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유전들(1)
‘유전’이라는 말은 종종 신약성경에서 나쁜 의미를 갖는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우리는, 신약성경 시대에서 바울보다 더 장로들의 유전의 나쁜 영향을 받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바울은 헤롯 아그립바 2세에게 “내가 우리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행 26:5)”라고 말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쓰면서 바울은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갈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후서 2: 15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라고 교훈한다. 데살로니가전서에 있고 데살로니가인 가운데 있는 가르침은 매우 좋은 의미에서 유전이라 불린다. 다음 장에서, 이 전통들은 말로나 글로 가르친 것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그들에게 본으로 보인 것에 대한 것도 말하는 것이다(살후
최근에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고 다가오는 세대에 호소력이나 의미가 거의 없는, 그저 인간적인 규정이나 관행으로 된 많은 유전들을 지역교회들이 가지고 있다는 비난을 자주 듣는다. 나는 이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주의 깊게 들었고, 그저 ‘형제들의 유전’이라는 항목들을 적어 보았다.
지역교회의 실행에 대하여 순수한 질문을 가진 많은 믿는 자들이 있다. 우리들은 그들의 질문을 ‘진리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이어지는 것은 적어도 이 몇몇 질문들에 대답하려는 한 시도이다.
1) 우리는 어디서 가스펠홀(Gospel Hall)이라는 이름을 취했는가?
지역교회들이 심긴 것을 본 초기의 많은 복음 전하는 자들은 지역교회와 그들이 모이는 건물과의 차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현대 종교의 성소(성전)는 유대교 혹은 이교도 습관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 받았다. 그들은 하늘의 성소에 있는 영적인 예배의 대원칙을 이해했다(6장을 보라). 그들은 기독교계가 예배의 거룩한 성소(성전)로 여기는 이름으로 종교적인 건물을 부르는 잘못을 피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시종일관 복음을 전했고, 그리고 복음 사역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복음이 전해지는 장소에 복음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논리적이다).
독자는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복음(gospel)이란 용어 사용은 반대하지 않으나,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홀(hall)’이라는 용어 이다’라고 함직하며, “우리가 가스펠 홀(Gospel Hall)에 속한 사람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제2의 이름이 아닌가?”라고 함직하다. 이것은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후자는 캐나다 사니아의 고(故) 스튜트(Stutte) 형제님의 말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그가 고용되어 있는 주물공장 사람들이 “스튜트씨는 가스펠 홀(Gospel Hall)에 속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런 식으로 고쳤다. “나는 주 예수님에게 속했고, 나는 주 예수님께 속한 다른 믿는 자들과 만나며, 가스펠 홀(Gospel Hall)은 우리에게 속한다.” 이 간단한 논리에 더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홀(Hall)’은 이름이 아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정말로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은 이름이 아니며, 창고도 이름이 아니고, 공장도 이름이 아닌데 동일하게 상점, 가게, 제품창고 혹은 차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구조의 용도에 대하여 기술하는 말이다. ‘홀’은 이와 같은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에 대하여 보통 기술하는 말이다. 그것은 여전히 이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소로 카네기홀, 라디오 시티 뮤직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머세이홀 등이 있다.
이것은 ‘홀’이라는 말의 사용에 대한 변명이지만, 우리는 적당한 견지에서 이것을 지켜야 한다. 건물의 이름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나, 우리들이 모이는 건물에 성경적이지 않은 이름을 붙이는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역교회들 간의 교제는 건물에 주어진 이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 모이는 장소로서 여전히 많은 집들 혹은 학교들이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 붙이는 이름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소(성전)로 생각하게 하는 암시의 이름으로 결코 부르지 말도록 충분히 가르침 받아야 한다.
여러 좋은 의미에서 믿는 자들이 ‘채플(예배당)’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이 ‘홀’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플(chapel: 예배당)’이란 이름은 프랑스 뚜르의 수호 성인 마르뗑이 입고 있던 케이프(cape) 혹은 망토(chapelle)에서 유래한다. 그의 케이프는 신유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졌고,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성소에 안치되었다. 북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인기 있는 이름 채플(예배당)’은 이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 의미나 어원을 거의 모른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국에 있는 지역교회들은 로마 가톨릭이 미사 드리는 데가 보통 ‘채플(예배당)’이라고 불린다는 명백한 이유로 해서 통상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이 전파되는 ‘홀’로 건물을 명명한다.
