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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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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무라 타다시 - 4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의 나고야라고 하는 동네에서 도시에서 왔습니다. 8년 전 11월달에 강서 모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해 잭 헤이 형제님이 5월달에 오셨기 때문에 그때도 제가 방문을 했습니다. 올해 5월에도 강서 모임을 제가 방문했습니다.
8년 전에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올해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다음 올림픽 때도 강서에 제가 오게 될까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외국에 나간 적이 들어 있었습니다마는 제가 다닌 외국 가운데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가장 많습니다. 가장 오래전 한국을 처음 방문한 건 약 3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은 한국의 밤에 보니까 빨간 십자가가 많아서 제가 놀랐습니다.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수에 비해서 한국이 10배 많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온 것은 홍형제님이 전화를 해서 지금 집회 장소가 아닌 이전 집회 장소로 제가 안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강서 모임에는 제가 여러 가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 모임들에 대한 생각이 제가 추억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 모임은 바울에게 대단히 중요한 모임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일으켜 세워진 모임이었습니다. 고린도 모임이 시작된 이후에 5년 정도 경과됐을 때 이 서신이 쓰여졌습니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모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은사가 풍부한 모임인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4-9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 서신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그 모임에 놀라운 점들을 먼저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도 그와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 기록을 보면 구변과 지식의 풍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신을 읽어나가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13장 전에 12장이 있습니다마는 12장에는 고린도에 주어진 은사가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은사를 어떻게 쓰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한 사람에게 여러 은사가 주어지기도 하고, 성령님이 주셨기 때문에 혼란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사는 성도님들의 유익을 위해서 준 은사였습니다. 은사를 쓰는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 관계되는 문제들이 14장에도 기록이 되 있습니다.
고전 12:31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12장에는 은사를 많이 언급합니다마는 31절에서는 더욱 큰 은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썼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13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전 13: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구절 구절에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하는 구가 있습니다. “~면”이라는 말이 1절에서 3절까지 5번 나옵니다. 그 안에 은사에 대한 것들이 몇 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1절부터 3절 사이에 있는 은사들이 여러분들에게 올바르게 주님께로부터 쓰임 받고 있습니까?
그러한 말씀을 바울이 하면서 “내가”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직접 지적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내가 뭐~ 뭐~ 하면”이라고 하는 표현으로 표현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사람들을 직접 지적하지 않고 내가 어떠어떠 하면이라는 조건문으로 바울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1절부터 3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1절에는 방언이라고 하는 은사가 등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제가 방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 형제님이 이렇기 통역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영국 모임에 가서 제가 한동안 모임에 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찬 때 제가 일본어로 기도하고 싶었는데 어떨까 해서 머뭇거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일본어로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물었더니 그 형제님이 괜찮다고 해서 제가 일본어로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일본어로 그때 기도를 했지만 아마 이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임 성도들은 제가 하는 기도가 방언이라는 것밖에 몰랐을 겁니다. 그때 그 이후에 어떤 형제님이 형제님의 기도가 시 같았습니다라는 말을 제가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어의 리듬이 시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한 다음에 생각했습니다. 제 기도는 성도님들에게 방언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그곳에서 일본어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바울은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듣는 사람에 의해서 만약에 그 사람의 의미를 모른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이 있으면 이런 것들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절에는 예언의 은사가 나오고 지식이라는 은사가 나오고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나옵니다. 이러한 것들을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14장에 예언을 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듣는 사람에게 유익한 은사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시간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구도자가 복음시간에 오면 구도자가 믿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말들을 합니다. 처음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당사자의 죄를 알기를 원합니다. 또한 구원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처음 오는 사람에게 바로 구원 자체를 말하면 그 사람이 모를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일본에서는 800만 정도의 하나님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하나님은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800만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님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죄가 무언지를 모른다면 복음의 말씀은 진행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행위를 하면 경찰에 잡혀가는 것이 죄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구도자의 상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더 심한 예를 하나 들면 전도 시간에 갑자기 레위기의 제사에 관한 제물 이야기를 끄집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제물들이 나옵니다. 그것을 갑자기 처음 듣는 구도자에게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본 구도자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구도자에게는 방언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올바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혼자 말하는 방언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비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비밀에 대해서 바울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몸된 교회와 그리고 공중으로 휴거되는 공중 휴거, 이런 것들은 구약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바울 같은 사람이 우리들에게 가르쳐줄 때 믿는 성도 중에도 갓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은 시간이 오래된 사람이 있습니다. 갓 구원받은 성도에게 어려운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단단한 음식이기 때문에 좀처럼 소화가 안 될 겁니다. 
