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맥상의 원칙
Ⅰ. 정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실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는 동일한 내용 또는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그 대목에 기록해 주심으로써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성경의 모든 장, 절은 전후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직 창세기 1장 1절만 앞의 연결 장절이 없고 계시록 22장 21절만 뒤에 연결되는 장절이 없다.
그러므로 각 절은 문맥을 통하여 명확히 이해하게 된다. 어느 한 절만 뽑아서 문맥상 연관 없이 해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Ⅱ. 실례
1. 수양과 수염소(단 8장)에 관하여는 본문을 읽어보면 분명히 의미를 알 수 있지만,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하려 한다면 수수께끼에 불과한 것이다.
2. 마른 뼈들로 가득차 있는 골짜기(겔 37장)는 교회가 아니다. 문맥으로 보아 이 대목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에는 문맥의 이해 없이는 전혀 깨달을 수 없는 대목이 많이 있다.
3. 성경은 스스로 성경을 증거해주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다면 이같은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당신은 어느 한 구절이나 한 절의 한 부분을 뽑아서 어떤 이론을 증명하는데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심정과 전혀 다를 수 있다. 이같은 태도는 성경을 연구하는 올바른 태도가 못된다.
(1) 빌립보서
(2) 로마서
(3) 요한복음
(4) 시편
그러나 이 말씀은 선교를 위한 교훈이 아니다. 이 말씀은 신실한 일꾼들이 이방인에게 나아가 수고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라는 말씀은 결코 선교활동을 가리키지 않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우시게 되는 천년왕국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절의 말씀은 복음을 통한 세상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킬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러나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고 해서 세상이 점점 개선되고 마침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화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천년 왕국이 시작될 때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노아의 날과 같이 계속 타락해가고 있으며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
(5) 사도행전
4. 성경학자들도 문맥상 해석의 원칙을 강조한다.
(1) 토레이(Torrey)-문맥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없다.
(2) 토드(Todd)-어느 구절이나 대목을 상고함에 있어서 문맥적으로 상고하는 것은 가장 으뜸되는 원칙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릇된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
(3) 모이어(Moyer)-전도자 중에는 말씀을 준비하기 위하여 주제를 선택한 다음에 이에 알맞은 성경 구절을 둘러 맞추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설교준비라 할 수 없다. 궤변이라고 하면 지나칠 것인지?
(4) 로크 하트(Lockhart)-문맥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의미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열쇠이다.
5. 밀접해 있는 구절의 문맥상 해석
아·주 가까이에 있는 구절에서 비췸을 받고 난해한 대목을 깨닫는데 도움을 얻는 경우가 있다.
예: 요한일서 4장 17절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었다”는 말씀은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6. 성경 전체로서의 문맥상 해석
아주 가까이 있지는 않을지라도 성경의 다른 대목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기도 한다.
(1) 창세기
창세기 14:12말씀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 살고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은 소돔에 대해 관심이 컸다. 어떤 사람은 소돔 사람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도한 것 이상으로 응답해 주신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있던 아브라함은 롯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 도성을 구원해달라고 하는 심정으로 이처럼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도한대로 행하시지는 않으셨다. 즉 그 조카 롯을 구원해 주셨지만 그 성읍은 끝내 멸하셨다.
(2) 창세기
(3) 창세기 37:25,28,36과 39:1을 대조해 보라. 소위 고등 비평가들은 이 구절의 말씀은 성경의 모순성을 드러내주는 실례라고 비난하고 있다. 미디안 사람과 이스마엘 사람이 번갈아 기록되어 있는데 사사기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이스마엘과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소생으로 이복 형제간이었고 그들은 같은 지방에서 살았으며 생활양식도 같았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미디안은 동일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사사기
(7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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