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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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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무라 타다시 - 3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제에 이어서 오늘까지 피곤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히브리서 11:20절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11장은 믿음으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여러 사람이 또한 소개되고 있습니다. 20절에서는 이삭에 관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이전에는 아브라함에 관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야곱에 관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보면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과 야곱입니다. 요셉에 관한 기록도 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0절에 나오는 이삭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적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로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좋지 않은 태도를 보였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들 야곱에 비한다면 이삭은 대단히 평범한 삶을 산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25장과 2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반 정도는 야곱과 에서에 관한 기록입니다. 35장 마지막에 180세로 이삭이 죽은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이삭에 관한 것을 조금 보고자 합니다. 이 자리에도 믿는 부모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살았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도인으로 비교한다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란 셈이 됩니다. 믿음의 가정에 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면 몇 가지 복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성경 말씀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죄에 대해서 그리고 구원에 대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안 듣기 때문에 먼저 구원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직접 추구하지 않으면 성경을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한다면 상당한 싸움이 있습니다. 가족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또한 아는 친구들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없습니다.
우선 그런 면에서 싸움이 적은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오늘은 특히 이삭에 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그리고 아들 야곱과 이삭 자신이 각각 만든 것이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저기 4곳 정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지금부터 보겠습니다마는 이삭은 우물을 팠습니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웠습니다.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은 제단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예배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팠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웠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관점에서 늘 분기점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각각 다르지만 지금부터 창세기 26장으로 가서 넷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1-5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여기는 기근에 관계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6절부터 15절까지는 이삭의 죄와 하나님의 복주심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7절부터 22절까지는 우물을 판 이삭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3절부터 마지막까지는 브엘세바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6절까지 읽겠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알에 거하였더니”
1절을 보면 흉년이 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도 흉년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 때도 흉년이 있었습니다. 2절에 이삭은 이때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었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창세기 12장에 아브람은 흉년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로부터 애굽으로 가라라는 말씀을 듣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2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까지 창세기 25:11절에 있는 것처럼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거했습니다. 여기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랄 지방으로 갔습니다. 하갈이 사라의 핍박을 받아 가서 산 곳이 바로 브엘라해로이였습니다. 이 우물에서 하갈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곳이 바로 브헬라에로이라는 곳입니다. 뜻은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장소에 이삭은 거했습니다. 여기서는 애굽과는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이 그랄로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3절에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집트에는 곡물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흉년 때 애굽으로 가면 분명히 곡물을 통해서 흉년을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그랄 땅에 거했습니다.
3절 후반에는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이 나타난 것은 여기가 바로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한 곳에 이삭은 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이삭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6-11절까지입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여기서는 이삭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읽을 때 이런 비슷한 사건이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 불렀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흉년을 당했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은 온 가축이나 우물이나 여러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땅도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지혜 비슷한 것을 이어받았는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삭의 인생 가운데 사람을 두려워한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매우 순종하는 사람이었음을 조금 전에 봤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했을 때 이삭은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은 이삭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마는 결점도 있었습니다.
아들 둘을 편애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야곱은 별로 돌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서가 이방 여인과 결혼했지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순종은 대단히 좋은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대단히 약한 면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이런 성격이기 때문에 저는 자녀가 없습니다. 자녀가 있다면 내가 참 큰 일이었겠다 생각이 듭니다. 

12-16절까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여기를 보면 이삭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처음에 하신 약속을 통해서 복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한 복이 이삭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습니다마는 이삭은 목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양치기였습니다마는 이 기사를 보면 농업도 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갑자기 직업을 바꾸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해 농사를 100배나 수확을 얻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보통 농사를 지으면 첫 해는 수확이 많이 나지 않는 법인데, 12절에 따르면 그 해에 100배나 얻었고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더욱더 창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농업을 경영하면서도 목축을 했다는 것을 1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목축뿐 아니라 농업에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농업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이주한 사람이 자기들보다 더 많은 수확을 얻었기 때문에 시기를 했습니다. 원래 갖고 있던 양과 소도 떼를 이루고 종복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더 시기하게 됐습니다. 인간은 자기보다 더 번성한 사람을 보면 시기합니다. 

