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실천
이 춘 원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가 어떻게 신앙생활에 합당하게 나타날 수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토 바울은 갈라디아서
“생각해 보라”
시퍼런 바닷물이 철썩이는 남해안 어느 높은 절벽 위에 올라가면 사람이 가끔 떨어져 죽는 일명 ‘자살 바위’가 있는데 거기에 이런 푯말이 있다고 합니다.
“떨어지기 전에 잠깐만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떨어져 죽을 놈이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고 그대로 자살한다면 어찌할 수 있으리요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 푯말이 주효하여 자살을 단념시키는 때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읽는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권고하는 말씀이 무려 240여 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든 인간은 생각하므로 존재합니다. 생각은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생각을 두 가지로 대별하고 있습니다. 즉 사망을 가져오는 ·육신의 생각’과 생명을 이루는 ‘영의 생각’입니다(롬
역사 이래로 사람이 잘못 생각하여 벌어진 종교적인 헌신과 율법적인 열심은 숱한 죄악들을 범해 내려왔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대로 순종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지나쳐 나간 것이었기 때문에 큰 전쟁과 살인과 저주와 무지를 초래케 했던 것입니다.
먼저 가신 과거의 선지자들과 사도들, 숱한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보다는 도리어 하나님을 경건히 잘 믿는다고 하는 열광적인 종교가들과 율법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철저한 율법주의 광신자들에게, 그것도 하나님을 율법대로 잘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조건 열심히 섬기려는 것보다 먼저 복음의 진리를 믿고 거듭난 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생명 없는 의문으로 된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멋대로 살아도 되느냐?”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의 화살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저 구원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좋으냐?” 혹은 “율법을 지키지도 않고 아무 것 안 행하고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데 그럼 이제 멋대로 살아도 되느냐?” 혹은 “십계명을 무시하고 도덕을 폐기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사실이냐?”
차제에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첫째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서만 된다고 하나님은 성경에서 누누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 곧 율법이나 십계명을 지키거나 선한 도덕적인 생활을 하거나 어떤 공적이나 봉사나 노력으로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 치고 누구 하나, 죄를 지어도 좋다거나 죄를 짓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므로 모든 죄와 율법에서 벗어났고 또 지옥에 안 갈 것이니 먹고 마시고 죄를 짓자는 사람은 아직 내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나타내자고 망상을 하거나, 죄를 범해도 좋다고 남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거나, 믿음도 있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치는 자는 마지막에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믿음으로 거저 구원받는 것이니 이제 육신대로 아무렇게나 살고 법도 어기고 마귀와 같은 정욕적인 생활을 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자는 거짓교사요 이단입니다.
넷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법률이나 도덕률이나 사회질서를 자청해서 어기고 폐지시키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도리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국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며 사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으로 밝히는 등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다섯째로 사람이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솔직히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이 해이해지고 도리어 죄를 짓게 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그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을 수천만 번 강조해도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율법의 명령과 멸망의 두려움 때문에 열심히 섬기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깊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인간에게 무슨 사랑이 있고 헌신이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신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오직 그 은혜를 믿음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이 만든 방법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것이지만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의 믿음으로 내속에 계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내게 오셨습니다. 여기에 참 은혜와 믿음과 사랑의 봉사가 넘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구원받은 사람이 은혜를 믿음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마틴 루터
마틴 루터가 1520년 가을에 로마 교황 레오 6세에게 보낸 서간인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볼 것 같으면 고린도전서
①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자유스러운 주인으로서 아무에게도 지배를 받지 않는다.
②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섬겨야 할 종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 두 명제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이 서로 잘 조화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에
훌륭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이 두 명제는 정신의 자유와 속박에 대한 것이라고 논술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자유인은 참 종이다.
갈라디아서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고 낮아진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사랑과 봉사의 본을 우려에게 보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느니라”(눅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사랑의 봉사를 본받아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그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주고 받들고 그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잃는 데까지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산 믿음은 사랑의 수고와 함께 역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겸한 사랑 가운데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엡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유 21절),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고”(엡
그리스도인은, ① 이 사랑을 깨뜨리기 위하여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자기
자신의 정욕적인 기회로 삼지 않고(갈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의 계명을 벗어나서 사랑의 계명, 곧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자들입니다(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습니다(갈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는 자입니다. 누가 그렇게 다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 다면 율법적인 생각으로는 한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율법이나 그 사랑의 행동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은혜를 믿을 때 나도 그 사랑을 다 이루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죄인이 율법적인 행위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역시 나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는 자녀들이고 생명의 성령님에 의하여 그 사랑을 나타내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율법적으로 사람의 의지대로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200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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