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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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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습니다. 여러분이 그곳을 읽어보면 유대인들만이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했을 때 장래에 대한 것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5장에서는 때와 기한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은 그들의 마음 속에 열심을 지폈습니다. 또한 여기는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여기서 순교자가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죽은 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말했으며 오실 때 우리가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죽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여기는 휴거에 관한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주님의 공중재림에 관한 말씀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주제는 4장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실 때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의 주제가 4장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디모데가 돌아온 보고를 듣고서 썼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이 일어났을 때 바울이 거기서 도망을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7장에서 바울이 아덴으로 피신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3장을 보게 되면 디모데가 돌아와서 바울에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을 디모데는 바울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초기의 믿음을 보면 그들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성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고 그들을 힘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분석하면서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장은 이야기 하는 투로 적혀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고 여러분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1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12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의 핍박에 관한 경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에는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다시 돌아와서 바울에게 보고하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따라서 1, 2, 3장은 역사적인 장이라고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4 12절까지는 실제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도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음란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실제적인 행위는 형제사랑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의 삶을 위해서 직장에서 조용히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실제적인 영역이라고 제가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4:13-5:11절까지는 장래에 관한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물론 4장 끝에는 휴거를 다루고 있습니다. 5:11절에서는 때와 기한에 대한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5:12절부터 마지막까지는 교회적인 말씀에 관한 결론입니다. 첫 번째는 장로들에 관한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들의 양들에 관한 책임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 사랑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마칩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구분해서 알게 되면 좋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냥 그대로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약간 소개를 했습니다.

 

처음에 보면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서신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이 세 사람이 함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모임을 보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언급을 하는데 물론 이것은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신약에서 교회는 믿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성도들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교파들에는 그 멤버들이 섞여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가운데 포함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교회는 100% 믿는 사람들을 포함하며 말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지역교회는 데살로니가에 모인 성도들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는 것을 말합니다.

2장에서 말하는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지역모임의 소유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께 속했음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제하시고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십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모임을 우리 모임, 내 모임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절에서는 이 편지를 쓰는 사람과 수신자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인사를 보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은혜를, 유대인들에게는 평강을 말했습니다. 여기는 구원받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모임 안에 있는 두 영역에서 나온 무리들에게 하나는 평강을 하나는 은혜를 말했습니다.

2절에 가면 그의 감사를 볼 수 있으며 아주 간단한 말씀으로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연합된 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노니" 개인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는 집단적인 기도도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임의 기도집회는 대단히 중요한 집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디모데전서 2장에서 그것을 다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중요한 주제로서 하나님의 집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하고 주제를 말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집회에서 적은 수가 모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집회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러한 인상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찬을 절대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종 기도집회를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합된 기도집회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12장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다음 날 사형 당하게 되어 있었으며 "교회는 그를 위하여 빌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모임이 하나가 되어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연합된 기도집회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또 하나의 기도에 관한 것 중에 하나는 기도는 늘 감사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5장에서 "모든 것을 감사하라"고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예를 1장에서 보였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노니'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가 바라기를 여러분이 기도를 할 때 이 감사를 반드시 섞어서 하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바울은 '감사와 기도와 도고를 하되'라고 말하면서 감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나가 기도할 때 감사를 했다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그러한 감사를 하십니까? 우리가 비록 어떤 때에 걱정스런 기도를 하더라도 그 기도에 감사를 포함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기도에 감사를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감사와 함께 간구하라고 권했습니다. 비록 걱정스런 내용의 기도를 할 때라도 반드시 감사를 함께 섞어서 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연합된 기도를 배우게 되고 기도할 때 감사를 함께 하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 간단한 기도의 교훈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기도할 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우리가 직접 아버지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생활 가운데는 아버지와 그 아들과 성령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또한 하나는 언제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즉 언제든지 라고 말했습니다. 언제든지 늘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계속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쉽게 포기합니다. 주님께서는 실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할 것을 말씀에서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과부의 기도에 관한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속 요청했습니다. 그 집 앞에 문을 두드리며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를 위해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핵심적인 요소는 그 과부처럼 쉬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항상)라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 또 하나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기도생활에 한해서는 어떤 편견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기도하되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에 나오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에는 두 자매가 약간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자매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거기서 어떤 신호를 보내지 않았으며 어떤 편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오디아와 순두게 자매의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양쪽을 다 말하면서 여러분 모두에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임의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택해서 기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기도를 할 때에 이 전체를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매일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며 이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유하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는 세 가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역사이며, 하나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또 하나는 인내에 관한 소망입니다. 이 세 가지를 조금씩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는 믿음의 역사로 이것이 구원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도 직접 구원에 관한 믿음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믿음의 역사는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섬길 때에는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인간적인 ㅇㅇㅇ이 없음을 알았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익되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떤 가운데는 에스라서를 통해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 패배주의 같은 생각이 듭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성전의 터를 놓아야 되는 그 시기였습니다. 거기는 많은 기쁨이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성전 터를 놓을 때 울었습니다.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사람들은 주로 나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학개는 어떻게 울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성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생각하고 성전 터를 놓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전 짓기를 격려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멈추게 할지도 모른다고이것은 패배주의이고 열등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데살로니가사람들처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2016년도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여러분을 이야기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의 역사를 가진 특성을 가졌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사랑의 수고를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사랑의 수고라는 것은 애를 써서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고 어떤 사람들은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침대 안에는 편안하고 게으르기 좋은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바산 왕 옥을 알 것입니다. 그에 관해 기록된 한가지는 그의 침상의 크기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대해 침대만 기록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침대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에너지를 쓰고 땀을 흘렸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사랑의 수고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 수고는 그 동기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에베소에는 너희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사랑의 동기가 없었습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계속 나아갔지만 그것은 하나의 기계적인 조직이었지 사랑의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결핍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베드로의 말을 가지고 도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바탕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인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인내를 했습니다. 이것을 알면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주님의 오심에 관한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해도 계속 그 일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오심에 관해 인식하지 못하면 달리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핍박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말했습니다.

