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찬송가에서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습니다. 모든 언어 중에 우선 세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코카콜라 공통으로 통하는 세 가지 언어였습니다. 데살로니가 2장으로 오늘 오후에 말씀을 이도 받겠습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16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어제 말씀드린대로 데살로니가전서 3개의 장은 역사적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역사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들었는지를 말했습니다. 이제 2:12절까지는 그가 어떻게 행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12절까지는 1장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바울이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품위 있는지를 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믿는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금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삶이 분명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12절까지의 말씀에서 후반에 나오는 말씀들은 어떻게 핍박을 받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장1절에서 "너희 가운데 들어간 복음이 헛되지 않은 줄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1장 마지막에서 복음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고 이 변화된 것이 헛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서에서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서 일한 것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에서 견고하게 서고 늘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안에서 너희를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을 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주의할 것은 주 안에서 한 일이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쓸 수도 있고 노력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 이것이 헛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주님 안에서 한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생애에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힘을 의지해서 주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어떻게 취급을 당했는지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과 능욕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이 말은 심리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보았던 것처럼 사도행전 16장에 나와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안디옥으로 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던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바울은 가기를 원했습니다. 너희들에게 담대함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담대함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대적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을 환영하는 태도로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디모데는 어느 면에서 조금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담대하라고 권했습니다. 담대함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담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담대함은 유익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힘을 가지고 담대하기를 바랍니다.
안드레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한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또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도 안드레였습니다. 빌립과 함께 그리스 사람을 인도했습니다. 자기 형인 베드로는 공적인 일을 하는데 비해서 안드레는 개별적인 주님의 일을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으며 개인적인 증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안드레라는 말의 의미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안드레처럼 됩시다.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말하기 위해서 담대합시다.
바울은 여기서 담대함으로 너희에게 복음을 말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이와 같이 공적으로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말로 전했습니다. 때때로 자매들은 공적으로 복음 전하지는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매들도 용기를 가지기 바랍니다. 구약에서도 증거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마 어느 정도의 나이인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가 한국어 성경에 중년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여러분이 저에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제가 중년으로 말한 이유는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가졌기 때문에 중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말하기를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고 전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젊은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중년 여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나이가 든 안나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안나는 성경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매들이 개인적인 전도를 하는데 책임감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말한 것처럼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는 또한 "많은 싸움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핍박이 있었지만 그 싸움 중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말했습니다. 아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반대가 있어도 하나님이 문을 열면 문은 열릴 것입니다. 여기서 에베소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공효의 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바로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음의 문을 열 때 또 하나 기대해야 할 것은 거기는 대적자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데 주님은 이것을 해석하며 악한 자가 와서 덧뿌렸다고 악한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씨를 뿌릴 때 거기에 또한 악한 자가 온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많은 싸움 중에 복음을 너희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복음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르치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르침이 아니지만 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오도록 권면을 하고 권합니다만 손을 들고 바깥에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말을 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러분 동료 전도자들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할 때 기계적인 강의를 하지 마십시오. 주고 받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구원받도록 이와 같이 사람들을 권면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한 것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베드로는 권면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말을 가지고 논리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지고 구원받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하는 복음은 가르침적으로 건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중요한 요소는 복음을 전할 때 가르침적으로 건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일부분을 빼고 전한 것이 아니라 전체 말씀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건전한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한 것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바울의 동기는 전적으로 깨끗했습니다. 그리고 3절 마지막에는 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덫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나 동물을 잡을 때 미끼를 거는 것을 말하며 잡고자 하는 물고기나 짐승이 모여들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절대로 미끼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조금 전에 복음을 호소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성경적인 방법이 아닌 것을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로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서 많은 경우에 연예인 같은 연예방법을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시대에는 절대로 그런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권면할 때 간사에서도 아니고 부정에서도 아니며 궤계인 미끼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에게 이 증거의 일을 맡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바울은 증명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바울의 일을 정해주셨습니다. 자신의 하는 것들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바울은 말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종들을 시험해서 그들이 어떠한지를 감찰하시고 증거하시며 그 마음을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지 어떤지를 우리의 겉면만 봅니다. 우리는 합당한 모습들을 하고 나갑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판단 가운데 보통 외형을 통해서 판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구조를 하나님은 아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여러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위선적인 바리새인에게 "너희는 사람에게 보기에는 좋게 보이려고 행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더 묻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망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민감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결국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서 전부 심판 받았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았던 삶에 대한 평가를 주님께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 일에 대한 평가를 받으며 합당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구원받지 않으신 여러분일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결코 바울은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의 귀를 기쁘게 하려고 아첨하는 말을 복음시간에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그 말씀은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아첨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사람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으면 소망이 없다고 십자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로 아첨이 아닙니다. 그리고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전하면서 절대로 돈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종교계에서는 복음을 말하면서도 돈을 염두에 둔 사람들이 있음은 슬픈 일입니다. 