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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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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무라 타다시-5

고린도전서 13장으로 다시 가시겠습니다.
두 번째 사랑인 온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래 참고라는 사랑은 누구로부터 어떤 태도를 당했을 때 그것을 가만히 참고 받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이 나름대로 힘이 필요합니다. 온유라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상대방에게 뭔가 행위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힘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잘 아시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에 전부는 읽지 않겠습니다. 25절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다시 되물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일까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건 알겠는데 이웃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유명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이후의 말씀도 잘 아시기 때문에 중요한 대목만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36절에서 여기에 이웃이 누군지에 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아마 율법사는 이러한 사람이 자기 이웃이라고 이 말씀을 듣기 전에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오전에 보셨던 것처럼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경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이웃이 됐습니다.
37절에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사는 옳은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사마리아 사람을 경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쓸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었다” 라는 말이 온유라는 말과 통하는 말입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복음집회에서 종종 이 말씀을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처음에는 제사장을 만났습니다. 레위인도 만났습니다. 동포인 레위인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아마 사마리아인이 지나갔을 때 강도 만난 그 반 죽은 사람은 내가 도움을 받지 못하겠구나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이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의 본체가 되는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푼 분은 예수님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최근의 생각을 제가 했습니다마는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버렸을까라고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잘 생각해 보니까 제사장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질문의 발단이 됐던 것은 율법사였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의 원래 참된 뜻을 알고 있을 터였습니다. 읽을 때 우리 자신이 강도 만나 그반 죽은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장소를 지나쳐버린 마음이 차가운 사람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 사람들을 보면서 여러분도 그렇겠습니다마는 저도 역시 우리들은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모임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또한 율법사처럼 율법사가 율법의 말씀을 배우듯이 말씀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제사장 레위인 율법사가 제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곤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올바르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문제에 얽히기 때문에 얽히기 싫어서 돌아가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임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방문합니다. 이전에 형무소에 가서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이 모임을 방문했습니다. 형무소에 수감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들은 다가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마음속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가 다가갑니다. 제가 그 생각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자가 그런 생각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임에서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내가 괜찮은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말씀을 열고 가르치는 사람인 내가 그런 마음을 먹어도 정말로 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마음속에 스쳐갑니다.

이 기록을 읽으면서 레위인과 제사장은 잘못됐었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내가 사마리아인처럼은 되어 있지 않구나 하는 결론을 제가 내립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온유했습니다.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불쌍히 여겼다는 말을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온유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자비를 베푼 자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웃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웃이 되겠느냐고 그랬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겁니다. 이웃이 언제나 자동적으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이웃이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을 둘러볼 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구도자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어쩌면 여러분의 아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온유입니다. 