 

4절에서 믿는 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때 그 일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이 복음을 언급하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그 중심에 하나님이 그것을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는 복음의 주제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시고 그리고 승리하신 주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장에서는 우리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다름 말로 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또한 말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복음의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특별한 의미로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이 복음을 전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은사를 가진 분이 있습니다. 또한 형제자매 모두는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책임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여러 측면에서 복음을 전해서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졌는가를 여러 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말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듣고 인식하는가를 말했습니다.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능력을 먼저 말하고 성령이 나오는데 따라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들은 복음증거를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말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논리적인 설파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적인 사실은 전파될지 몰라도 거기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전 2장에서는 우리가 약함으로 너희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과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하려고 하면 성령이 우리의 삶을 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내주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성령을 근심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성령을 근심케 하면 성령이 우리들 속에서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전파된 것은 능력과 성령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 그대로 큰 확신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충만을 말할 것입니다. 이것을 함께 조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그는 전적인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의 삶은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다른 사람들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큰 확신으로 전했습니다. 따라서 그 복음에는 큰 충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것들을 남겨두지 않고 다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죄에 대해서 말할 때 또한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 경고를 할 때 십자가의 가치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께 올 것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복음에 관한 요소들을 남겨두고 전해서는 안되며 복음을 충분하게 다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말씀에 대한 수고에 관한 부분을 보게 되면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된 것을 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람은 고결해야 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성격의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 속에 부정한 동기가 있어서는 안되며 주님이 인도하시면 내일 그 점을 보겠습니다.

