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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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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무라 타다시

그러면 룻기 2장을 이어서 인도를 받겠습니다.

~~ 앞 시간 교제의 말씀을 잠시 복습을 하겠습니다.

우선 보아스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만큼 유력한 자인지를 앞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아스의 할아버지 나손은 유다 지파의 족장이었습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할 때는 유다 지파를 이끄는 인도자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족장 또는 두령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할 때 일본어 성경은 군단장이라고 표현이 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행진을 할 때는 행진을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 행진에 가장 선두에 선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따라서 유다 지파가 맨 앞장에 서고 나머지 열 한 지파가 뒤따라서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진할 때는 성막을 거두어서 순서대로 진행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전 지파가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맨 선두에 서서 이끈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따라서 전 이스라엘의 진의 맨 선두에 선 사람이 보아스의 할아버지인 나손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누이가 아론의 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론하고 선한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론의 처가에 처남 되는 나손이, 보아스에 이릅니다. 이 관계에 의해서 모세와의 관계도 보아스는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 아론과도 인척관계입니다. 또한 머지않아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모세와도 관계됩니다.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유력자가 바로 보아스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에 이어서 유대 지파를 이끈 사람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의 할아버지 나손은 모세가 행한 기적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여호수아가 행한 기적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할아버지도 하나님이 행한 기적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고, 아버지도 하나님이 행한 기적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여리고의 유력자였습니다. 그 유력이라는 것이 좋은 의미가 아니고 희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그 지위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본다면 어머니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버지인 살몬은 이방인 여인인 라합을 결혼 대상자로 선택을 했습니다. 어떤 연유로 결혼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리고에 정탐 갔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살몬이 아닌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사실이라면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 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전에 말씀드린 바대로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유다의 유력자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유력자가 됐습니다. 유력자의 가정을 책임지는 부인이 됐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여서 살았습니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지만 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여인이었습니다.

 신명기 24장에서 본 바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방인이나 과부나 고아들을 위해서 곡식이나 포도나 감람열매를 완전히 다 수확하지 말고 남겨두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라합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라합에 대한 기록이 믿음과 관련해서 두 군데 나옵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양친 사이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2:1절에서 유력자라는 말로 불렸습니다.

그 신분은 유력자였습니다. 또한 재력도 있고 부호였습니다. 방금 보았던 대로 인품적으로도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추수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이삭을 줍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부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장 초반에서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하시는 일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룻과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왔을 때는 보리 추수를 하던 때였습니다. 3월과 4월 사이에 있는 시기였습니다. 만약 가을에 돌아왔다면 이삭이 없는 때입니다. 아주 적절한 때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삭을 주우려고 나갔던 룻 만난 사람들은 보아스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일본에서는 계획하지 않고 나갔는데라고 되어 있으며 우리 성경은 “우연히”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밭에는 소유자가 있습니다. 많은 밭의 주인이 있는 중에 하필이면 보아스가 경작하는 밭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에 적용시켜보면

여러분이 믿음을 위해서 기도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한국에 있는데 소위 교회라 불리는 곳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밤에 십자가가 너무 많이 보여서 제가 놀랐습니다. 일본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습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해도 택할 곳이 많지가 않습니다. 한국에는 교회가 이렇게 많기 때문에 어디를 택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이 모임에 지금 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지로 왔다기보다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기 오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꾼들도 일할 여러 밭이 있었지만 보아스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일꾼들이었습니다.

4절에 따르면 “마침 보아스가 베델레헴에서부터 와서”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룻이 이삭을 줍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오전 중에 말씀이 교제가 됐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매우 은혜스럽게 대해주었습니다. 룻은 보아스를 처음 봤습니다마는 보아스가 매우 은혜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0절을 보면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아마 룻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는 이스라엘 사회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남성들이 여성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편이 거리에서 자기 부인을 만나도 모른 척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제가 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여인이 놀랐던 것 같습니다.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말을 합니까?”라고 그 여인이 말할 정도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여성이었기에 여성이 남성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인을 경멸했기 때문에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것에 대해서 그 여인이 놀랐던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랍비 내지는 선생이라 불리우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에 대해서 그 여인이 대단히 놀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룻은 사마리아 여인의 시대보다 훨씬 전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 같은 그런 차별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보아스가 베푸는 은혜와 돌봄에 대해서 매우 놀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라고 말하며 모압 여인인 나에게 어찌해서 말을 거십니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룻에게는 이전에 일찍이 없었던 경험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4절로 돌아가 보면 베는 일꾼들과 그리고 보아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보아스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일꾼들의 대답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아마 옆에서 룻이 듣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교제를 하고 있구나’라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1-12절에서 룻의 믿음과 룻이 겪었던 삶의 궤적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룻이 들었습니다. 룻은 그 말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대답하기를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라고 자기의 신분을 표현했습니다. 그 마음속에서는 정말로 자기가 비천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기에게 유력한 보아스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죄인으로 마땅히 멸망당할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 주셨다고 하는 은혜를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또 룻의 마음속에는 이방인이고 그리고 과부이고, 시녀의 하나만도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기에게 말을 건 보아스의 은혜가 크다고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오전 중에 교제했던 내용의 일부입니다.

