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지난 마지막 시간에 휴거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휴거라는 단어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알 것입니다. 우리는 4장에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라는 단어를 봅니다. "들어 올려"라는 말은 잡아서 끌러 올린다는 의미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이 전체 사건을 일컬어서 휴거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주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의 주의 날과 4장의 주님의 공중에 오시는 날은 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앞 시간에 말했습니다. 이제 성경 전체의 흐름을 알면 좋을 것입니다. 5잘 1절에서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첫 번째 맞이할 사건은 휴거입니다. 휴거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은 이 땅에 있을 대환란입니다. 7년의 대환란 끝 무렵에 주 예수님이 이 땅으로 재림하십니다. 그 다음은 이 땅에서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르기를 천년왕국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천년 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여섯 번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천년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다가올 사건의 그림을 잠시 말씀드리면 휴거가 있고, 7년 대환란이 있고, 그리고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게 되고, 이어서 천년왕국이 됩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이 성경 전체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언에 관해 자세한 것들을 아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사건을 올바른 순서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간에 휴거에서 주의 날로 옮겨가겠습니다. 바울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를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주의 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용어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것은 주의 날과는 다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것은 휴거 된 다음에 심판대 앞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날이라는 것은 구약 속에 있는 약속의 말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심판하는 날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이 심판이 쏟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7년 대환란은 주의 날의 시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의 날은 더 연장이 되어서 천년왕국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는 주의 날에 하늘과 땅이 풀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날의 마지막이며 그 후에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날에 일어나는 그 일이 땅이 해체되는 것을 말한 다음에 하나님의 날을 소개했으며 이 하나님의 날은 영원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지난 복음 시간에 이 우주가 빅뱅으로 시작된다고 말한 사람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사실 빅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빅뱅(대폭발)은 출발이 아니라 끝을 맺는 것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베드로후서 3장에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 폭발로 하나님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마음 속에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실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평화롭게 이어져 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흰 말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흰 말의 상징은 이 세상에 평화를 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활을 가졌지만 화살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을 속이면서 마치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처럼 위장하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존재에게 만족을 하고 그 사람에게 의탁할 것입니다. 중동 문제를 이 사람이 풀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풀어낼 것이며 이스라엘 남은 사람들과 협정을 주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종교적인 평화를 약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환란 전반기 3년 반 동안에 그 평화협정이 실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환란 중반에 그 평화협정을 깰 것이고 종교적인 특권을 박탈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그의 우상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법률들을 무효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경배하도록 압박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은 전 세계의 평화를 가장해서 전 세계 평화를 훔치는 것입니다. 흰 말이 나온 다음에 이어서 다른 말, 즉 붉은 말을 탄 자가 등장을 합니다. 여기는 피와 전쟁을 상징하기 때문에 전 세계 평화를 제거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평안하다, 안전하다로 출발하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예기치 못한 때에 밤에 갑자기 찾아온다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이 계속 진행하시면서 세상을 다루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접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 심판은 강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7년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반기 반을 일컬어 이것을 고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년 대환란의 중반에 짐승이 성전에 들어가는 그 시점이 바로 큰 환란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7년 전체를 우리는 일컫기를 대환란이라 부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반기 3년 반은 환란의 시작이고 더 엄밀히 말하면 후반기 3년 반이 대환란인 것입니다. 여기는 우주의 질서도 파괴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 상태의 재해처럼 보이는 재해가 나옵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환란이 오고 전세계적인 전쟁의 모습이 나오는 등 이러한 모습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때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기하지 못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도적이 임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인이 갑자기 진통이 와서 해산하는 것도 말했는데 7년 대환란의 심판은 도적같이 올뿐만 아니라 여인이 해산하게 되는 것처럼 갑자기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4장 마지막에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5장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 어떻게 주님이 오시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이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7년 대환란 동안에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믿는 자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지, 그리고 갑자기 없어지는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4절에 보면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할 것은 이 은혜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밤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임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7년 환란 전에 분명하게 휴거되는 것을 믿습니다. 이 휴거는 믿는 사람들에게 소망입니다. 만약에 환란을 통과한다면 우리의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것을 기다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설명합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주께서 곧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서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머지않아 오실 이가 오시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마지막에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내가 가서 다시 오리라"고 휴거를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온다는 그 중간에는 사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 성도들은 중간에 개입되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주님이 "곧" 오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 기사를 보든지 어떠하든지 간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의 어떤 징조를 통해서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우리는 "구원의 주를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어떻게 기다려야 할 것인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환란 가운데서 우리를 건지실 거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환란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은 휴거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내가 너를 이 세상에 임할 환란으로부터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이 세상에 임하는 7년 환란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환란을 면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서에서 말하는 용어와는 조금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야곱의 환란"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환란에서 건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란에서 건진다는 말은 첫째로 환란 가운데 있는 것을 건져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고 건져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란에서 건져내야 하기 때문에 환란에 들어가야 하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환란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잡혀서 들어 올리움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빛의 자녀, 낮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낮과 