다음 항목으로 가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절에서 세 번째는 후반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세 가지가 나옵니다. 투기하는 자, 자랑하는 자, 교만한 자가 나옵니다. 이 세 가지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항목들입니다. 처음에 후반의 세계 중에 첫 번째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을 때나, 좋은 자동차를 가졌다든지 … 그때 투기해버립니다.
어저께 이삭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이삭이 너무 부유해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이삭을 질투했습니다. 투기한다는 말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끌어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보다 밑에 있으면 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녀가 많았습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로부터 투기를 당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모세를 질투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투기함을 당했습니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항목 세 번째가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자기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예 중에 하나가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고 자기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요나단은 낮아졌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투기는 남이 나보다 나을 때이고, 자랑은 내가 남보다 높을 때입니다. 비슷해 보이지만은 이것도 타인과의 비교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높다라고 하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우쭐대거나 또는 자기를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자랑하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를 고전 4:7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냐 너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사실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만들어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수여받았습니다. 따라서 자랑하거나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분수를 알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4절 후반 세 번째로 가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교만도 앞에 나오는 두 가지와 같은 개념입니다마는 앞에 두 개는 어쨌든 자기를 우선하든 타인을 우선하든 간에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개념이지만, 교만이란 말은 자기가 있는 실체보다도 과장되게 보이기도 하는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다른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는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훌륭하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겁니다. 나는 저 사람 같지 않다라고 하는 생각을 스스로가 갖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가운데 그러한 뜻이 담긴 기도가 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다라고 바리새인이 기도한 기도가 있습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합니다라고 자랑합니다.
투기하는 자, 자랑하는 자, 교만한 자는 타인과의 비교해서 하는 행동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는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타인과의 비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5절에 4가지가 나옵니다.
부정적으로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는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타인이 행한 행동에 대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아니하며”이지만 앞에 두 가지는 어느 쪽인가 하면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머지 두 번째는 수동적입니다. 앞에 두 개는 능동적이고 뒤에 두 개는 수동적입니다.
순서대로 보고자 합니다.
처음은 무례 행치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는 것은 대단히 하기 쉬운 행위입니다. 예의를 갖추지 않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 무리 행치 않는다는 것 중에 첫 번째는 인사하는 것입니다. 통념적으로 말하면 한국어로는 “안녕하세요” 가지고 하루 중 언제나 지날 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과 영어권에서는 인사가 세 가지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이 다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인사가 하나든 세 개든 간에 인사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무리에 행치 아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것은 인사 안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인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방인들이 동일하게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구도자가 처음 왔을 때 기쁘게 인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사 안 하면 구도자가 냉랭한 모임이구나라고 말을 할 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구도자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무례히 행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는 말은 시간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약속한다는 것도 약속을 지키는 것도 무례히 행치 아니한 것과 관계 있습니다. 제가 관찰해 보니까 시간 안 지키는 사람은 늘 안 지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찬에 지각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결시켜 생각할 때,
누가복음 22:1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시간을 지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아서” 이 말은 예수님이 정한 시간에 시간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찬도 그렇습니다마는 모임에서 집회할 때 집회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모임에 때때로 늦게 참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마는 여러 사정으로 늦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사정이 없는데도 늦게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간을 지키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전에 제가 동경에 있는 모임에 속해 있었을 때 그때 어떤 젊은 형제님이 만찬에 늦었습니다. 집회 끝난 다음에 선배 형제님이 그 젊은 형제님에게 늦으면 안 되지 않느냐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늦은 형제님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늦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선배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늦으면 안 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젊은 형제님은 그 다음 주부터 모임에 안 나왔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어서 넣는 것인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양쪽을 다 고려합니다마는 이 사정을 보게 되면 이분에게 듣고 ‘아 그렇습니까?’라며 지났으면 좋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가정 사정 때문에 어쨌든 모임에 왔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 가지 일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빠지는 것보다는 참석하는 게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빠지는 것보다는 늦어도 좋으니까 오는 게 좋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늦었지만 모임에 온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와서 감사하고 돌아가는 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늦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따지게 되면 그분은 어떻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왔는데 오니까 꾸중을 들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말을 걸면 좋겠습니까? 말을 걸 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주의를 줄 때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종종 늦는 분들하고 좋은 교제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분의 사정을 고려해서 약간 주의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평상시 잘 교제하는 분으로부터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앞으로는 제 시간에 와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사정도 알지 못하고 평상시에 교제도 잘 안 하는 사람이 갑자기 꾸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평상시에 교제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간에 시간을 지킨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무리 행치 아니한다는 말은 실례되는 말이나 행동을 아니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전혀 남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행동 중에 하나는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무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7번째로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타인 중심인 것을 말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도 복이 있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이 디모데서에 나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는 점점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 중에 특징적인 그런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삭개오도 믿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삭개오는 늘 자기가 받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말을 건 순간부터 삭개오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남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줄 뿐 아니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주는 사람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결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 기록이 나옵니다마는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누가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은 그분의 생명을 타인을 위해서 내어놓으셨습니다. 오전 중에 보셨던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마리아인을 위해서도 말이죠. 사실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유익을 굳지 않고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절 후반에 나온 두 가지 중에
“성내지 아니하며”라는 것하고 타인이 행한 악에 대해서 생각지 아니하는 것이 나오는데 먼저 성내지 아니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성내지 아니함이지만, 제가 보고 있는 2017년판 일본어 성경은 초조해하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일본어 성경은 한국어 성경처럼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다른 상황이 발생하면 화를 내거나 초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주변에 있는 상황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고 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는 겁니다.
왜 성을 내는가를 보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살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옳고 예수님이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구약에 가인과 아벨 기록을 보면 아벨은 가인보다 옳은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제물에 눈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물에는 주님이 눈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화를 냈습니다. 화를 낸 결과 동생 아벨을 그만 죽여버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렇게 화를 내는 대상이었습니다. 가인에게는 동생 아벨이 화를 내는 대상이었습니다. 만약 가인에게 아벨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아벨과 똑같은 태도를 취했을 겁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랑이 있다면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한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는 사랑의 항목이 다음입니다. 앞 항목은 타인에 대해서 성내지 아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나쁜 일을 행했을 때입니다. 말씀드린 아벨은 가인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항목에서는 다른 사람이 악한 일을 행한 다음이었습니다. 일본어 다른 번역에는 원한을 품지 않는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구약에는 이와 같이 악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 즉 마음속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창세기 4:23-24절에 라멕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여기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창상을 입었습니다. 자기가 입은 상처 때문에 상처를 입힌 사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라고 되 있습니다. 라멕에게는 77배이기 때문에 가인에 비하면 11배 많은 것입니다. 77배나 복수한다는 겁니다. 보는 대로 죄인들의 양상이 이렇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드라마였지만 원수를 배로 갚기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안 봤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모릅니다마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손해를 입으면 그 사람에게 다시 배로 갚아준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복수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당하면 당한 만큼 갚는 게 인간입니다. 죄인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행한 악을 늘 마음속에 두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어떤 면에서 아주 고통스러운 인생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오전에 본 대로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서 보았습니다마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에게 7번까지 형제가 죄를 용서해 줘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최종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숫자의 의미보다도 완전히 용서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행하는 행위와 예수님의 행위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욕을 당하여도 다시 욕을 갚지 아니한다고 증거했습니다. 고난을 당해도 위협하지 아니했다고 증거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타인이 악한 것을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사야 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기록된 그대로 타인이 행한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도말하며 용서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44:22절도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와 같이 타인이 행한 악한 일을 마음속에 품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는 오래 참음과도 통합니다.

