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가정
(에베소서
- H. A. 아이언사이드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아홉 구절에서, 우리는 앞장 22절부터 시작하는 본 서신서의 결론을 보게 됩니다. 5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내에게 주어지는 교훈을 살펴보았습니다. 상호간의 사랑, 존경 그리고 성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가정다운 가정을 만드는데 특별한 역량을 지니고 있는 헌신적인 아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가정의 머리로 인식하고 가족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는 남편, 남편을 경외하는 아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정의 다른 구성원에 대해, 그리고 다른 관계 속에서의 그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는 자녀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리라고 생각하는 자녀들, 즉 그리스도인 자녀들에게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공적인 봉사에 참여하거나 자신을 위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기 전, 그들의 이런 초기 형성기에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자녀들을 준비시키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순종이라는 문제는 옮고 바르다는 일반적인 근거(“이것이 옳으니라”) 위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보고 있습니다. 젊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님들, 그리스도인 소년 소녀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첫 번째 교훈이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왜입니까?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동일한 교훈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는 사도가 그것을 다른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 라”(
어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말하는 것처럼, 때때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뭔가 큰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특별한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종, 부모의 권위에 대한 순종과 사랑으로 이뤄지는 복종,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모본을 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장 51절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한 가지로(즉, 그의 모친 마리아와 부친 요셉과 더불어)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여기서 우리는 육체를 입고서 모든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본보기가 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이 가정에서 소년이거나 소녀이며 또 주 예수를 믿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일찍이 나와 같은 어린이셨습니다. 그분은 가정에서 나와 똑같은 위치에 계셨었고 그 자리의 역할을 잘 수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순종하셨고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복종하셨습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자취를 따라 오도록 본을 보이시면서 순종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나중에 자라서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은 다른 영역들 속에서 그분의 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가정생활에서의 여러분의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자녀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심지어는 주의 성찬에도 참여하면서도, 가정에서는 제멋대로 살고 변덕스럽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가장 큰 모순입니다. 바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세를 하면서도 개인적인 가정 울타리 안에서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자녀들을 보는 일보다 더 괴롭고 역겨운 것은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엄하게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는 이방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죄악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가장 사악한 죄악임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29절과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 그 속에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그것은 가장 사악하고 부도덕한 행위들, 심지어는 살인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 순종을 배우지 않고,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권위에도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어떤 범죄 소년들에 대해 “이 소년들이 이렇게 자라도록 방임한 그들의 부모들을 교도소에 넣게 되기를 나는 원한다”고 한 인디아나(Indiana)의 게리(Gary) 법정의 판결문은 옳았습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순종하도록 만들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자녀로서 우리는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후서를 살펴보게 될 때, 3장에서 사도는 마지막 날에 있을 배교의 뚜렷한 증거와 또 당시 죄악들의 목록 가운데 하나로서 부모에 대한 불순종을 다시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로마서 1장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시작 당시 이방 세계의 특징이던 죄악들을 보게 되고,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인 마지막 때에 기독교계의 특징을 이루는 죄악들을 보게 됩니다. 똑같은 죄(부모에 대한 불순종)가 각기 그 특징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
부모에 대한 순종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계명이 독특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 사도는 우리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율법을 읽어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십계명을 읽어보십시오. 그 중의 넷은 아무런 약속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계명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더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한가지 특별한 약속을 더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부모에 대한 순종을 부각시켜 그 중요성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이것을 가슴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말뿐인 신앙, 주일학교에 나가는 것, 교회나 젊은이의 모임에 나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또 이런 것들이 기독교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가정에서 경건함을 나타내십시오. 부모에게 순종함으로써 중생의 증거를 나타내도록 여러분은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제 4절에서 사도는 아버지들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어머니들에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자녀들에 대하여 참지 못하여 지나치게 거칠고 불친절하게 되기 쉬운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들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여기서 “아비들”로 번역되어 사용되는 바로 그 단어가 하나님의 영께서 모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모세의 부모에 대해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히
여기에 나오는 “부모”라는
단어와 에베소서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여,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자녀들에게 요구하지 말고,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힘겨운 짐을 부과하지 말고, 그들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자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모본으로 삼듯이, 여러분 부모들도 하나님 그분 자신을 여러분의 모본으로 삼으십시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4).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려 깊게 행해야 합니다. 자녀들 앞에서의 여러분의 자세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와 같이 하십시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세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인다운 본을 보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주를 경외함으로 그들 앞에서 언행이 일치하게 행함으로써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내게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기 괴로움을 털어 놓았던 대학에 다니는 한 젊은 여성을 나는 기억합니다.