밤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영역이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두움, 곧 밤입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은 빛이면서 낮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리를 중요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자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어리석음으로 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금방 자기만족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뒤로 넘어갈 수도, 즉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주로 믿는데 뒤로 물러가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떠내려갈 수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은 4장에서 말하는 자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4장에 잔다는 것은 죽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5장에서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상태로 자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군인이 자기 임무를 하는 것처럼 깨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투구를 말하는 것을 볼 때 군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은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마지막에는 졸 수가 있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디도서에서는 나이든 사람들에게 "깨어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집에 있을 것입니다. 아직 천국에는 가지 않았지만 먼 여행을 왔기 때문에 위험한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승마경기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그랜드네슬러라는 승마경주가 제가 사는 나라에 있었습니다. 말들이 경주장에서 점프를 하고 넘어가는데 앞에 벽이 있어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뛰어서 넘어졌기에 굉장히 경악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신문의 톱뉴스가 되어 보도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든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위험한 위치에 가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노아도 은혜스러운 사람이지만 그 마지막에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기드온도 처음에는 좋았지만 마지막에는 우상을 도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솔로몬도 그렇습니다.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다윗도 젊을 때이지만 도덕적으로 실족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말하기를 정신을 차리라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깨어라, 정신을 차리고 끝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에 낮에 속한 너희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지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첫 날 1장을 말할 때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다시 이것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여러분을 지키고자 한다면 가슴에 흉배를 붙이라고 말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게 되면 그 사람은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권면합니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주목해 보십시오. 에베소서에 나오는 투구도 구원의 투구입니다. 에베소서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구원의 투구입니다. 여기는 장래에 올 구원의 소망의 투구입니다.
구원의 세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었을 때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종교적인 분이 있다면 그러한 분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올 일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하는 행위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다면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이 이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그리고 현재 구원에 관한 의미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매일 생활에서 악으로부터 건짐 받는 의미에서 구원을 받으라고도 말을 합니다. 또 하나는 이 소망의 구원처럼 앞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말하기 때문에 미래에 관한 소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여러분의 마음을 걱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래에 관한 소망을 보게 되면 여러분 주위에 있던 걱정들은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십시오. 8절 후반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에 관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노하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심판인 지옥을 말하기보다는 예를 들어 로마서 1장에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겠습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영원한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앞으로 다가올 7년 대환란의 노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문맥은 주의 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바냐서를 읽은 적이 있습니까? 성경 어딘가에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성경이 깨끗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별로 침이 묻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여기저기 더러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어딘가에 보면 스바냐 1장에서 주의 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믿는 자들은 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 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고 하는가는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휴거를 당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제가 어렸을 때 제 주변에 이상한 가르침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아홉, 열 살쯤의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저에게 안내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이가 들어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소년인데 그러한 이론들이 그 주변에 있었는데 부분휴거라고 불리는 이론이었습니다. 휴거되려면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문맥에서 벗어나서 조합해서 가르치는 이론이었습니다. 만약 주님을 바라본다면 거기에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면 내려온다고 하는 이론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요점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휴거 되는 것은 우리들의 충실함이나 진실함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심에 휴거의 요건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에 휴거의 요건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 다음에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휴거 될 때에 얻는 모든 영적인 축복은 여기 말씀 그대로 "우리를 위해 죽으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자든지 깨든지 바로 이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잠든 데 관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공중에 오실 때 영적으로 내가 민감하게 깨어 있든지 어쩌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휴거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우리가 "끌어 올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5장에서는 그와 함께 산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날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11절에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적인 부분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12절에서는 모임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서 여기는 장로들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장로들에 대한 책임을 할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권면하기를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한 모임에는 장로가 한 명만 있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도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밤에 우리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라고 복수로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역교회 장로들은 복수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수고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장로들은 수고합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말한 바울의 말이기도 합니다. 장로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일을 하고 수고하는 자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직함이 아닙니다. 또한 행정적인 지위도 아닙니다. 이것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것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전도인의 일을 하며"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머리로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수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것을 수고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도 수고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장로인 감독도 수고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저의 역사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장에서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너희가 우리의 수고를 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확증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복음을 갖고 올 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수고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수고하는 사람을 알라고 권면합니다. 