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4장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이미 앞에 세 장을 보았습니다. 1, 2, 3장은 과거에 관한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부분임을 이미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1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역사였습니다. 특히 1:1-12절까지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행위에 관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2장에는 이미 경험한 핍박에 관한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3장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를 방문한 다음에 다시 돌아온 것에 관한 기록임을 보았습니다. 4장의 앞에 12개 절은 실제적인 삶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도덕에 관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중간에는 형제 사랑에 관한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을 향해서 단정히 행하라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휴거에 관한 것을 주제로 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바울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그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권면했습니다. 여기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어떻게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굳게 서기를 원하며, 굳게 선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권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어떻게 행하며 그것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음을 걷고 있는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는 말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의 자세함을 초반에서 말합니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광야를 언급하며 "하나님이 그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이렇게 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저에게도 또한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믿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한 주 안에서 그들을 권면했습니다. 바울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권면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읽고 순종하고 읽고 순종하는 반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더욱 더 많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한번 했다고 해서 이것을 절대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목적지까지 못 간다면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해 나가야 됨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뒤에도 형제 사랑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더욱 더 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기 자신을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스스로를 영적이라고 느낍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세상적인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전진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더욱 더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도덕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약간 복잡한 하나님의 말씀의 부분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마음에 관해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첫 번째로 음란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혼전 성교는 하나님이 금하는 음란 죄입니다. 우리는 결혼한 사람이 결혼 이외의 범죄를 종종 듣는데 이것이 세상에는 보편적이지만 성경은 그것을 정죄합니다. 이런 행위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음란을 버리고 멀리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는 성의 상대에 대해서 분명하게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왜 음란으로부터 멀리해야 되는지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에 거룩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진다는 것은 구분되어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목적을 위해 분리되어 그것에 접촉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한 바탕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한 번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시고 성 바깥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구분되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믿는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을 구원한 그 믿음이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 받을 때 이미 하나님 앞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구원의 두 가지 면 중의 한 면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음으로 거룩해졌다고 하는 것과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한 이러한 거룩을 베드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베드로는 권면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실제 삶에서 하나님 앞에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음란을 반드시 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또 다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같이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나머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냉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된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되지 말라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분을 말할 때 또 다른 면에서 다른 것들과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 다른 사람들과 삶이 다릅니까? 시편기자는 "내가 구덩이에 빠질까 두렵다"라는 시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도덕기준과 같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도덕이 그들과 같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6절에서는 왜 음란을 피해야 되는지 또 다른 이유를 말합니다.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형제가 갖고 있는 것을 시기함으로 그것을 해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행위를 하지 말아야 되는지 이유는 "주께서 신원하여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면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윗의 죄에 대해서 신원하셨습니다. 다윗의 잘못으로 다윗 집안에 많은 환난이 들어왔습니다. 어린 아이가 죽고, 한 아들이 바로 간음을 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을 살인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이 아버지인 자신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의 집에는 네가 한 행위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음란의 죄를 저지르게 되면 그 뿌린 씨를 반드시 추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주께서 신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말로 "혼인을 귀히 여기라",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7절에서는 왜 음란을 버려야 되는지 또 다른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백성들을 불렀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복음으로 우리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의 호소에 응답했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왔습니다. 여러분의 신뢰를 그분에게 두었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부름으로 불렀습니다. "우리를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전체가 부패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 마음에 빛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해서 높은 기준의 청사진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부르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은 실망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8절에서 음란을 버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된다면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즉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사울 왕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네가 내 말을 무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네가 나를 무시했기 때문에 네가 내 말을 무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지막으로 왜 우리가 음란을 버려야 되는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십시오. 여기서는 진리의 성령을 주신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 영원하신 성령을 주셨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명칭을 주의해 보십시오. "그의 성령"이라고 성(거룩한)령이라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구원 받을 때 거룩한 인격의 성령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거처 삼으시고 성령의 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에서 거룩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가 왜 음란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열거했습니다. 이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이 전체 항목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원하시기 때문에 말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에서는 형제 사랑에 관하여 넘어가며 더 이상 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믿는 자에게 형제 사랑은 자발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 자매들에게 형제사랑에 대해서 강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순수하고 자연스런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형제사랑을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실제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하게 되면 전혀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실제적인 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한서신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가르치며 살인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놓고 생각을 할 때 어떤 경우는 형제들에 대해서 약한 면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있던 좋지 않던 감정이 더 발전되지 않도록 관리하기를 바랍니다. 형제 사랑 이것은 모든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야 될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조금 전에 감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형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력한 아주 실제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순수한 사랑은 늘 증명이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했습니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셨음을 나타내셨습니까? 그 자신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사랑은 증명하는 것이고 사랑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편지를 쓸 때 '그리스도의 애정으로'라고 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 순수한 사랑은 증명하는 것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고 말합니다.
