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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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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사도행전 20 28~31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어젯밤 말씀을 정리해 보면 장로에 관한 표현이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에베소에서 사역했는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8절에서 장로가 나오는데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먼저 자기를 위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없기에 먼저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커다란 원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조를 하였습니다. 너 자신을 삼가 계속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의 가르침은 다른 여러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삼가하며) 가르쳤던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위해서 삼가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한가지 교훈을 줍니다. 네 어린양을 먹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주위를 둘러보니 요한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 사람이 어떻게 되든지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주님과의 사실을 확립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 번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신경 쓰십니까? 각인이 주님 앞에서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자신을 삼가라고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든 양떼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주의할 점은 온 양떼를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모임 가운데 있는 분들은 다양한 표현 속에 있습니다. 모든 모임 가운데는 여러분들의 여러 다양한 필요들이 대두가 됩니다. 이것을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바울은 강조했습니다. 불의한 것들을 좇아 가는 것에 대해 말하고, 약한 자들과 어떤 연약한 자들을 도울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모든 양떼를 위해서 그와같이 도울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기 똑같은 것이 사도행전 20장에 있습니다. 감독들은 하나님의 모임에 모든 양떼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고립되기도 합니다. 어떤 아픈 사람들이 있을 경우에 장로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이 필요하던지 간에 장로들은 온 양떼를 위해서 필요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예를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양떼라고 불렀습니다. 모임에 관한 여러가지 일들이 신약성경 이곳저곳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하나님의 밭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장에서 하나님의 건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는데 많은 예가 여기에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떼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께 속한 교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임은 나 개개인의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모임도 아닌 것입니다. 장로들의 교회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떼인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양떼는 어느 조그만 양무리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말한 양떼와는 조금 다른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몸된교회의 다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양떼라고 불렀습니다. 유대로부터 나온 어떠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로부터 나온 무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인 하나의 몸을 조그만 양떼라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불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새로운 한 사람 즉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의하면 새롭게 지어진 한 새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의 양떼, 한 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대부분의 양떼에 관한 것이 지역교회에 관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조그만 양떼를 매우 귀한 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분에게는 매우 귀한 것입니다. 조그만 양떼를 먹이는 자로서 장로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성령이 조그만 양떼들을 위하여 너희로 감독자로 삼았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았다는 것에 주의하기 바랍니다. 어떤 모임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모임 가운데 어떤 계층구조가 없습니다. 그들은 양떼 가운데, 즉 너희들 가운데서 섬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른 성경에 보면 너희들 가운데 장로들이라고 한 표현이 있습니다. 모임 가운데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이 생길 때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이 때때로 제게 패스튼 모임의 장로님이십니까?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사실은 패스튼 모임의 장로가 아닙니다. 제가 많은 시간들을 밖에서 보내는데 그들 가운데서 돌아볼 수가 있겠습니까? 장로는 모임 가운데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한가지는 뭐냐 하면 성령께서 삼았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장로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투표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지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양들을 쳐라, 먹이라고 했습니다. 먹인다는 것을 목양, 즉 양들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치는 일 가운데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성도들이 건전한 영적인 양식들을 먹을 수 있도록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건전한 주님의 말씀들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양떼들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많은 양떼를 치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만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각각 한 분 한 분들이 탄생했고 주님의 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드려서 사신 귀중한 분들인 것입니다. 각 개개인을 주님의 죽음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여기 보면 주님의 죽음이 지역교회와 연관을 지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분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매우 귀중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헤치는 어떠한 것들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께서 직접 피를 흘려 사신 귀중한 무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를 헤치는 어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주님께 매우 큰 부끄러움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에 반하지 않는 즉 모임을 헤치지 않는 일들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삼위 모두가 지역교회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역교회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드려서 이 교회를 사셨습니다. 성령께서 감독자를 세우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모두가 지역교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 교회가 얼마나 귀중한지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제가 어제 질문 시간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항상 지역교회와 연관성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 14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라고 기록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교회는 복수였습니다. 하나의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는 몸된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한 몸된교회가 있는 반면에 실제적으로 지역교회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항상 지역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역교회가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434절에 보면 성도들의 교회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생각해보겠습니다. 그것은 지역교회의 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는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각각이 믿는 분들은 한 분 한 분이 성도들입니다. 저를, 성도인 잭 해이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양형제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주님 자신께 거룩하게 구별된 성도인 것입니다. 모든 구원 받은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교회라는 말을 통해서 볼 때 그 지역교회의 구성원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와는 다른 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정말 믿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도 그렇게 부르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을 하나의 교회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의 모본은 다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의 구성원들은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영접함에 있어 가장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은 참으로 거듭났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참으로 주님을 믿고 그 다음에 침례를 받고서 영접 절차를 거쳐서 모임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말하는 것이며, 성도들의 교회라고 했을 때는 그 교회의 구성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교회를 먹여라하고 이야기했습니다. 29절 이하를 보면 지역교회 가운데 두가지 이상의 위험한 것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부터의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밖으로부터의 위험에 대해서는 흉악한 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유대교적인 교사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중에는 많은 거짓교사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자신이 떠나자 마자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흉악한 이리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고를 우리들도 주의해야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거짓교사가 에베소교회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을 사도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했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밖으로부터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고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30절에는 또 다른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중에서 어떤 위험이 심각하겠습니까? 밖으로부터 오는 거짓 것에 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하지만,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내부에서 뭔가 불만족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로 끌어 당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은 어떤 모임 가운데서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만족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장로들에게 도전케 하고 많은 좋지 못한 영향들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분열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내부적인 그러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본을 보이기를 밤낮 3년을 일깨어서 권고했던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눈물로서 훈계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을 어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대응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서 각 사람을 훈계했습니다. 또한 이 눈물에 관한 것은 빌립보교회에 관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하고 사도바울은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 흘린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다루는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교제할 때 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을 볼 때 눈물로서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3년 밤낮 눈물로서 권고했습니다.