 14-16절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여기서는 보아스의 은혜로 앞부분은 오전 버전이었지만 여기서부터 보아스의 은혜 오후 버전을 보겠습니다. 룻에게는 오전 은혜가 있었고 또한 오후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식사할 때라고 식사라는 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따라서 보아스는 룻을 자기 식탁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떡을 제시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보아스가 룻의 식사를 시중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우 은혜스러운 모습입니다. 또한 매우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으며,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점심 때 자매님들이 준비한 식사를 먹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침을 내가 많이 먹었는지 다 못 먹었습니다. 일본이었다면 제가 가지고 가서 저녁으로 먹었을 텐데 말이죠. 자매님들이 많이 만들어주신 데 대해서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여기서는 보아스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14절 후반에 보면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리로 와서”라고 말하면서 보아스가 떡을 제공했으면 우선 알 수 있고, 그리고 “볶은 곡식을 주매”라고 기록되어 있둣이 여기서도 시중을 드는 사람이 보아스였습니다. 룻은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아서 보아스가 주는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선 배불리 먹고 점심 때 제가 먹고 남겼던 것처럼 그리고 이 보아스가 준 복은 곡식을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남은 것을 보아스에게 돌려준 게 아니라 남은 것을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시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먹으려고 가져가려고 했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시어머니를 위해서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15절부터 다시 이삭 줍기가 재개됩니다. 식사할 때 룻은 보아스로부터 큰 은혜를 받았는데 룻의 눈앞에서 벌어진 은혜였습니다. 15-16절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보아스가 준비한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합니다.

“그로 곡식 단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거기다 추가해서 룻을 위해서 줌에서 조금씩 곡식을 뽑아 버려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룻이 듣고 있지 않는 가운데 젊은 일꾼들에게 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룻은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줌에서 떨어트린 곡식을 젊은 일꾼들이 대신 이삭을 주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룻 자신이 떨어진 곡식 이삭을 줍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째서 이삭이 떨어져 있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룻은 이삭 줍는 게 이날이 첫날이었기 때문에 늘 이삭 줍는 현장이 이런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보아스가 특별하게 준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룻이 모르는 데서 보아스는 룻을 위해서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며 돌아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삭을 발견하고 이삭을 줍는 것은 룻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사실을 압니다. 우리가 보는 데서 베푸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볼 수 없는 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삭줍기와 연결시킬 때는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볼 때 이삭 줍는 것처럼 줍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이삭을 거기에 떨구어 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떨구어 놔도 그걸 줍는 것은 우리들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삭을 많이 주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밖에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을 위해서 말씀을 여기저기 이삭처럼 떨궈 놔도 우리가 좀처럼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남습니다. 어떤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남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많이 떨고 놓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보아스가 얼마나 은혜가 많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를 돌보는 분이 영적인 보아스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이라고 하는 항목들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보아스의 행위는 사랑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스를 볼 때 이 사람 보아스는 예수님의 그림자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이구나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서 3장에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들입니다. 이 밭에서 4절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과 인사를 교환할 수 있다면 대단히 복된 일들일 것입니다.

