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지역교회의 징계(Ⅲ)
⇒ 내부 징계
내부 징계의 다양한 형태를 다루는 곳이 성경에 많이 있다. 우리는 이장에서 내부 징계들을 다루며, 그것들이 지역교회에 주는 영향을 기술하려고 한다.
1) 죄(잘못, a trespass)로부터 회복 - 갈라디아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고린도전서
2) 장로들의 기도 - 야고보서
야고보서 5장은 병든 믿는 자에 대하여 기술한다. 이 병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왔다는 사실이 근저에 있다(15절). “너희 죄(hamartias-sins)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이 경우에 대한 성령의 해설이다. 우리는 인도하심을 따라 이것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믿는 자가 죄를 범한다. 그는 병이 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한 심판임을 깨달아 장로들을 청하여 그의 죄를 고백한다. 장로들은 기름을 바르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는 나음을 받는다. 야고보서는 매우 초기의 서신이다. 그러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문제는 기름을 바르는 데 대한 것이다. 이것은 초기시대에 증거(표적)로 행했던 병 고치는 은사의 활용의 경우가 아니다. 그 사람은 사도나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지역교회의 장로들’을 불렀다. 이 이유로 해서 하나님의 치료의 수단으로서 기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 약으로 사용된 것 같다.
3) 불에서 끌어냄 -유다서
이 구절들은 이미 살펴본 두 가지와 매우 유사한 경우로 기술한다. 차이는 배교의 거짓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모든 자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그 가르침에 정복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유
4) 규모 없는 형제로부터 해방 - 데살로니가후서
이 구절은 내부 징계 활동의 분명한 한 예이다. 지역교회는 조치를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모 없는 자는 지역교회에 남아 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행함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에 있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지역교회를 가르쳤다. 바울은 이 모본을 “우리에게서 받은 유전”이라고 부른다. 이 행동은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양식을 얻기 위하여 일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비록 이것이 바울이 행했던 것처럼(딤전
그것은 바울이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14절)”라고 쓴 배경에 반대되는 것이다. 이것은 출교는 아니다. 이것은 규모 없는 자에 대하여 지역교회 편에서 해야 할 내부 징계이다. 머지 말고”는 그의 규모 없는 생활에 아무도 동조하지 말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악수를 하지 않거나 그에게 말하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이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되풀이하지만, 그 목적은 그의 나쁜 행동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음 - 디모데전서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자 하는 구절은 그 안에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징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 진리에 대하여 모든 것을 논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나, 여기는 그것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19절에 있는 장로의 보호는 분명히 우리들의 주제의 한 부분이다. 장로에게는 늘 의(義)에 의하여 요구된 보호가 주어져야 한다. 장로에 대한 어떠한 근거 없는 송사도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송사가 받아들여지기 전에 두 증인은 요구되는 최소한의 사람의 수이다. 이것은 송사를 조사하기 위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어떤 사람들은, 20절이 장로들에 대한 송사의 주제가 계속되는 것으로 가르쳤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두세 증인이 없는 장로에 대한 송사가 발생했거나, 혹은 두세 증인의 말을 들어본 후에 그 송사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일 송사를 일으킨 사람 혹은 사람들이 근거 없는 송사를 계속 주장한다면, 그 때 그들은 한 장로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 공적으로 꾸짖음을 들어야 한다. 이 해석은 우리들에게 꾸짖음을 요구하는 죄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이점이 있다. 이것이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20절과 19절 사이에 관계를 지어 말의 선한 의미를 왜곡시키며, 인간적인 억측의 개입이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이 꾸짖음의 문맥을 진지하게 생각한 후, 만일 송사를 받은 장로가 죄를 지은 것이 증명되거나 혹은 어떤 다른 믿는 자가지역교회 안에서 죄를 지은 것이 드러난다면, 그 때 그는 꾸짖음을 들어야 하고 공중 앞에서, 즉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음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 들여야 한다. 20절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19절과 그렇게 가까운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다. 바울은 서신의 이 부분에서 일련의 교훈을 주고 있다. 어디에서 주제가 시작되고 끝나는지에 대하여 독단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범죄한 자들(them that sin)”이란 구절은 19절의 그 장로에 한정되지 않고, 지역교회 안에 있는 사람 누구나 포함되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를 들면, 지역교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을 꾸짖는 데 사용되어야 할 성경 말씀이다.
