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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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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

요한복음 17장은 많은 형제님들이 교제하는 장입니다. 따라서 이미 교제를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입니다. 지난 토요일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신 기도입니다. 1절부터 5절까지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6절부터 19절까지는 예수님 눈 앞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20절부터 마지막까지는 이 제자들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셋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게 되겠습니다.

 

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며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서도 "아버지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용어를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친근한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도 나옵니다. 26개 절 가운데서 40번이나 일본어로는 당신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개 절 안에서는 ""라는 말도 45번 나옵니다. 숫자를 좋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기억을 못하더라도 '많구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일본어로 말하면 당신과 나라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친근한 교제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요한복음 안에서만 100번 이상 나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다시 복습하면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래는 하나님은 도저히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본래는 볼 수도 없고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종종 비유로 말합니다만 우리는 때때로 태양을 보려고 합니다. 직시하게 되면 사실 큰일납니다. 또한 태양으로 다가가면 타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으며 '아바 아버지여'하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일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13:16-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자 해도 듣고자 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에게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듣고 보지 못했던 것을 보거나 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구약 선지자와 의인들에 비하면 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벧전 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을 너희들이 알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연구하고 살폈지만 몰랐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었던 것은 새 시대의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어제도 모임 장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완성된 실제 모임 장소를 손대면서 쾌적하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집회장소의 실물이 생기기 전까지는 실제 모형의 설계도밖에 여러분은 몰랐을 것입니다. 건물이 완성된 후에 계단을 걸으면서 '설계도는 이렇게 되었는데 이게 실제 계단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설계도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홍형제를 통해서 물이 센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신 장소에서 주님을 섬기는 특권을 여러분은 갖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으로 우리가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자신을 위해서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읽어보면 예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 나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 과거의 영광, 현재의 영광, 미래의 영광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몸을 가지시기 이전의 영광이 있고, 이 지상에서 나타난 영광이 있고, 하늘로 돌아가서 가질 영광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 사이에 영화 즉 영광이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4절을 보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 시점에서는 십자가가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영화롭게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시간적인 흐름으로 말씀드린다면 이 말씀 이후에 십자가에 못박혀 고난을 당하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삼 일만에 부활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도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부활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 자신의 영광과 그것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앞에는 아들의 영광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의 영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볼 때 예수님이 못박히시지만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겸손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비어 사람의 형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참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아주셨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고난을 받으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와 가장 관계가 없는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순종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절에 나오는 아들의 영광은 겸손, 순종, 인내, 사랑이라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영광을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죄인의 구속을 계획한 다음에 그것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우신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거룩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 독생자라도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독생자일지라도 죄인의 죄를 대신할 때는 벌하시면서 하나님은 거룩을 나타내셨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그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능력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네 가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 거룩, 사랑, 지혜 네 가지입니다.

 

네 개씩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여러분은 '이러한 것도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에 다른 것이 있다면 저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마태 6장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말하자면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영광이 나타나고 그것을 주님이 기도하셨습니다.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번째 가르치신 기도에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이미 이 땅에 하늘나라가 시작되었지만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나라가 더 구체화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그 뜻을 십자가를 통해서 전부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목적에 대해서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는 3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영생 이라고 하면 오래 사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만 여기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없으면 참된 영생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1:3절에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교제가 있습니다. 죽은 자들과는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와 부모 사이에 사귐이 시작됩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새 교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그런 교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제가 되도록 영생을 주셨습니다. 원래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는 베드로의 전도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린 말이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죄를 지적 받았기 때문에 마음에 찔렸습니다. 성령이 역사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죄 의식이 생기고 죄인이 내뱉는 최초의 한 숨은 이것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교제의 출발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식을 밭고 맨 먼저 내 뱉는 말은 한숨입니다. '얼마나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인가?'라고 하며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꼬'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위한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사람들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어찌할꼬"라며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죄를 용서해주는 구원을 준다고 복음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형제자매들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따르면 우리가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생명을 가까스레 유지하는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살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주어진 생명을 여러분들은 풍성하게 누리고 계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풍성하게 누린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들에게 주신"(당신에게서 받은-일본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이신 아들에게 주신 것이 세 개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선물을 줄 때 선물을 주는 사람을 보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남녀가 있다고 한다면 남성이 여성에게 결혼을 신청할 때 가락지를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남성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받은 물건을 보면 준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요셉을 보면 애굽의 왕은 요셉에게 제2의 자리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왕은 요셉을 매우 신뢰한다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주었는가에 의해서 준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자는 믿는 자들을 말합니다.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여기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에도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라고 해서 믿는 사람들을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을 예수님에게 아버지 하나님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죄인이고 더러운 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이 더럽고 볼품없는 자들을 예수님에게 떠 안겼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는 구원받는 자들이 귀하고 존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존귀한 자들을 그 독생자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6절에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중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육에 속한 영역입니다. 말하자면 쓰레기장에 끄집어내어 한 번 행군 다음에 건져낸 것과 같습니다. 죄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씻은 다음에 예수님에게 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루십니다.

6:37-3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여기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결코 내어쫓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9절에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존재이며 영원한 영생을 가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결코 내어 쫓김을 당하지 않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 자들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두 번째로 주신 것은 17:2절에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 즉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우리들에게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세 번째는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십자가의 일로서 아버지께서 주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일을 예수님에게 맡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맡기신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은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는 그 힘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기도로 옮겨가겠습니다.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는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라고 말씀했습니다.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창세 전에 이미 존재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과거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일본어에서는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써"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선하게 떠오르는 그 영광이었습니다. 옛날에 갖고 있던 그 영광을 눈 앞에 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창세전에 갖고 계셨던 그 영광을 조금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12:39-41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여기서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만 41절을 보면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보게 되면

이사야 6:1-3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영광을 본 이사야는 스스로 망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입술이 부정한 죄인인 주제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8:30-31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여기는 하나님 아버지 곁에서 창조하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곁에서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천지만물에 창조자로서의 영광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 분을 통하지 않고 존재하는 존재가 아무 것도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여기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창조자로서의 영광입니다.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여기는 이 현장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이 제자들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예수님이 가진 영광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머지 않아 하늘에서 예수님의 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그 광경이 많이 나옵니다. 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장에서는 어린양으로서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는 어린양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한 것 같기에 상처를 가진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그 상처를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어린양의 모습은 신부의 신랑으로서의 어린양이 나옵니다. 신부는 몸된교회를 가리킵니다. 모든 신약시대의 믿는 성도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어린양이 왕으로서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은 싸우는 왕이며 백마를 타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크고 흰 보좌에 앉는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 끝에 심판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크고 흰 보좌의 심판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사람을 심판하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다섯 번째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빛으로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서의 영광은 우리들이 상상하기 힘든 영광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우리가 이 영광을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이 땅에 있을 것입니다. 이 지상 행보에서 예수님의 그 영광을 안다면 복될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유익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10.3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