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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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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2. 01:14 횃불/2001년

하나님의 전신갑주

(에베소서 6:13-l8)

- H. A. 아이언사이드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3~18).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대해 살펴본 대로, 그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육체적인 본성과의 싸움도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그 요구를 거부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복된 분깃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들은 전투라는 공개적인 행위와 더불어 여러가지 교활한 방법으로 이 일을 행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온갖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우리로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또 우리로 그리스도인다운 경험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를 하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것은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된 우리가 입는 옷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는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최고의 옷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이 옷을 입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옷을 입히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향해 지옥의 군대가 돌진해 오는 악한 날, 우리가 패퇴할 것처럼 보이는 그 날을 견디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여러 조각의 갑옷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등을 돌리고 적으로부터 도망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날 싸워 이기기 위해 오늘은 물러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적과 맞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등에는 갑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등을 돌리고 퇴각하게 되면, 악한 적의 날카로운 창에 우리 자신을 드러내게 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갈보리에서 성취하신 능력을 힘입어 단호히 적과 맞서게 되면 우리는 능히 대항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서게 됩니까? 단순히 우리 자신의 결심이나 우리의 어떤 선함으로 인해서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완전한 사역으로 인하여 서게 됩니다. 거기서는 적이 우리를 해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적을 만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적을 파멸시키신 그분으로 인하여 승리를 장담하게 됩니다. 거기서 사단은 우리의 복되신 분, 거룩하신 구주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주님은 사단의 머리를 밟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사단을 이미 패배 당한 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자신의 패배와 파멸이 분명함을 알면서도 이 땅에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단을 대적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즉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이것은 서양 사람들에게는 다소 어색해 보이는 표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한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편안하게 움직일 때는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지만, 여행을 하거나 어떤 싸움을 할 때면 행동이나 동작이 방해되지 않도록 허리띠로 허리를 졸라매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믿는 자로서 여러분과 나는 진리로 허리를 졸라매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른 곳에서 우리는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벧전 1:13)라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동양인들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겉옷을 단단히 동이듯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4:14)하기 위해 진리로 우리 마음의 허리를 동여매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 하기 위해 우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또 조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으로 돌아 오기를 나는 바랍니다. 때때로 이 문제에 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괴롭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내 생각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내 생각도 별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쓰여져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할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온갖 잘못된 사고방식들, 견해들, 그리고 악한 말을 통해 그는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 알수록, 적의 공격을 더 잘 대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 성경을 한 번도 통독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그들은(성경에 나오는) 족보 부분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거기까지 읽어보고는 멈춰버리고 맙니다. 더 이상 읽지를 않습니다. 족보가 실려 있는 장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들,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할 가장 아름다운 보석들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주의하지 않으면 이것들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은 여러 해 전에 앤드류 보나르(Anew Bonar)에게 들은 이야기를 말하곤 했습니다. 보나르박사는 천국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이뤄지는 사랑하는 이들의 멋진 재결합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땅에서부터 새로 온 신자가 황금길을 걸어서 갑자기 구약의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된 것을 자신의 감동적인 방식으로 묘사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들을 알아보고서는 아니, 당신은 에스겔이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 맞습니다.” 에스겔이 대답합니다.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이분은 미가, 이분은 스가랴, 아모스.”

앤드류 보나르는 말을 계속합니다.

이제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 당신은 나를 아시는군요. 내가 쓴 책을 좋아했습니까?’

책이라뇨? 그것이 무슨 책입니까?’

아니, 분명 내 책을 기억해야 할텐데?’

미안합니다만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미가가 그러면 내 책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에에····그것이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그런 책이 있기는 있는걸로 기억되긴 합니다만:

이런 책들을 전혀 읽지 않은 채 그 저자들을 만나게 될 때 여러분은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요?”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매우 분주합니다. 소설을 읽고 신문을 보는데는 많은 시간을 쓰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혀 시간을 쓰지 않습니다. 좋은 문학작품도 중요하고 신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도록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어떤 나이 많은 교인이 있었습니다. 매우 바쁜 한 그리스도인이 그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에 한 시간씩 이 나이 많은 사람의 집에 가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교재로 삼았고, 그 나이 많은 교인은 매우 흥미 있게 배웠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그 그리스도인은 잠시 다른 곳에 다녀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면서 자기 학생의 공부가 얼마만큼 진전이 있었는지 보고 싶어서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아내에게 그녀의 남편이 글을 읽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아주 잘 읽습니다.”

벌써 읽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 아주 잘 합니다.”

그는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하겠군요.”                         