32절에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바울이 떠나면서 의탁한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는 곳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떠날 때에 떠난 만큼 또 다른 영향이 다른 데로부터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모임이나 가족이나 간에 어떤 곳을 떠났을 때 또 다른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모임을 떠날 때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께 부탁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은혜의 말씀께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가족의 놀라운 영역 가운데로 들어오게 됩니다. 동일한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감싸고 여러분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을 영적으로 보호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호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중요성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경우에 어딜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고, 읽고 또 읽도록 강조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서도록 그렇게 만들어 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 그렇게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세우는 것입니다. 오락 같은 것들은 지역교회 가운데서 절대로 사람들을 세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을 공급할 때 지역교회는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희들이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젖을 먹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그 순전한 말씀을 강하게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그러한 말씀이 여러분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다른 말씀이 있는데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성숙하지 못한 성도의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젖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늘의 기업이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에 썩지 않게 보존되었다고 베드로는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 땅에 있을 때 그것을 보전하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상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속에 그러한 것의 보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기업에 대한 보증으로서 성령님이 들어가셨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하늘에 있는 축복을 전혀 본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그 하늘의 기업을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을 통해서 하나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이삭의 신부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보석을 리브가에게 주었습니다. 이 보석은 이삭의 집에서의 모든 기업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보석과 같이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셔서 하늘에 있는 기업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업은 미래적인 사실입니다. 여기 32절에 보면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미래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현재적으로는 그 기업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게 될 때에 하늘의 그 기업에 대해서 즐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그 기업을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명기에 보면 하늘의 때가 열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하늘의 때가 우리들 앞에도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는 하늘의 놀라운 그 기업을 즐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했는데, 여러분은 거룩하게 되셨습니까? 물론 구원받게 되면 거룩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구원받은 후에 거룩함을 경험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받는 그 순간 이미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함이라는 뜻은 어떤 것에서 분리된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자마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분리되어서 영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을 구원해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속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그분의 말씀으로 구별되었다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믿는 순간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인 거룩의 측면입니다. 우리는 또한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으로써 우리의 생애가 특징지어지는 것입니다.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약한 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약하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의 약하다는 말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모든 말씀은 문맥적으로 보아야 됩니다. 로마서 14장에는 약한 자들이 나오는데 유대인의 배경이 있는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구약 율법에 의해서 음식에 대해 뭔가 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적인 절기에 의해서 약함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믿음에 약한 자들이라고 바울은 말했는데, 그러한 약함이 로마서 14장의 약함이라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약한 자들을 도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의 약함은 영적인 약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맥이 그것을 직시해줍니다. 그래서 규모없는 자들을 권위하고 약한 자들을 도울 것을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약함은 영적인 것으로 규모없는 것이나 이러한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여기의 약함은 육체적으로 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뭔가 가난한 그러한 상황이었고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약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약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약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말했습니다. 때때로 모임들 가운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한 자들을 도와야 할지를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먼저 자신의 모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손으로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텐트를 깁는 것으로 업을 삼았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손인 것입니다. 그래서 손으로 일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머리로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혀 손으로 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라 하더라도 손으로 일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적으로 대학과정을 마쳤다 할지라도 실제로 손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을 배워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배운 지식들이 영적인 사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손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지적으로 뭔가를 탐구하기를 원하지만 모임에 가기를 꺼려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실제로 손으로 움직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428절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더 이상 도적질하지 않게 하라 손으로 뭔가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손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적으로 손으로 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매우 권면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33절에서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보게 되면 아간의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아간은 금이나 은이나 시날의 외투를 탐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탐욕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아간은 시날의 외투를 감추고는 슬쩍 입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옛날을 추억해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와같이 약한 자들을 도우셔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한 것처럼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여러분들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에는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마지막을 보면 사도요한이 말할 것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기록을 했습니다. 복음도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진리를 따르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받는 것이 주는 것 보다 더 복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장로 형제님들은 이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필요를 바라보고 있는 경제적으로 약한 자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더 복되다고 했습니다. 각자의 사람들이 그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이기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20장을 마감하면서 사도바울은 약한 자들을 도울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약한 자들을 여러분들이 도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들의 필요를 간구했습니다. 둘러 있던 장로들이 바울의 목을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치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안고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탕자를 환영하면서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떠나 보낼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무릎을 꿇고 같이 울었습니다. 제일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문제들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뭔가 동정하는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서 장로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동정심에 대해서 이해를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사람들을 복음을 듣도록 데리고 오는데 있어서, 그리고 영적인 교훈을 주는데 있어서, 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그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표를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바울은 그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아마 눈물이 흘러 내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그 이후로 다시 에베소로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다시는 못 볼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은 특별히 장로형제들에게 주는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말씀을 따라 행하여야 될 것인가를 잘 배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에 대해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2004 2월 1 강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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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