제가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될 즈음에 동경에 모임에서 종종 레위기 희생제물에 관한 교제가 행해졌습니다. 어려운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제가 몰랐습니다. 예를 들면 전제, 번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당시는 지금 번역본과 달리 옛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한 성경이었습니다. 그 일본 성경에는 한국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번제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의미를 몰라서 고사전을 제가 찾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가르치는 형제님은 당연히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사실은 번제인데 일본에서는 그걸 풀었습니다. 전체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말로 풀었습니다. 지금 현재 일본어 번역본으로 읽으면 번제라는 단어를 풀어서 썼기 때문에 이해가 됩니다마는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번제라든가 속건제라든가 이런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서 제가 좀처럼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 말씀 교제가 건덕 시간에 자주 있었습니다. 자주 있었기 때문에 제 생각으로 중요한 단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여러 번 들을 때마다 또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믿음의 성장이 있은 다음에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믿음의 상황에 따라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 자매님들의 믿음의 성장 단계를 잘 알고 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비밀과 지식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라고 하는 교만이 거기에 배어 있을 수 있습니다.
8장에 따르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는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어떤 상태인 걸 알고 거기에 맞춰서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믿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본어 성경은 모든 믿음이 완전한 믿음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믿음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일본어 성경 번역처럼 이러한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말하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서신서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바울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뭔가의 행위가 수반됩니다마는 그 행위가 사랑의 바탕에서 행해지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에서는 구제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순교라는 의미를 말하는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의미도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지금부터 봉사합니다라고 나팔을 불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듯한 그런 행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계셨을 때에 부자와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다. 많은 재물 가운데 일부를 넣었습니다. 과부는 갖고 있던 두렙돈 다 넣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헌신이 갖고 있는 재산 전부를 넣게 만들었습니다. 그 부자의 헌금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 과부의 헌금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는 순교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하는 하나님을 위한 순교의 자세는 대단히 훌륭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보면 마태복음 26:35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기록된 대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라는 의미로 말이죠. 다른 말로 말하면 순교해도 좋습니다라는 태도입니다. 이 당시 이 제자들의 생각은 정말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들의 결의, 이들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만족은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칭찬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 몸을 불사하게 내어줄지라도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어찌어찌 하면 이런 조건을 붙인 다음에 그것이 없다면 나에게 유익이 없고,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소용없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훌륭한 은사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믿음이 있을지라도, 아무리 놀라운 비밀과 지식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동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 사랑의 구체적인 것들이 15개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러한 것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바탕 속에 깔려 있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사랑의 수고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수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수고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어는 무엇이겠습니까?
일본 말에 애증(愛憎)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본어를 가지고 생각하면 애증이기 때문에 애는 사랑이고 증은 미움을 말합니다. 사랑에 반대하는 미움이라고 하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저는 미움보다도 사랑의 반대를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말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무관심의 반대는 무엇이겠습니까? 관심입니다.
이 세 가지를 조합하면 사랑은 어떤 사람에 대한 관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관심은 타인에 대해서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구약 성경을 통해서 큰 두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느냐고 하나님은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바로 여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성인 성품이 구약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6-7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직접 우리가 맨눈으로 보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한 다음에 하나님이 자기 소개를 모세에게 한 것입니다. 모세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자니라라고 자기소개를 한 것입니다.
이걸 크게 둘로 나누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하나님의 특성에 의로움이 나와 있습니다. 종종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죄와 과실은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벌을 내리시지만 그러나 과실과 죄를 용서한다고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자기소개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직접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지는 않고 따라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고 하는 토대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두 가지를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말씀으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또 하나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대인관계에서 하나님 스스로를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분이라든가 은혜로운 분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의 항목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둘로 요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에게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율법을 죄 때문에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은 몸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말씀하신 그대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웃에는 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특성을 예수님은 몸을 가지시고 정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시고 이 지상을 걸어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고, 나를 보면 아버지에 대한 것들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한 다음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성령을 받으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말합니다. 저도 그렇고 홍형제님도 그렇고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성령님은 육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하나님 특히 아버지의 영광, 그 놀라운 영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성령님은 육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몸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가 됐습니다. 그 하나님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방금 읽었던 사랑입니다.