또한 여기서 이삭에게는 부에 의지한다고 하는 위험이 노출됐습니다. 시기한 블레셋 사람이 우물을 막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것이었습니다.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농업을 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떼와 양떼도 물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이 우물도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시기의 씨앗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의 근본 중의 하나인 우물을 흙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랄 왕 아비멜렉은 우리를 떠나가라라고 말했습니다.
17절부터 22절까지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16절 마지막에 “우리를 떠나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전혀 다투지 않고 풍요로운 땅이었으나 떠났습니다. 

지금부터 17절부터 21절까지 우물에 관한 걸 보겠습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 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것이 바로 이삭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물에 관한 기록이 7곳 나옵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목축에는 우물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물을 파기 위해서는 대단한 중노동이 필요합니다. 광야에서 물이라는 곳을 찾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이삭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방금 읽은 곳에 이름이 붙여진 우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20절에 나오는 에섹이라는 이름이 붙은 우물입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다툼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싯나라는 이름으로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로호봇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뜻은 장소가 넓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외에도 이름이 없는 우물들도 있었습니다.
15절과 17절에 18절에 나오는 우물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이었습니다. 이삭이 고생해서 판 우물은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은 이삭에 속한 사람들이 찾아서 판 우물이었습니다. 새로 파기 전에는 아버지가 판 우물을 의존하고 있었습니다마는 그 다음에는 자기들이 판 우물을 사용했습니다. 아버지를 의존하지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 우물을 판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인 가정에 태어난 믿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부모가 믿는 믿음을 따라서 가다가 나중에는 자기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배된 형제님들의 믿음을 따라가는 게 아니고 자기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여기에 다툼이 몇 군데가 나옵니다마는 다툼이 있었다는 것은 에섹과 싯나라는 이름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때마다 이삭은 장소를 바꿔서 우물을 팝니다. 22절에 나오는 르호봇이란 우물은 더 이상 다툼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삭은 자기 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기 주장을 하지 않고 다툼이 생기면 그걸 넘겨주고 다른 곳으로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25장에 따르면 자기에게 다투는 사람에게 내 우물이라고 해서 자기 주장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신 것처럼 이삭의 삶의 궤적은 대단히 복된 삶의 궤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단히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은 싸움을 즐기지 아니하고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23-33절까지 먼저 보겠습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방금 읽은 이 구절 중에 23절에서 25절 사이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하신 최초의 말씀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삭에게 나는 네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을 해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기보다도 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삭, 네가 믿는 믿음은 너의 믿음이 아니고 너의 아버지의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격려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인생 가운데서 종종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들었습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그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은 인생의 분기점이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있어라고 하는 말씀으로 그 인생에서 선을 긋는 분기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복을 이어받는 사람이라는 말씀도 또한 하셨습니다.
25절에서 이삭은 그래서 세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첫 번째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팠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첫 번째 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믿음 생활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서 그리고 주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믿음 생활입니다.
두 번째 만든 것은 장막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생활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우물입니다. 이삭에게는 우물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을 말한다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물을 팔 때마다 다투지 않고 조용히 사회생활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순서는 어떻습니까? 보통은 세 번째인 일이 우선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가정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되는 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교재가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도 이 순서가 올바른가라고 때때로 음미해 봅니다. 

이사야 58:13-14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여기에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날 교파 나가는 사람이 모임에 오고 싶다고 해서 모임에 몇 개월 동안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속해 있는 교파교회 목사에게 이분이 말을 했더니 그러려면 우리 교회는 안 오는게 좋겠다고 목사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모임에 오는 것을 서둘렀다고 합니다.