 해가 빨리 가서 17절의 말씀처럼 이제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17절부터 마지막 23절까지 먼저 읽겠습니다.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모압 여인 룻이 가로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17절에 따르면 저녁까지 줍고 주운 것을 모아보니까 한 에바쯤 되었습니다. 시모에게 돌아갔는데 이후에 룻이 가지고 온 것과 하루 일과를 듣고 나오미는 놀랐습니다. 하루 종일 룻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본 드라마 중에 처음 물건 사기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4살부터 6살 아이들에게 최초로 물건을 사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3살에서 6살 아이들이기 때문에 걷는 것도 쉽지 않고 물건을 사서 가져오는 것도 쉽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물건사러 심부름을 보낸 부모는 걱정하면서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채 가게 가서 토마토 2개, 당근 4개 사오라고 일단 부탁합니다. 처음 갔는데 채소 가게를 이 아이가 알까?라는 걱정이 먼저 앞섭니다. 야채 가게에 가서는 정확하게 살 물건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합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사고는 당하지 않을까?라는 염려도 합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야채 가게 가서 야채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때때로는 오빠나 언니가 데리고 가는 데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내면 중간에 가다가 싸움도 하고 곁길로 가서 좀처럼 못 가는 경우도 그 프로그램에 나옵니다. 돌아올 때도 물건이 무겁기 때문에 지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는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무사히 집에 왔을 때 부모들의 안도하는 모습들이 그 방송에 방영이 됩니다. 어떤 아이는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울기 시작합니다. 그때 엄마도 울면서 아이를 안는 프로그램이 방영이 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잘 됐구나 감동하면서 때로는 바라보는 시청자가 울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자녀를 키운 경험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 비슷한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드린 이유는 나오미의 걱정이 어땠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룻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과연 만났을까? 이삭 줍는 장소를 잘 발견했을까? 어쩌면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았을까” 22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 말은 차별을 받거나 또는 왕따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삭을 주어서 모을 수 있었을까? 점심 식사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나오미 걱정은 하루 종일 계속됐을 겁니다.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에 한숨을 돌렸습니다. 한숨을 돌림과 동시에 놀라는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 18절에서 그 놀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나오미가 갖고 온 것은 주운 이삭이 한 에바쯤 되는 많은 양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한 에바는 23리터 정도 되는 양입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하루에 1리터를 먹는다면 23일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이삭을 주어서는 있을 수 없는 많은 양을 가지고 온 겁니다. 또 하나는 볶은 점심을 먹고 남긴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양적인 은혜를 보고 놀랐고 질적인 은혜를 보고 놀랐습니다. 또 하나는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룻의 그 고운 마음에 나오미는 놀랬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놀라는 것은 19절부터 시작됩니다.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이렇게 많은 이삭을 어디서 주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어디서 일을 했느냐고도 물었습니다. 너를 돌아본 자에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룻에게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룻의 대답은 보아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룻은 처음 만난 사람이기 때문에 보아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나오미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돌아올 때 한탄하며 슬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압에서의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 즉 쓰다라는 말로 부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마음이 즐겁다는 뜻입니다. 근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모압으로 갔을 때는 풍족하게 나갔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다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나를 낮추고 나를 고난을 당하게 했다고 나오미는 고백합니다. 나오미는 울면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돌아올 때는 룻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나오미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20절에 바로 그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에 합당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룻에게는 보아스가 그냥 보아스였지만 나오미는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기업을 무를 자를 괄호 안에 “고엘”이라고 주석을 달아놨습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유업을 다시 되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이삭을 주으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보리 추수가 끝난 다음에 그 다음에 밀 추수 때가 곧 이어집니다. 밀 추수는 6월쯤부터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밀 추수 전까지 삶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생계를 위해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장에 따르면 나오면 생활을 위해서 엘리멜렉의 땅을 팔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무를 권리가 있는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말로 고엘입니다. 그것을 무를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과부에게 장가를 들어서 자녀를 낳아서 그 자녀에게 죽은 자의 이름으로 기업을 있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엘은 그런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사람, 그 근족 중에 한 사람이 보아스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나오미는 매우 놀랐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났던 겁니다. 룻도 이때 비로소 나는 엄청난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것을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해서 놀람의 연속을 계속 경험했습니다.

하루가 끝날 즈음에 나오미는 자부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이것이 바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일이 23절에 조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수개월 동안 룻은 생계를 위한 양식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된 겁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이적 이삭 줍는 일을 하면서 처음 만난 룻이, 처음 만난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 것을 점점점 더 잘 알게 됐습니다. 룻 자신도 인격과 어떤 사람인 것이 점점 드러나게 됐습니다.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점점 알게 되면서 나중에는 룻을 구속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다윗의 계보에 이름이 올라가는 변화를 룻은 경험합니다. 룻이나, 라합이나 이방인이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올라가는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에 의해서 구속을 경험합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구속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됐던 겁니다. 그 사람이 보아스였습니다.

보아스는 구속한 그 재산이나 혹시 자녀를 낳았다면 낳은 자녀도 보아스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재산을 구속해도 그것이 보아스의 재산에는 아무런 보탬이 안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기꺼이 고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고 23절의 말씀처럼 2장에서 수개월 동안의 과정이 마무리가 됐습니다.

 이 2장을 우리의 믿음 생활에 적용시켜보면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십자가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다고 하는 사실을 또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만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인 것을 점점 알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었던 것처럼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으로서 인자로서 걸어가신 삶을 보면서 주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본질, 즉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우리는 예배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상입니다.

2024년 10월 3일 – 2 강서모임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