2:12절에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바울은 설명합니다. 2장에서 설명하지만 1:5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데살로니가에 복음 전도에 성공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말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입니다. 큰 확신으로 바울이 전했고 큰 확신으로 그 사람들이 믿은 것입니다. 주님의 종의 행위로 어떤 사람이 된 것인가 하는 것도 하나의 요소였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우리 모두는 바랍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까?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사복음서를 읽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 성립되는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주님을 전하는 우리라는 자 속에 그리스도가 보였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렇게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기드온처럼 내가 하는 대로 여러분이 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 가운데 아무도 나와 같이 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의 교만을 전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주님을 정말로 따르게 되면 우리를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에베소 장로들에게 "양무리에게 본이 되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본이 되고 있습니까? 따라서 이 사람들은 바울과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은 직후에 말씀을 환영했습니다. 말씀과 함께 그 다음에 성령과 기쁨이 왔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환난과 어려움이 있고 동시에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동시에 왔습니다. 이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동시에 성령의 기쁨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의존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기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측면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쁨입니다. 사랑과 희락(기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이 교제는 기쁨을 생산시켰습니다. 바울과 요한은 고난을 당했지만 기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매를 맞고 나왔지만 그들이 기쁨으로 나왔습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 고난 받는 자가 된 것을 당연히 기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믿는 사람들은 말씀을 받고 성령의 확신을 가지고 동시에 고난을 당했지만 그 안에 기쁨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을 본 받았습니다. 7절에 보면 이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본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모든 믿는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보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본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복음에 관해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본이 되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장 마지막까지 바울은 이 일에 관해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로부터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소문이 들린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본이 되었습니다.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라고 해서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파되어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격려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 점화하듯이 그들을 격려하고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나팔 소리처럼 분명한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을 격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는 명확해야 되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단순하게 말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코틀랜드에는 아직도 복음에 대한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으며 그들은 성경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다른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복음을 제시해야 될 것입니다. 복음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여러분이 찾는다면 많은 부분을 가지고 단순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서 많은 것들을 가지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취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권유하는 것은 복음을 단순하게 전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전하는가를 보면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했는데 이것은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무엇을 전하는가 입니다. "주의 말씀이"라고 했으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전하되 성경에서 인용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또한 설명을 해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어디서 전했는가 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이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는 바울이 출발한 곳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며 출발한 지역에서부터 다른 지역에까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사는 동네에 전도지를 뿌리지 않고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다면 저는 부끄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네 집에 가서 하나님의 하신 일을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관한 말씀을 드리자면 그것이 정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집에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동네로 전파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도시까지 전파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장에는 온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출발은 집입니다.

여러분은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관한 일을 아실 것입니다. 거기는 건물을 짓는데 성벽을 지을 때 자기 집 가까운 데를 먼저 지었습니다. 그들이 거하는 그곳에서 일을 했고 성을 쌓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이웃에 여러분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일하는 직장에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출발은 마게도냐에서 아가야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마게도냐는 데살로니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아가야 이웃도시로 전파되어 나갔으며 더 넓은 도시로 전파되어 모든 이라는 지역으로 퍼져 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그들이 말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좋게 말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비난하는 뒷소리는 좋지 않습니다.

최근에 발달된 통신기술은 남을 악담하는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전화, 휴대폰, SNS 그리고 페이스북 같은 도구들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금상첨화의 환경을 만들어주는 조건들입니다. 여러분들을 나쁘게 말하는 환경을 아무한테도 만들어주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만약에 어떤 악담을 걸어오면 좋다고 하며 그것을 거절하십시오. 누구든지 나쁘게 말하면 그것을 늘 좋게 말해버리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대해서 좋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아무 말 할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모든 주변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좋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이 순서는 중요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나머지의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는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놀라움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우상의 도시로부터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치를 올바르게 알 때에 우리 주변에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우상을 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먼저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어떤 종류의 우상들이 믿는 자들의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를 마감하면서 "자녀들아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우상에게서 자신을 지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합당한 평가가 우리를 우상에게서 멀리하게 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져간 사실을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곤 신당에 언약궤를 두었는데 아침에 가보니 다곤 우상이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그 언약궤가 있는 그곳에는 다곤 상이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있다면 여러분 속에 있는 우상을 꼬꾸라질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로 거룩입니다.

또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첫 번째 문제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되었지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은 오신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 오실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그 아드님이 오신다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때라고 그 증거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문이나 기사에서 이것이 주님의 오시는 증거라고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징조로 인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독생자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요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아드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곧 오신다고 전했습니다. 바울은 누가 온다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이름의 배경에는 구주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그 힘의 능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라"고 구원을 다시 말했습니다. 이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장래 노하심에서 구원입니다. 이 장래 노하심은 지옥 즉 불 붙는 불못이 아닙니다. 이 장래 노하심은 7년 대환난에 주님의 노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이 아주 무시무시한 시대일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맞이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건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공중으로 오셔서 우리는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기서 말하는 장래 노하심인 환난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5장에는 우리들에게 다시 오심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1장은 서두에서 말씀드린대로 역사입니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방문의 역사이며 어떻게 그들이 반응했는가의 역사입니다. 이들이 구원받은 결과로 하나님께 거룩하게 준비되었는가 하는 역사입니다. 이것을 저의 삶 속에 먼저 적용하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본을 보았고 바울을 따라갑니다. 또한 우리가 따를 모본이 이 새로 믿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인 것을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04. 30()강서 특별말씀집회 - 잭 해이)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