그런데, 그는 오래 전부터 성경은 밀쳐 놓고 신문만 읽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영원히 계속될 유익한 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피하려고 하는 그것을 여러분은 영원토록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의의 흉배를 붙이고

이제 우리는 의의 흉배대해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주의해서 내 말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은 복된 진리입니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는 죄 대신 의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의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옷 입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입히십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우리가 입어야 할 그 무엇이 나옵니다. 사도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이사야 59장일 것입니다. 그 의는 실제적인 의를 말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59:16,17).

이사야는 여기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 메시아에 대해 말합니다. 그분은 의로 호심경(흉배)을 삼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그분의 모습과는 다른 그 무엇입니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분은 의의 흉배를 붙이셨습니다. 이처럼 여러분과 나는 의의 흉배를 붙임으로써 그분을 담도록 지금 요청 받고 있습니다.

흉배는 사람의 가슴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슴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양심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선한 양심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적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대적해 오고 또 우리의 삶에 숨겨진 어떤 죄악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넘어질 것이며 그 적을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해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이렇게 힘없이 갑작스레 무너지다니라고 말하면서 패배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런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르지 못한 양심이 이런 저런 일에 탐닉하고,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거룩하지 못한 생각과 악한 행위들이 몇 주간, 몇 달 혹은 몇 년간 그를 침략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적이 공격해 왔을 때, 의를 흉배로 삼아 옷 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슴은 다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의의 흉배를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불신자들이 알게 된다면, 여러분의 증거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친구에게 나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겠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잘 모르긴 하지만, 교회가 너에게 별 도움을 준 것처럼 보이질 않는구나.”

그는 날마다 여러분의 삶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화를 잘 내고 참을성이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열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너는 네가 나가는 교회가 좋다고 말할는지 모르나, 나는 그 모임이 너에게 도움을 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의의 흉배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싶다면 반드시 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우리의 삶은 정결해야 하고 숨겨진 죄악이나 가려진 불의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흉배가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른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실 때, 그는 그 사람을 바르게 살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칭의로 인해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발이 필요합니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린다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귀한 일입니다. 삶으로 그것을 나타내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행위가 거기에 일치하도록 하십시오 또한 평안의 복음을 전하기에 민첩한 발이 되라는 제안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최근 스페인어 번역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준비된 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복음을 따라 행하지 않고 또 능력있는 삶을 살지 않은 채, 말로만 평화의 복음을 전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욕만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방패는 갑옷 외의 나머지를 방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방패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것은 신뢰(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러분이 적을 맞서는)라는 의미에서의 신앙입니다. 청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서 있는 어떤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 나는 오래된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미 일흔 두 번이나 한 설교입니다. 이것은 거의 넌더리가 날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청중들에게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이 설교를 하겠습니다. 여러 해 전, 이 설교를 했을 때 열 여덟 사람이나 회심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이것은 좋은 설교입니다.”

마귀는 그것을 들으면서 말합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이 더 강함을 보여 주겠다.”

집회는 형편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설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수없이 여러 번 이 설교를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것은 설교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의 본문으로 몇번이나 설교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선한 메시지를 얻지 못하고, 또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한 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청중 앞에 선다면, 여러분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 교훈이 나의 가슴에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나는 이것을 이렇게 강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이제 우리의 머리를 위한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만약 내가 나 자신의 구원에 대한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있다면, 적과 마주치게 될 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주신 구원에 대한 지식을 나는 투구로 사용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내용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검은 성경이 아닙니다. 여기에 수천 개의 검이 있는데 모두 좌우에 날이 선 강한 검입니다.

말씀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두 가지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로고스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단어는 쉐마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saying)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마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여러분이 성경을 그에게 가져간다고 해서 그를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다가 을 때,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상황에 맞는 명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하면 마귀를 물리치게 됩니다. 광야에서 시험당하신 우리 주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마귀가 간교하게 다가와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4).

주님은 갑옷에서 검을 빼어 들었습니다. 사단이 이러한 유혹으로 다가올 때 그를 대적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귀는 천하 만국을 예수께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주님께서는 또 하나의 검을 빼어들고 마귀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0).

그러자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사용하여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거기서 뛰어내리라 하며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희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4:6)고 했습니다. 생명의 주님과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있는 그 성경을 인용하는 마귀의 뻔뻔스러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그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생략했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91:11).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천사들의 손에 의해 보호받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하기 위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성경의 다른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셨느니라”( 4:7).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여러분에게 다가올 때, 여러분은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구나라고 알게 되어 마귀를 대적할 말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그분의 복되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 가지 갑옷을 적절하게 입었을 때, 이 모든 것 외에 빠뜨리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번연(Bunyan)은 그것을 실제로 갑옷의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외에 모든 기도라 불리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는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방편입니다.

다음 장에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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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