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성막(13)
죤 리치
띠 (출 26:26~29)
조각목(皁角木) 널판들은 금으로 입혀진 띠들로 짜맞추어졌는데 이 띠들은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상징적으로 가르쳐 주는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됨과 교제입니다.
각 널판은 다른 널판과는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의 토대 위에 꼿꼿이 서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개인적인 구원과 위치를 보여줍니다.
또 각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든 띠로 옆에 있는 널판에 묶여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이것도 성도들의 하나됨과 교제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단지 구성 단위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특권과 의무도 단지 우리 자신과만 시작하여 우리 자신과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동료 성도들과 같이 생의 한 묶음 안에 함께 묶여 있으며,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성도들을 지켜주도록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하십니다. 비록 과거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경에는 하나됨에 관해 현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의무를 제시하는 말씀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잃어진 영혼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우리 개인의 삶과 걸음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구실로 이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에는 순서가 있고 각 성도의 마음과 활동에 따라 우선 순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모든 중요한 진리들, 즉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형제들에 대해 의무감과 교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신 주님의 교훈도 소홀히 여기거나 제외시켜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띠는 수에 있어서 다섯씩 짝을 지었습니다.
이것들은 처음에 일반적으로 묘사되다가 다음에는 특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중간 띠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목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26:28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이것에 대한 또 한번의 언급이 출애굽기 35:33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그 중간 띠를 만들되 널판 중간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였으며”.
중간 띠는 모든 널판들을 함께 결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널판들은 이것에 의해 한 성막으로 짜맞추어져 명백히 보이는 하나됨을 형성했습니다. 밖에서 보는 구경군들의 눈에는 널판들의 하나됨이 보였지만 널판들을 결합해 주고 지지해 주는 그 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널판들의 가슴 안에 숨겨져 있어서 인간의 거친 손이 그것을 부수거나 제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함께 결합시키는 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서로간에 하나인 것입니다. 땅이나 지옥의 어떤 힘도 가장 미약한 어린양 하나를 그 목자의 품 안에서 잡아 때어낼 수 없으며, 가장 미약한 지체 하나를 그리스도의 몸에서 비틀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부활하신 머리와 그분의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오하고 비밀스런 하나됨은 신령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서로 지체된 성도들 간의 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에 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죄 가운데 죽어 있는 모든 사람을 배제 합니다.
그런데 이것 외에 교회에 대한 또 다른 면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함께 모여든 이 땅 위의 무리들로 구성되어, 어둡고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상징은 바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본 교회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신령하게 함께 모여 적절히 결합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었던 교회였고(행
한 때 그들은 냉혹한 경멸과 조롱으로 그분을 다른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요
그 아래 이 땅 위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쫓긴 자”와 “유다의 이산(離散)한 자”들이 똑같은 소중한 이름에 의해 결합된 그 복스러운 연합 안에 함께 모일 것입니다. “…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시기와 질투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분이 배척을 받고 있는 현재의 세상에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얼마가 지나자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교리를 주장하여 합당치 않게 유명해지거나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행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 창조되고 길리어진 파벌주의는 겉으로 드러났습니다. 분파와 당파들이 창시자나 특정 교리에 따라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수세기 동안의 분열과 탈퇴, 붕괴 등을 거쳐 자칭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불신하고 조롱하는 세상에 바벨과 같은 표면상의 간판을 내걸 때까지 누룩은 계속 역사했습니다. 그리고 수백개로 분열된 각 교파들은 자기 교회가 정통이요 참된 교회라고 떠들어댔지만 이중에서 어떤 것들은 대단히 부정했고 그들의 교리에는 진리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교리상으로는 좀더 복음적이긴 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비참하게 썩어 있었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전혀 개심하거나 믿지를 않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많은 무리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혼동과 불의의 덩어리에 함께 섞여 신음하던 일부 성도들이 한줌의 천국의 곡식을 얻기 위해 때때로 자기들을 채우고 있는 착고(着錮)로부터 벗어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성도들을 함께 끌어 모으기 위해 또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종종 어떤 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기도 연합, 복음주의자 연합, 기독교 청년회 등이 결성되었으며, 수양회나 차를 나누며 교제하는 모임이 열리는 등 피로 사신바 된 양무리를 함께 모아 결합시키려는 많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모든 교파의 이름과 성직자들의 명칭을 떠나 오직 주님의 제자로서 단순히 모이는 것이 대단히 유익하고 신선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 성도들은 숲속의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의 손을 강하게 하며 서로의 마음을 격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다시 교파로 돌아가 서로를 단절시키게 만드는 교의(敎義)와 단체를 떠받들고 있습니다. . 그들은 서로간의 교제를 즐기려고 같은 찻상에 모이는 성도들이면서도 주님의 만찬상에 함께 모이기는 거절합니다. 주중(週中)에나 수양회 때 그 소중하신 이름 주위에 모이는 것이 그들에게 그렇게 즐거운 일이라면 왜 그들은 계속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요? 그분의 이름과 그분 자신은 참으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하늘에 계신 그분의 뜻대로 이 땅에서도 그들이 함께 모여 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그 하나님의 성도들이 분파주의의 죄를 따름으로 판단하고 그 혼합된 무리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모이기만 한다면 그들은 참으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라고 기록된 말씀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밖에서 볼 때 그 널판들은 금고리를 통과하는 조각목 띠에 의해 결합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성도들이 한 뜻과 한 마음이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시는 그분의 임재 앞에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게”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
만약 지역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온전히 결합되어 하나됨을 유지하려 한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들의 가르침” 즉 온전함과 순전함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된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부분도 합당치 않게 두드러지거나 억압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분열이 싹트며, 단체와 연합들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어떤 진리가 결여된 채 형성된 단체는 분파의 단체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해 결합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은 “교제”를 형성하며, “떡을 떼는 일”은 그것을 표현하며, “기도”는 하나님을 붙들어 그것을 유지시키는 힘을 얻습니다.
고리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진리는 필히 고수되어야 하고, 교만이나 편협이 아니라 사랑 가운데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98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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