10절에서는 사랑은 부분적이지 않고 전체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임에서 이런 사람에게만 사랑을 한다고 선택합니까? 아니면 모든 성도를 다 끌어안고 사랑을 나타냅니까? 우리는 상대적인 사랑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사랑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있는 것으로 족하지 말고 더 전진하라고 권면합니다.
11절에서 또 다른 주제는 단정한 삶의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라는 권면을 합니다. 남의 일에는 참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 일에 부분적으로 관련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내 일을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이 손으로 내 필요한 것을 담당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머리로 일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힘들게 손으로 하는 일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머리로 일하는 것이 모든 사람이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육계에 투신할 수 있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머리의 능력은 여러 다양한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대학에 가지 못한다고 결코 그것 때문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하십시오. 따라서 바울은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 궁핍함이 없게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임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도 분명하게 모임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중 사람과 외인을 구분합니다. 물론 모임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환영합니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비밀스럽게 모이는 모임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모임이 증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교회가 모였을 때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교중 사람들입니다. 그때 믿지 않는 사람과 교중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온 교회 사람과 아닌 사람들이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쪽은 교중 사람이고 한 쪽은 외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을 보입니까? 바울은 교중 사람들에게는 형제 사랑으로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외인을 향해서도 단정히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골로새서에서는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외인들에게 행하는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어떤 증거에 충격을 줄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을 이용하려고 들면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서는 단정히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직하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12절에서 바울은 실제적인 삶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도덕적인 행위가 필요하며 음란으로부터 피해야 됩니다. 그리고 형제 사랑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외인에 대해서 정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이제 또 다른 주제 휴거에 대해서 말합니다. 13절에서 5장까지 예언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는 휴거를 말하고 5장 초반부터는 주의 날에 대해 말합니다. 첫 시간에 보았듯이 구원을 받고서 소망을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들 중 일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의아해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믿고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를 몰랐습니다. 5장에서는 앞으로 올 예언의 일부를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해지지 않았던 이야기입니다만 5장에 들어가기 전에 4장에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 6번이나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는데 여러분 스스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보통 말씀 전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조사해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토픽을 말하려고 그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찾아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어쨌던 사람들이 성경을 보도록 하는 차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6번 이상이나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는데 여기에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는 자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면서 하나의 예시입니다. 여기서는 몸에 대해서 잔다는 말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영과 혼에 관한 부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십자가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순교 전에 고린도후서 5장에서 "내가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따라서 잔다는 말은 우리의 영에 관한 부분이 아니고 몸에 관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몸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일어난다는 말에서 부활을 예기(豫期)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집회 때 종종 잡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집회가 끝날 즈음에 분명히 깨어납니다. 집회가 끝이 났는데 계속 자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잔다는 것은 늘 깬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비유 배경에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사로에게 주님은 "내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간다"고 말씀했습니다. 많은 우리의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어느 한 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자는 자들은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기서의 올바른 비유의 의미는 죽은 성도들을 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삶을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는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을지라도 주변 사람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소망 없는 사람같이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방교도들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부활을 모른다고 복음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보고 말쟁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말 속에는 모독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런 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슬픔에 슬픔을 면하게 했다"고도 말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서도 동정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실제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슬픔 위에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실제적인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슬픔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사람 같은 슬픔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의 소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놓여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결코 가벼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믿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죽으심과 부활 이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충분히 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어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보장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켰다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부활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다가오는 부활하는 사람들이 다음 열매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보증입니다.