이방세계의 종교에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은감실을 만드는 장인들이 돈을 목적으로 복음을 반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돈을 모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유대인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양과 염소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계에는 돈을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가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세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복음을 전한 다음에 계좌번호를 알려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돈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돈을 탐하는 사람과 같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돈을 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금과 은을 탐하지 않았다고 사도행전 20장에서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습니다. 탐심을 갖는다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성경은 탐심을 갖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모임 내에서 탐심을 갖게 되면 너무 죄가 심각해서 출교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죄들은 심각한 죄들이었기 때문에 지역모임에서 출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탐심의 탈을 쓰지 않은 것은 이런 빈궁에 처할 줄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도 탐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고 권면했습니다. 왜 우리가 있는 바를 족한 줄 알아야 되는가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왜 우리만 있는 바를 족한 줄 알아야 되는가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올바른 대답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아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되는 주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구하는 것 이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탐심은 마음의 죄입니다.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탐심을 가진 것이 분명해집니다. 어떤 경우는 늘 그렇게 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언제나 그의 증거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사도로서 존중을 받아야 할 터이나"라고 6절에서 말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높일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일단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탐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요한삼서에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또 자기가 나서는 입장에 있으면서 협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짐이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이 지우신 짐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한이 있었지만 그것을 복음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을 주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짐을 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아주 점잖았습니다.
성경에 구절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만 여기서 바울이 하는 말을 생각하며 스데반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한 시기에 바로 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성경은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고 했습니다. 다소 출신 사울에게 물어뜯는 이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유순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사람을 다르게 바꾸었습니까! 야고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날 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멸할까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삭개오는 탐욕스런 세리였습니다. 그 기록 마지막에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의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나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물어뜯는 이리 같은 사람이 유순한 양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보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의 유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행위를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유모로서 어머니를 가지고 설명을 하며, 11절에서는 아비라고 예를 들어 말하는 것을 봅니다. 유모로서는 돌보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도 이와같은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돌보는데 이런 태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는 그가 모든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동료 믿는 자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동료들의 영적인 복지를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최초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에 있는 모임에 더해져서 그 사람들의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여야 되는 것이 바로 이 면입니다.
또한 벧엘에서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그는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의 근접을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홀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모임에서 실제적으로 거기에 동참하는 삶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8절에서 사모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임에서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습니다. 5장에서 동일하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수고하는 자를 알고" 이 수고는 사랑의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바울이 와서 수고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인도자는 이와 같이 사랑의 수고를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모임 전체가 사랑의 수고를 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특히 모임에서 인도자들은 이와 같은 특징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인도자가 무관심하면 모임 전체가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인도자가 수고하는 모임이라면 모임 전체가 수고하는 모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3장에서 다시 사용합니다. 또한 바울은 밤낮으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는 밤낮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사람들은 전심으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파트타임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은 100% 참여하는 것이지 남는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밤낮으로 일을 했던 것은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들로부터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10절에는 "너희가 나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바울의 삶 전체를 꼼꼼하게 살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받은 그러한 조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 대해 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 관심을 갖도록 이야기하는 그러한 관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거룩하게 빠트림 없이 관찰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만약 이러한 가운데 칭찬을 받는다면 놀라울 것입니다. 거룩하고, 여러분의 도덕적인 품성에 조금도 결함이 없고, 올바르고, 돈에 관해서 전적으로 정직하고, 어떤 비난도 받지 않고, 누군가 살펴봐도 조금도 결함이 없도록 말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믿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아비에 관한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아비는 자기 자녀를 권면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본을 보일 책임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이 아닌 권면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합당이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모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 들어갈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다스릴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믿게 되면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이 땅에 천년왕국이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 신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으로 초청을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체제가 아닌 하나님이 운영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여기는 분명히 법률이 있고 정부가 있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그 나라에 합당하게 행하게"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영광에 이르도록 권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핍박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이 이렇게 권면한다는 것을 생각하라며 그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핍박 받는 시대는 끝나고 영광의 나라가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집에 있을 어느 한 때에 책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바로 꽂아 놓았고 두 번째 책은 "앞으로 가장 좋게 될 것이다"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가장 최고의 것이 온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거기를 보면 지금 현재는 싸움이 있고 고난이 있지만 앞으로 장래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섯 번이나 성도들의 부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 마지막에 다섯 번째 영광에 대해서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현재는 고난을 받고 있지만 머지 않아 영원한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자기의 영광의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합당이 행할 것을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13절 마지막에서 핍박에 대한 경험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본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신자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에 있는 믿는 자들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처럼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올 위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기를 원했지만 사단이 길을 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2016. 05. 01(일) 강서 특별말씀집회2 잭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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