쳐놓는 실수를 범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이 주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모일 때 우리의 육안이 주님을 뵈었을 때와 다름없이 주님께서 오셔서 계신다는 사실을 유의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목적대로 우리는 우리 앞에 계신 주님을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찬송이나 말씀을 택하여 부르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 설교나 주님을 기억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윤리 해설을 하는 형제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합당치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경외감은 육을 제어할 것이며 또 찬송을 택하거나 공중 감사를 하거나 말씀을 택하여 봉독할 분을 반드시 그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임을 확신한 후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해도 그것이 전혀 시간의 낭비가 아닌 것은 우리 모두가 사모하여 모인 주님을 황홀한 눈으로 경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러 모인 예배시간 동안만은 죄인의 구원이나 개인의 축복이나 이와같은 일들에 대한 기도는(기도시간에는 합당한 것이지만)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떡과 잔에 참예함이 끝난 후에는 집회가 일반적인 성격을 띄어도 상관 없겠지만 그 전에는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순복하여 주님을 기억하러 모였다고 하는 이 단일한 생각을 모인 모든 성도들이 깊이 유의한다면 그 밖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자연히 해소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와같이 주님을 예배하러 모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예배 시간에 늦지 않게 오시므로 예배를 산만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조그마한 노력이 예배를 귀하고 즐겁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 내내 직장이나 학교 출석에 대해서는 한번도 늦지 않으면서도 주일 예배시간이 그들의 직장이나 학교의 출근시간 보다도 훨씬 늦게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지각한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옳게 시정하는데 필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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