다음에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잠 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잠재우듯이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죽은 성도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마치 아이를 잠재우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끔찍한 사고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예상치 못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모든 믿는 사람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품 안에서 잠을 재우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그 열쇠로 열지 않으면 그 죽음에서 아무도 끄집어낼 수가 없으며 또한 죽음과 음부의 세계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고 계십니다.
바울은 휴거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여기서 말하는 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직접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왜 이것을 강조하겠습니까? 구약에서는 이런 것들을 나타내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것들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직접 계시를 받았던 것처럼 휴거에 대해서도 직접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믿는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은 잃어버린 자일까요?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축복에서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떠난 먼저 믿은 성도들이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휴거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단계 한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오시는 것을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친히 오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기를 바랍니다. 이 휴거가 있고 몇 년 후에는 이스라엘을 다시 모을 것입니다. 그 때 택한 자들을 모으기 위해 그의 천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를 모으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보내지 않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대리할 대리천사를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께서 몸소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도 움직일 수 없으며 그분이 오시지 않으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1장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은 자들을 살리신 그 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렸습니다. 그 때 천사들 앞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의 권세들을 다 이기고 부활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부활시켜 올린 그 능력이 믿는 성도에게 임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오실 때 강력한 힘이 동일하게 작용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분이 직접 하늘에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호령"이라고 하는 소리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호령으로 오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소리도 있습니다. 천사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사장으로서 칭호가 주어진 미가엘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전쟁에서 미가엘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니엘서에, 유다서에,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싸움터에서는 항상 미가엘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주님께서 오실 때는 대적의 영역을 통과해서 오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중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이 휴거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2장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가려는 것을 마귀가 막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휴거 때는 더 이상 마귀가 막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로 오실 것입니다. 더 이상 악의 힘은 주님의 힘에 대항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부는 나팔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나팔은 이 땅에 사람들을 심판하는 나팔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23장에 있는 나팔도 아닙니다. 레위기 23장에 있는 나팔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필요할 때 모으기 위한 나팔입니다. 이 15절에 나와 있는 빛나는 나팔은 마지막 나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로마 군인들을 모으는 나팔과 유사합니다. 만일 로마 군인들에게 나팔을 울려 불면 그들이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나팔 소리는 모이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나팔소리는 진군하라는 나팔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나팔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진군을 위한 나팔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라고 했습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부활과 여기 믿는 자들의 부활은 다릅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들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올라가기 전에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순서는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오시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를 입고 그리스도를 만나러 올라갑니다. 분명히 구름을 타고 올라갈 것입니다. 저는 이 구름이 영적인 구름이 아니라 그냥 구름 즉 기상적인 구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히브리서 12장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도들의 무리를 구름으로 상징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나고야에서 구름처럼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영국 폴스에서도 구름같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말하는 대로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름이 영적인 구름이 아니라 그냥 구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지상으로 오실 것이지만 이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는 지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는 최초로 그 사랑의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24장이 예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리브가가 아람 지역에서 선택되어 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 긴 여행 동안에 신랑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긴 여행 다음에 이삭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리브가는 "우리를 맞으러 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 준비를 하고서 다가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공중에서 만난 다음에 아버지 하나님 앞에 바로 가서 결혼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와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는데 대해서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빛을 비추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 이것을 가지고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머지 않아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주님께 충성하고 주님을 만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2016. 05. 05(목) 강서 특별말씀집회4 잭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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