이분이 처음에 모임에 와서 만찬 집회를 보았습니다. 이분의 하는 말이 그날이 만찬 집회가 있는 주일인데 오늘 우리가 여행가기 때문에 이번에는 못갑니다라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그러면 그 여행지 어느 모임에 갑니까? 그랬더니 그걸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 교회 사람들은 이 사람은 주일날, 주일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는 구약이지만, 이사야 58:13절에서는 “안식일에 내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고 하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만찬하는 주일은 안식일은 아니지만 즐거운 날이고 존귀한 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고 예수님을 높이기 때문에 존귀한 날이기 때문에라고 아마 그 사람에게 그쪽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그 다음부터는 여행 갈 때마다 어디 모임이 있는지를 찾아서 여행을 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은 삶의 순서를 잘못 정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했던 창세기 26장으로 돌아가면 이삭이 만든 것을 통해서 이런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26절에서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살고 있던 지역의 왕인 아비멜렉이 찾아왔습니다. 친구인 아후삭과 군대 장군인 비골도 함께 왔습니다.
처음에 이삭은 어찌해서 내게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뒤에 나온 것처럼 계약을 맺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을 때도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을 그들이 알았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때는 여호와께서 함께함이 그들의 시기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그들로부터 이삭이 떠났을 때 분명하게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습니다. 이삭의 믿음은 세상 사람들도 알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있는 이삭의 믿음은 대단히 오래 참고 그리고 온유하고 그리고 인내심이 풍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동일한 말을 들었습니다. 같은 이름의 아브라함 시대의 왕이었던 아비멜렉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할 때 “네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느니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삭도 동일한 말을 들었습니다. 이삭의 믿음은 타인이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왔지만 원래는 이삭을 쫓아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했던 실례되는 말들을 이삭은 전부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접대했습니다. 이걸 보게 되면 너무 사람이 좋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이 들지만 이삭은 대단히 평화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저 같으면 실례하는 말을 하네요. 돌아가십시오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마음이 넓었습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4:32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이삭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 같으면 어렵다고 말했을 겁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계약을 이삭은 맺었습니다. 28-9절에서 그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30절에는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1절에서는 서로 맹세를 한 다음에 그들을 평안하게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2절부터는 하나님의 복주심이 나와 있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마침 그날에, 한국어 성경은 그날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침이라는 말이 나오면 어저께 보셨던 전도서 3:11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때에 따라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말씀이 늘 생각이 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니 우물을 발견해서 물을 얻은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도 이삭은 우물을 팔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33절에 이 장소의 이름을 브엘세바라 불렀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브엘세바라는 말에는 일곱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가깝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우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일곱 우물이라고 하는 보일세바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21장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 때도 같은 이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31-32절에 보게 되면 동일한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거기서 스스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것을 브엘세바 맹세 우물이라 이름하였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움에 아비멜렉과 군대장군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여기에 아브라함이 자기가 판 우물이라고 해서 그 증거로 교환하는 소를 보냈음을 27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이름이 브엘세바라는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절에 재미있게도 아비멜렉이 나오고 군대 장관 비골이 나옵니다. 아버지 때 이름과 아들 때 이름이 동일하게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배경을 보면 아비멜렉이나 비골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도 그 당시 지명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의 생애에서 특징적인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이 제1대였고, 이삭이 2대째였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이 선대 1대 믿음의 선진이라면 이삭은 2대째 믿음을 갖는 2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복습을 한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함과 더불어서 관용하고 참고, 그리고 평화로운 특징을 가진 사람임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보였음을 보았습니다. 이삭이나 아브라함이나 야곱도 하나님께로부터 격려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서는 생활에 있어서의 순서가 중요함을 보았습니다. 가정생활을 우선할 것인가, 사회성을 우선할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할 것인가라고 하는 과정이 어떠함을 보았습니다.
28:13절에서는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도 되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약에서 도마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부활해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갔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처음에는 없었습니다.
8일 이후에 모두가 있는 자리에 주님이 나타났을 때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도마는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향해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빌리지 아니하고 직접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10월 4일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