2) 왜 우리는 매주 첫 날 이른 시간에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가?
이것은 분명히 사람의 유전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만찬을 위한 시간을 명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게다가 또 만찬(晩餐)은 저녁에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대답은 초실(처음 것)에 대한 대원칙을 포함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일년에 세 번 주님 앞에 보여야 하는 때에 관한 첫째 명령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들이 시내산에서 장막을 쳤을 때(출
이 하나님 우선 원칙은 신약성경에도 미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종종 복음의 본문으로 다룬다. 비록 그 적용은 좋지만, 마태복음
주 예수님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가지고 책망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거듭난 믿는 자로서 처음 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사랑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랑이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과 지역교회에서 첫째 자리, 즉 뛰어나심은 주 예수님께 속한다.
영적인 예배의 중요성을 배운 사람들은 영적인 예배가 모든 다른 봉사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앞선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구속 받은 우리 영혼들의 초실(初實)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바울은 사도행전
떡을 떼는 것은 첫날 저녁에 행하였음이 또한 매우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도 또한 저녁에 떡을 떼야 하며, 주님을 위한 다른 봉사를 하는데 낮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드로아에서 그들은 가능한 이른 시간에 떡을 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로부터 자유로운 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으면, 제사장의 봉사가 레위의 봉사보다 우선권을 가지며, 한쪽이 없으면 또 다른 한쪽이 없는데,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첫째 자리에 차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떡 떼는 집회(모임)를 첫 번째 자리에 놓는 것이다. 시간과 순서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서 영적인 예배보다 앞서거나 우선권을 갖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든, 우리의 찬양 혹은 금전을 드리든 원칙은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이다.
3) 만찬에서 왜 의자를 둥글게 놓는가?
여러 해 전에 우리가 새로 회개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역교회의 집회(모임)의 진리를 가르치려고 시도하였을 때, 떡 떼는 집회(모임) 혹은 기도집회에서 의자를 둥글게 놓는 것에 관한 주제가 나왔다. 이 실행을 지지하는 성경은 어디인가? 나는 내가 대답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이 집회와 다음 집회 사이에, 나는 무릎을 꿇고 성경을 읽었다. 하나님은 내 영혼에 큰 축복으로 이 경험을 주셨다.
신약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엔 메소오(en mesoo)’이며, 그것은 원 혹은 둥글게 모인 데에서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가운데서(in the midst, 안에서, 중에서)’라고 번역이 되며, 주님이 12살 때 선생들 중에(in the midst)(눅
주님 주위에 모여진 모임이라는 것은 기하학적인 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일날 아침에 평상시 있는 그 자리에 의자를 둥글게 놓을 때, 우리는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가운데(on mesoo) 계신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 점에서 우리가 주의 만찬에서 의자를 둥글게 놓는 영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음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지역교회의 다른 모든 집회(모임)에서도 동일하게 가운데(in the midst)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규정화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집회(모임)가 가르침이나 전도를 위하여 열릴 때, 우리의 관심은 무리에게 말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로 향한다. 주의 만찬에서 우리들은 떡과 잔, 그리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주님으로 차지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로 향한다. 원에서는 중심 이외에는 두드러지는 자리가 없다. 심지어 상당한 은사가 있는 형제가 있다 할지라도 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된다.
4) 뒷좌석에 대한 성경적인 권위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책의 12장에서 이 주제를 충분히 다루었다. 거기서, 고린도전서
주의 만찬에만 ‘뒷좌석’이 있어야 되는 간단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되는 지역교회의 유일한 모임이다. 같은 의미로 기도집회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조용히 기도하는 동안에 한 사람은 소리를 내어 기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공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없다. 이 ‘참여하다’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뒷좌석(back seat)’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지만, 아주 정확한 말은 아니다. 자리(위치)는 비물질적인 것이라서, 지역교회의 교중 사람’과 ‘외인’의 경계선만 분명하면 된다. 우리는 표현을 트집잡아 큰 영적인 진리를 잃으면 안 된다. ‘배우지 못한 자의 자리(무식한 처지<한글 개역성경>)’는 형제들의 유전이 아니고 신약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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