믿는 자들에게 한 기준이 있는데 장로들에게는 더 낮은 기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사실 장로들에게는 더 높은 기준이 있다. 만일 한 장로가 죄를 범하고 지역교회 안에서 두 사람 이상이 그 장로의 죄에 대하여 알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명히 실족할 것이다. 장로는 매우 특별한 책임과 임무가 있다. 꾸짖음은 그의 삶을 파괴하는 목적으로 또는 그 사람을 허무는 심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하는 궁극적인 목적으로 해야 한다. 아마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적고, 우리들의 죄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너무 희박하여서, 우리는 꾸짖음 받은 장로가 장로 일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한 다른 측면은, 만일 그 죄가 알려졌는데도 처리(심판, 판단)되지 않고 그 지역교회가 그의 죄에 가담되었다면, 그 장로는 책임을 수행할 수 있을까(22절)라는 점이다.
이 해석이 갖는 문제는,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음을 받는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분명한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출교에 해당하는 죄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는 쫓겨나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이 아닌 적어도 두 사람에게 알려진 죄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남들 앞에서 저지른 죄였거나, 다른 사람들이 목격한 증인을 확보한 죄였다. 그것은 공적이지 않고 주님에게만 고백할(요일
6) 거슬려 말하는 자들의 입을 막음 - 디도서
이 구절들은 종종 지역교회 내부 징계에 적용되어 왔다. 그래서 잦은 쓰임의 견지에서 이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디도는,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딛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12절)”라고 말한 선지자는 복종치 아니하는 부류의 하나였다. 이 인용의 근거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13절)”려 하게 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누구를 엄히 꾸짖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 자신이 속이는 사람들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복종치 아니하는 자들’인가, 또는 지역교회들 안에 있는 그레데인인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의 대명사(저희)는 10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2절로 간다. 10절에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들과 12절의 그레데인 둘 다에 대한 참된 한 가지 사실은, 그들 양쪽 다 그레데에 살지만 그들은 매우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1절에서 ‘입을 막는 것’은 지역교회 에 있는 형제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13절에 있는 게으름에 대한 꾸짖음이 형제들에 대하여 하는 것이다. ‘입을 막는 것’은 징계의 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미쁜 말씀의 가르침(9절)’을 따라 그대로 살고 말하는 능력인데, 건전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죄를 깨닫게 되며 그들의 입을 닫는다는 것이다(9-10절).
그럼 지역교회 안에 있는 복종치 아니하는 자(unruly men)를 잠잠케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그가 말하는 모두가 거짓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사람(형제)이 하는 가르침이나 전도를 막을 방법을 지역교회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인가? 아니다. 지역교회에 있는 모든 은사들의 기능을 통제하는 분명한 말씀이 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7) 이단(분파)11)에 속한 사람을 멀리함 - 디도서
‘이단에 속한자’라 번역된 말은 문자 그대로 ‘분파적 이다. 이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여 자기자신의 특이한 관점을 지역교회에 계속 강요하는 사람이다. 책임 있는 형제들로부터 두 번 주의 받은 후에도, 그가 그 분파적인 가르침을 계속한다면, 그를 피해야 되며, 그의 가르침을 허락하거나 가르칠 장소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타락해 있고 자기가죄 짓는 것을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 믿는 자들은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11절).
이것은 ‘이단’ 즉 믿음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성경 말씀이 아니다. 교리적인 이단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는 디모데전서
11) 한글개역성경에는 ‘이단’으로 되어 있으나 흠정역에는 ‘분파적인(factious)’의 의미인 ‘heretick’로 되어 있음.
8)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 - 로마서
이 구절은 복음의 진리의 교리를 충분히 다룬 이 위대한 서신을 마감함에 있어서, 주어진 가르침에 반하여 분열을 일으키며 실족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의 붓으로부터 나온 명백한 경고이다. 빌립보서
그러나, 로마서
우리는 종종 이 내부 징계 형태들을 실행하는 데 실패한다. 만일 우리가 이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함에 관하여 더 주의했더라면, 더 심한 종류의 징계에 직면하는 경우가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실패에 대해 아무런 변명을 하지 않는 한편, 우리는 지역교회들이 여전히 실제적인 징계를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깊이 감사한다. 교파 조직에서는 거의 없어져 버렸지만, 어떤 독립된 무리들은 아직도 이 말씀을 순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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