사랑에 관한 것들이 더 많이 있지만 고린도 13장에는 15가지가 언급이 되 있습니다.
다시 고린도 13:4절로 가서 순서에 따라서 보고자 합니다. 크게 보면 4절에서는 5가지가 나옵니다. 몇 개 그룹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 4절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대인관계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것과 그리고 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도 또 하나의 그룹으로 투기 자랑, 교만이라는 말씀으로 그룹 지어집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생기는 특성들입니다.
그 다음은 5절입니다마는 여섯 번째부터 9번째까지 4개가 있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 유익을 굳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즉 타인에 대한 악을 말입니다.
여기서 어떤 것,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을 지금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 번째는 6절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7절 마지막에 그룹을 보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을 말합니다.
이제 지금부터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오래 참고와 온유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 속에서도 나오는 겁니다. 성령의 열매는 9 항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에 9 항목을 세 가지씩 그룹으로 그룹 지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세 가지 사랑, 희락 화평 여기에 사랑이 나옵니다. 이 세 가지는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고 희락인 기쁨이 있고 화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세가지는 오래 참음, 자비, 양선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행위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와 다른 사람에 대한 양선을 말합니다.
마지막 세 가지는 그 당사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충성인 성실, 온유, 절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사랑과 희락 화평이 맨 먼저 나옵니다. 

고린도서 13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자비를 행위를 행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어 성경의 “오래 참고”를 일본어는 관용이라고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은 한자를 얼마나 쓰는지 모릅니다만, 일본어 성경을 가지고 말하면 관용이라는 관은 넓고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이라는 말은 어떤 그릇을 말합니다. 일본어 성경으로 가지고 말한다면 오래 참고라는 말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그릇의 크기를 바랍니다. 사진을 찾아보니까 이런 의미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하고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금방 거절하지 않고 늙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사전에 실려 있었습니다.
또한 그 의미는 자기에 대해서 타인이 잘못하고 한 일에 대해서 꾸짖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려고 한다는 마음이라는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인이 자기에게 뭔가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오래 참는 것과 오래 참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잘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가 몇 군데 나오기 때문에 좀 보고자 합니다.
우선 누가복음 9:51-55절까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을 계속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시기인가 하면 승천하실 기약이 찬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한 6개월 정도 지나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지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하고 계십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냈는데 사마리아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예배하려고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성의 여인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인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쪽이 일방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유대인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53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 내려 저희를 멸하려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괘씸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멸하라고 명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야고보 요한은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실제로 불을 명해서 멸한 예가 있습니다. 야곱 요한은 매우 교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야고보 요한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두 제자를 예수님은 꾸짖은 사실이 55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십자가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염두에 두시고 십자가를 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태도를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였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실례되는 행위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셔서 이들을 구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대단히 오래 참는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18장 예도 하나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8:21-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앞에 나왔던 야고보 요한보다는 베드로가 좀 낫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의 전례에 따르면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라고 하는 전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전례에 비하면 베드로는 일곱 번이니까 배 이상의 오래 참음에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덟 번째는 용서하지 말고 벌을 주어야 할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22절에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물론 490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완전히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예가 계속이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으로부터 우리가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10데나리온 정도는 용서해도 될까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1만 달란트라고 말씀하는 이 부채 빚은 변제할 수 없는 엄청난 빚이었습니다. 완전히 용서를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오래 참음은 한계가 있지만 예수님의 오래 참음은 한계가 없는 듯합니다.

한 사람 더 보면 바울의 예로 디모데전서 1:13-16절까지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이전에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본 말씀에서 예를 가져오게 되면 바울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 같은 바울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15절에서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죄인인 나를 위해서 구원하시려고 희생하셨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즉 관용을 보이사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오래 참음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는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렇게 심한 자인 자신도 구원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본이라는 말입니다.
이 오래 참으심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오래 참으심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오래 참는 행위를 취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다시 돌아가시면 두 번째는 온유에 대한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어로 잃게 되면 동정심이 많은 불쌍히 여기는 그런 뜻으로 해석이 되기도 하는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오래 참고라는 말은 누군가로부터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온유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행위를 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적극적인 행위가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이 바탕이 되어 있는 온유는 상대방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바탕의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는 긍휼이라고 하는 표현으로도 표현됩니다.
조금 전에 보셨듯이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긍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여러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며 자비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다음 시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를 통해서 보고자 합니다. 오전은 여기까지 인도를 받겠습니다.

 2024년 10월 5일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