“저는 지금 커다란 영적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하여 가장 슬픈 사실은 나의 아버지와 그것을 의논할 수 없다는 것과, 나의 아버지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님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가정에서 목소리를 높여서 기도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를 모아 놓고 성경을 읽으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설교를 위해 그 종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경건한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경건함을 드러내고 또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은 첫 번째 자리는 가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여러분의 자녀들은 믿음이 깊은 혈통과 경건한 양육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5절에서 사도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는 가정에서 또는 바깥에서 일하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도가 이 편지를 쓰던 당시, 그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종들”이라고 번역된 “둘로스”(Doulos)라는 단어는 매매되는 노예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매매되는 노예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8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므로 노예들에게 주어졌던 옛날의 교훈이 지금은 모든 고용인에게 적용됩니다. 종들은 주인의 돈으로 구매되거나 혹은 집안에서 태어나 주인에게 양육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노동력을 팝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서 주어지는 교훈을 준수할 책임을 지니고 있는 관계 속에 있는 셈입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고, 여기에서 주어지는 교훈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서 제 자리를 잡게 된다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이 교훈을 준수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 고용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케리(Cany)가 외국선교에 지원했을 때, 어떤 사람이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은 비꼬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직업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구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직업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직업에서 일하든 간에 거기서 나는 주님을 섬깁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나는 “눈가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고서는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말은 5절에서 “종들”로 번역된 것과 아주 똑같은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종”입니다. 그러므로 눈가림이란 눈의 노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눈의 노예인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주인이 온다”고 할 때까지 자기 일에서 꾀를 부리는 남자, 어떤 사람이 “사장님이 사무실로 오신다”고 할 때까지 주인의 시간을 허비하다가, 그제야 급하게 타자기를 만지는 젊은 여성, 이것이 눈가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없도록 하십시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이렇게 하면 일이 얼마나 놀랍게 존엄하게 되겠습니까? 나의 직업이 어쨌든 간에, 그것을 마음으로 하나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나를 두신 곳이며, 나는 거기서 그분을 위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인이 내게 적절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에서 초연하게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내가 알고,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아실 때,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들이 되지 말라”(고전
나에게 전혀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고, 또 될 수 있으면 조그만 급료를 주면서도 많은 일을 시키려 하는 고용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노동력을 그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신경 쓰지 말자. 고맙게 생각하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내가 정직하게 이 일을 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그분에게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알겠다.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란 아편이다.”
공산주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포자기하도록 설교하고 또 여기서의 그들의 일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보상을 받으리라고 말함으로써 현재에 만족하게 하시는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갈
정직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 사람이 거기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은 오는 세상에서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사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간증하고 있습니까! 수년 동안 뚜렷한 인정을 받고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도 이 사실을 배려하시고 또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더 많은 것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도는 상전, 그리스도인 상전에게로 방향을 바꿉니다. 다시 그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고용인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고 또 여러분을 섬길 그들의 책임을 제대로 인식하기를 여러분이 기대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이와 같이” 그들에게 하십시오. 상전들이여, 고용인들의 복지를 적절히 배려하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재산이 위탁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관리할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고용인을 단순히 “일손”으로 취급하거나 그들을 많은 노동력의 기반으로 삼아 최대한의 일을 시키고 최소한의 임금을 지불해서는 안됩니다. 고용인들이 주 그리스도께 하듯 여러분을 섬기듯이, 여러분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공갈을 그치라.”
불친절하고 잔인하고 무례한 성격이 그리스도인 상전에게서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저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앎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고용인들과의 거래를 깨끗이 해야 합니다. 불가피하지도 않은데 그들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비위생적이고 조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도록 그들에게 강요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의 비망록에 모든 것을 적어두십니다. 여러분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자기의 삶의 대부분을 여러분에게 의존하고 있는 고용인들에게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행동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하고 계십니다.
기독교가 모든 것을 어떻게 동등하게 하는지를 보여 주십시오. 모든 차별을 없애지 않고 오직 모든 계층의 남녀들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르게 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있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여러분의 재산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쓸모 없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높은 위치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쓰지 못하면 그것은 무가치해질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그는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유익한 교훈들을 얻게 됩니까! 어떤 관계에서든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에 따라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서신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가장 높은 차원의 영적인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림을 받아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우편에 앉게 되었음을 배웠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일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듯이 이 땅에서 사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기독교가 타락한 세상에 대해 위탁받은 일입니다. 우리는 저급한 삶과 결부된 높은 진리에 대해 매우 많은 말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게 펼쳐지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내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시 119:133)라고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남편이거나 아내, 부모이거나 자녀, 고용주이거나 고용인이든지 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 각 사람이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게 하옵소서.”
만일 여러분이 지금 불신자이며, 또 언젠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순되는 삶에 실망을 했을지라도(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계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그분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도록, 믿음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도록, 더 나아가서 여러분의 여생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도록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불행의 수렁에 빠진 다른 어떤 사람의 모순되는 삶을 보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또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여러분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능력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진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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