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교사 샘터
선한 사마리아인
(눅
이 예화는 두 가지의 별개의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친절과 다정함은 종교적인 외적인 형식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죄인(강도 만난 사람)은 절대적으로 절망상태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율법(제사장)의 실패, 그를 구하려는 의식 (레위인)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사마리아인)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 누가복음에서 두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는 어떤 율법사가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한다. 그러나 18장 18절에서는 어떤 관원 어느 정도 진지한 태도로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정말 진실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근심하여 가버렸기 때문이다. 전자는 율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읽었었다(26절). 후자는 그것을 지키려 노력했다(
26절 “어떻게 읽느냐?”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주의하라. 읽기에는 옳은 방법과 잘못된 방법이 있다. 옳은 방법으로 율법을 읽었다면, 그것은 그를 정리했을 것이다(롬
27, 28절. 이 구절에 기록된 생명에 이르는 길은 노력하는 죄인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거반 죽어가는 사람처럼 그 자신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거듭 사람만이 이 일을 수행하는데 진실한 노력을 할 수 있다.
29절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다. 그는 “이웃”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소수의 선택된 친구”여서 쉽게 명령을 순종할 수 있었다면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레위기 19장 34절의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율법이 이미 대답하고 있다.
30절. “내려갔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은 매우 심한 내리막길이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언덕 사이에 있고, 여리고는 요르단 계곡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타락해가는 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도성이었다(시 128:5). 그리고 여리고는 저주의 도시였다(수
여기서 옷을 벗긴 자는 강도였고 누가복음 15장 13절의 탕자는 거짓 친구에 의해서 해를 받았다. “거반 죽었다”라는 상태는 죄 속에서 죽어가는 죄인과 같다.
31-33절. 제사장과 레위인도 스스로 “내려가고” 있었다(31절). 그러나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여행하는 중에”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예화를 말씀하실 때 그분은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중이셨다(
34, 35절.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친히 먼저 돌보고 그리고 나서 주막주인에게 그를 돌볼 비용을 지불했다.
주목할 것은 그가 상징하고 있는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35절). 그때에는 그 분을 위하여 봉사한 모든 것을 충분히 “갚겠다”고 하신 것이다.
(198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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