고린도전서 13:6절로 가보면 진리에 대해서 두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잘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불의가 있으면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지적해 줍니다. 예수님이 율법학자들, 바리새인과 다투는 장면들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3:13절부터 바리새인들과 다투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씀으로 출발하면서 후반절도 보면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예수님이 볼 때는 이들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도 연속적으로 나오는데 총 합하면 “화 있을진저”를 7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나오고 화 있을진저, 16절도 화 있을진저, 23절도 화 있을진저, 25절도 화 있을진저, 27절도 화있을진저, 마지막으로 29절에서도 화 있을진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해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바울도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싸운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5절입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가 들어와서는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복음을 전했으며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안 된다고도 그렇게 가르쳤던 겁니다. 믿음만 가지고 안 된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싸웠습니다.

고린도서 13장에서 또 하나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입니다.
사랑의 항목 중에 하나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모임에 참여할 때 지각하지 않을 것을 그런 예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것을 말하는 겁니다. 지각해서는 안 된다는 올바른 말을 하는 겁니다. 또한 말씀을 말할 때도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올바른 겁니다.
그러나 때때로 말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교제가 깊은 사람이 지적하면 불쾌한 생각을 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듣는 데서 그 말을 하게 되면 때로는 합당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만약에 진리를 위반되게 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우선은 개인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그렇습니까’라고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씀은 그러하나 진리를 쓰는 방법은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은 양날의 칼입니다. 어떤 경우는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진리를 말할 때도 사랑을 가지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가운데서 진리를 휘두르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기도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7절이 남아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마는 이것은 내일 오후 말씀 시간에 전하도록 남겨두겠습니다. 그런데 계략을 말씀드리면 이 네 가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을 말한다는 것은 일단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은 집에 가셔서 직접 무슨 뜻인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0월 5일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