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플레니건
그분의 백성들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속죄제와 속건제 사이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5장의 처음 13개 절에서 “중간 영역”이라 칭했던 것이 있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한 구절만이 이것을 적절하게 보여줍니다.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하여 주께 범법 헌물을 가져오되 양이나 염소 떼에서 어린양 암컷이나 염소 새끼 암컷을 가져다가 죄 헌물로 드릴 것이요”(레 5:6). 여기에 짧은 한 구절에서, “속죄제와 속건제” 둘 다 동일한 제물을 설명하는데 사용됩니다. 대답은 비록 문제의 두 제물이 구별되어야 하지만 둘 다 적용되는 원칙이 있으며 레위기 5:1-13은 둘 사이에 전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부분에는 무지의 요소를 가진 범행의 죄들보다는 오히려 태만죄들을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이 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전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가 있습니다. 행정관에 의해 간청하는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그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마 오랫동안 풀밭이나 풀숲에서 걷다가 부정한 짐승의 사체가 발에 걸리는 사람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모르고 행해졌습니다. 그가 알고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든 만진 것이 아니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합니다. 더럽히는 교제는 사람을 더럽힐 것이며 조심스럽게 피해야 합니다.
첫째로, 죄에 대한 완전하고 솔직한 자백이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일들 중 하나에서 유죄가 되면 그는 자기가 그 일에서 죄를 지었다고 자백할 것이며”(레 5:5). 자백은 그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특정한 죄와 관련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적절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4:28,32의 평민을 위해 양떼의 암컷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 새끼를 요구했습니다. 그 끔찍한 문장이 나중에 성경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20)고 되풀이될 것입니다. 아담조차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지만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벗어나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만약 다른 허용되는 삶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은 범죄를 위한 대체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아래서조차 매우 자비로우신 그분의 뜻은 나중에 언급될 것처럼 일부 백성들의 결핍된 자원을 용인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은 성막 뜰에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합니다(레 6:26). 제사장은 죄인의 심정으로 들어가 죄의 심각함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교훈은 모임에서 인도하는 책임 있는 형제들이 진실한 제사장의 마음으로 거룩한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 아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진영의 공표에서 퍼뜨리거나 험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시되었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일부 백성들의 빈곤을 은혜롭게 기억하십니다. “만일 그가 능력이 없거든”(레 5:7,11)이라는 문구가 두 번 발견됨을 주목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제물을 바칠 어린양을 가져오는 것의 자원이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그들은 산 비둘기 두 마리나 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올 수 있었고 이것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새 한 마리는 속죄제로 봉헌되었을 것이고 그것의 피는 제단 곁에 뿌려지고 또 제단의 바닥에 짜서 흘렸습니다. 그것은 죽음, 희생물의 대속의 죽음으로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두 번째 새는 번제물로서 죄인의 필요를 충족할 때에 하나님을 위한 몫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의 새조차 일부 백성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는 속죄제를 위한 고운 가루의 에바의 10분의 1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름이나 유향을 바르지 않은 다만 가루 몇 파인트(0.55리터)로 추정되었지만 일어나는 문제는, “어떻게 속죄제로서 용서를 얻기 위해 피 없는 제물로 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실제로 피가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재력에 따라 바치고 있었으며 그의 제물의 규정된 한줌은 다른 제물들의 피에 함께 흠뻑 적셔져서 제단에 있을 것입니다. 이 제물의 남은 것은 소제로서 제사장의 음식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아이들과 의지가 약한 이들이 극단적이고 완전한 단순함으로 구주를 찾아옵니다. 그들이 속죄와 화목과 대속과 속죄 그리고 칭의 사이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요? 천만에요. 그들의 마음의 자원은 실제로 빈약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것과 그들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복주심은 고운 가루 에바의 10분의 1처럼 충분합니다. 토마스 뉴베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자기를 낮추십니다.”
'짐 플레니건 > 제물 안에 그리스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제 (1) (0) | 2022.11.04 |
---|---|
소제 (2) (0) | 2022.11.04 |
화목제 (1) (0) | 2022.11.04 |
화목제 (2) (0) | 2022.11.04 |
속죄제 (1) (0) | 2022.11.04 |
속건제 (1) (0) | 2022.11.04 |
속건제 (2) (0) | 2022.11.04 |
제물 안에 그리스도: 부가물 (0) | 2022.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