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부흥
-O. J. 깁슨
이 글은 1992년 8월 8~10일까지 동대문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지면에 옮긴 것입니다. 계속해서 연재로 실을 예정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진노를 그치소서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대저 그 백성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저희는 다시 망령된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4~8).
시편 기자는 자기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회복되는 것, 곧 영적 부흥(소생)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러한 필요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이여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주십시오”(시 51 12)라고 기도한 사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매일같이 주님과 교제하는 이 즐거움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부흥이 올 수가 없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수여하는 분이십니다. 이 생명이 우리 속에서 새롭게 되려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우리 주님께서 하셔야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에게나 이와 같은 일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조건에 맞을 때 부흥을 주십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축복을 누리는 이 모든 것은 다 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의 생활에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격에 열매를 많이 맺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열매(갈
여기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애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그런 때는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강권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여러분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흥이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이 부흥을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점점 퇴보되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부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항상 퇴보(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일하는 동안 점점 피로에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런 쉼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영적으로도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점점 영적으로 나빠지기 때문에 힘이 외부로부터 우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적인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만이 우리를 부흥시키실 수 있고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소성(蘇醒)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흥을 이야기할 때 저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는 매일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제 영혼의 소성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받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오늘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매일같이 먹어야 되는 일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먹습니다. 저는 어제 먹은 음식이나 지난 주에 먹은 음식을 가지고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같이 새로운 생명의 원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 앞에 가서 영적인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 여러분! 제가 방문하는 이 모임, 또한 이 나라, 우리나라에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만 사회는 점점 더 부패해 가기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위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참된 자기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부흥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부흥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부흥하면 우리는 어떤 전도대회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지도 못할 뿐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을 고백한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들어 오지만 그러나 성도들에게 영혼의 부흥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부흥이라는 것은 전에 존재하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부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움(중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전도대회에서 손을 들고 주님을 믿는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생애 가운데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성령님이 그들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고 계시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위조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명의주의(名義主義)라고 하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미국)에 가면 이런 사람들이 수백만 명 있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 안에 성령님이 오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님을 모시고 있지만, 여러분의 생애가 타락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부흥에 대해서 더 관심을 기울이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시록에서 여러 교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 교회에 좋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칭찬받을만한 일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2,3장에 보면 주님께서 교회의 각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지도자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또한 그 지체들의 삶에 대해서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에베소 교회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주님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처음 사량이출 무엇일까요? 청년들은 이성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그와 같은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랑에 빠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 이 사람을 떠나서는 난 살 수 없어”, “아, 나는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한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이와 같은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이 사랑이 신혼여행을 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신혼이 다 지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서로에 대한이 애정이 움직임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집안에 있는 가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생각한 그 사랑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예레미야 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추억한다. 네가 나와 정혼했을 때의 그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그렇지가 못하다.”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크게 감동되어 주님 앞에 나온 그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로 오셔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여러분을 위해 돌아가신 이 놀라운 사랑을 기억할 때 여러분은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거저 구원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들어 오셔서 여러분의 생활을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사랑이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십니다. 주님은 그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첫사랑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밧데리가 약해지는 것처럼 약해집니다.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영적인 죽음의 그늘이 들어오게 됩니다. 여러분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 여러분의 현재 상태를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뜻의 중심에 살고 있다”, “난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주님의 영과 더불어 교제하고 있다”, “내 현재 위치가 이것이다”라고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난 뭐 그런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중심으로 살지도 않고 주님 밖에 살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계신 건가요? 그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는 말입니까?
“너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 넌 둘 중의 하나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둘 중의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미지근하다.”
음료수는 뜨거워야지 미지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하겠다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토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 가정에 가서 여러분이 대접한 음료수를 그와 같이 토해버렸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모멸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주님은 미지근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믿는 자들에 대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흥이 필요합니다.
시편 85편에 보면 이 시편 기자는 자기의 필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 백성들의 필요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부흥이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모임에 하나님의 성령님의 역사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알고 해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여러분의 생활에서 깨닫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에 대해 도와달라고 간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바치시기 바랍니다. ♠
(199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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