이런 면에서 모임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사랑가운데서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임들은 그 모임에 인도자들에 의해서 특징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 수고하는 사람을 알라고 권면합니다. 분명히 말하는 것은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사람들 가운데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나와있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감독들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지역교회의 장로가 되기 어렵습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 없다면 그 자리에 있는 성도들을 돌볼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라고 말하며 "너희 가운데 있는 양무리를 치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목자는 양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를 다스리는 자들을 알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임을 다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최고의 권위로 다스리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사람은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다스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너희 가운데 있는 양무리를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도 말했습니다. 목자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본을 보이면서 먼저 앞서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다스리는 감독자들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일을 하는 장로들은 잘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들이 알라"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를 알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정을 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세운 장로들을 그 모임의 지체들이 알아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너희들을 교훈하는 자들을 알라고 말합니다. 권면해서 그 사람들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권면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스립니다. 만약 장로들은 어떤 말씀을 엇나가는 성도가 있으면 성경을 가지고 그 사람을 성경적으로 바로 잡는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권하는 일은 바로 말씀을 벗어났으면 말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13절에서는 "가장 귀히 여기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시간을 쓰고 힘을 썼습니다. 그런 장로들을 이와 같이 가장 귀히 여기고 존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로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는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모임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주님이 보고 계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만약에 장로들이 그 모임에서 구체적인 사항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일반적인 말은 이와 같이 장로들을 평가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화목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두 자매순두게와 유오디아에게 화목을 명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순두게와 유오디아 같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모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피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어떤 장애를 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비참하게 하고 때로는 증오를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마엘에게 말하기를 너는 사람들을 대적하겠고 사람들은 너를 대적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마엘 같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말씀처럼 화목하기를 바랍니다. 형제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라는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 때 주께서 임하사 복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임의 축복 가운데서 어떤 경우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모임에서 함께 머무를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여기서 말하기를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권면합니다.
14절에서도 또 하나의 권면이 있습니다.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라"고 했습니다. 규모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을 깨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후서에 나와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크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규모 없다는 말은 게으름이 포함됩니다. 이야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동정에 의해서 살고자 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깬다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장로들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힘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실망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 중에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넘어질듯한 그런 약함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장로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격려해서 붙들어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서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한 자들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약한 자들에 대해 문맥을 통해서 보게 되면 로마서 14장에 약한 자들을 보면 유대인 사상을 가진 약한 자들임을 알 수 있고, 에베소서의 약한 자들을 돕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약한 자들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때로는 도와줄 필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약한 자들은 영적으로 약한 자들을 말한다고 봅니다. 규모 없는 자들 힘없는 자들, 그리고 영적으로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리고 권면합니다. 어떤 경우에 영적으로 약하면 슬픈 일입니다. 한쪽 약함에서 다음 쪽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렇게 안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그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도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이 장로들이 할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보고 격려하고 도와 주는 것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떤 경우에는 끝없이 참아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오래 참는 것을 권면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즉시로 어떤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즉시로 그것을 다루어야 될 때가 있지만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참으며 가르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들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는다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보복을 해서는 안됨을 가르칩니다. 만약 복수를 하게 되면 그 죄는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이와 같이 인색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이 딱딱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불친절에 대해서 약간 아쉬움을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진심인지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하든지 간에 절대로 마음 속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어떻게 자기 형제들을 대했는지를 알고 계십니까?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한 것을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이 사울을 대했습니까? 다윗을 사울이 대한 것처럼 사울에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절대로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대했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도 복수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영원히 우리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19절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성령을 소멸하겠습니까? 성령이 개입하는 것을 무시함으로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하게 되면 성령이 근심하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을 하지 않게 되면 바로 성령을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을 멸시치 말고"에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내려왔습니다. 지금의 예언은 바로 성경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되면 여기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는데 만약에 여러분 주위에 있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면 그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맞는지 아닌지? 의문표가 붙게 되면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보았듯이 "음란을 피하라"는 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음행을 말합니다. 여기는 가르침적인 말씀의 좋은 것을 말합니다. 만약 가르침적으로 불건전한 것은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 말씀들이 서로 분변하기 힘들어 가는 것을 봅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헤아리는 것, 즉 시험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거절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그것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2016. 05. 05(목) 강서 특별말씀집회 6 잭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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