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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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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0. 14:55 말씀 안으로

Agape Love (3)
아가페 사랑 (3)

구스타프슨, 월터

Love that Pleases God

“Seeketh not her own.” Love is concerned for others and is truly unselfish. “Is not provoked.” There is no Greek word for “easily” in the verse. The KJV lets us off easy by adding the word “easily.” A person governed by love still has feelings but he never has a loss of self-control. The ninth characteristic of the fruit of the Spirit is temperance or self control.

 

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랑

기 것을 추구하지 않으며.”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염려하며 참으로 이기적이지 않다. “성내지 아니하며.” 이 구절에 쉽게라는 헬라어 단어는 없다. KJV 쉽게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우리에게 쉽게 풀어준다. 사랑에 의해 지배 받는 사람은 여전히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결코 자기 통제를 잃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의 아홉 번째 특징은 절제 또는 자기 억제이다.

 

“Taketh not account of evil” (RV). That is a significant change from the AV. In Matthew 18:22 (in answer to Peter’s question in the previous verse), the Lord Jesus is discouraging keeping any accounts of evil by saying “I say not unto you until seven times: but until seventy times seven.” We should never keep account of evils, with a view toward paying back evil when we have the opportunity. “The discretion of a man deferreth his anger; and it is his glory to pass over a transgression” (Prov 19:11KJV). It may be all right to remember how someone has acted in order to better be able to get along with that person, but it is not right to remember things with an unforgiving spirit. There are some things that we should forget. There is a morality connected with our memory. Love is generous in forgetfulness.

 

악을 말하지 않으며”(RV). 그것은 흠정역에서 중요한 변화이다. 18:22(이전 구절에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악한 일을 하는 것을 꺼리신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악을 갚겠다는 관점에서 결코 악을 감춰서는 안된다. “사람의 신중함이 그의 분노를 늦추며 범법을 간과하는 것이 그의 영광이니라”( 19:11KJV). 그 사람과 잘 지내기 위해 누군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괜찮을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 정신으로 사정을 기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잊어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우리의 기억과 연결된 도덕성이 있다. 사랑은 건망증에 관대하다.

 

“Rejoiceth not in iniquity” (or unrighteousness). Love does not get joy from the wrongdoing of others. In Hebrews 1:9 we read about our Lord Jesus, “Thou hast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iniquity; therefore God, even thy God, hath anointed thee with the oil of gladness above thy fellows” (KJV). He loved righteousness with a perfect love, and hated iniquity with a perfect hatred. May the Lord help us to be more like Him. “Having therefore these promises, dearly beloved, let us cleanse ourselves from all filthiness of the flesh and spirit, perfecting holiness in the fear of God” (2Cor 7:1KJV). There is nothing like the fear of God to regulate our thinking. No one knows what we are thinking, except the Lord.

 

불법을 기뻐하지 않으며”(또는 불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기쁨을 얻지 않는다. 히브리서 1:9절에서 우리 주 예수님에 관해 읽는다.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기름으로 주에게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높이셨나이다”(KJV). 그는 완전한 사랑으로 의를 사랑했으며, 완전한 증오로 불법을 미워했다. 주님께서 그분을 더 닮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KJV). 우리의 생각을 조절하는 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만큼 좋은 것은 없다. 주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모른다.

 

“But rejoiceth in the truth.” Love and truth rejoice together. What satisfies divine love satisfies divine truth. Righteousness and truth are linked together as well in Ephesians 5: 9.

 

진리를 기뻐하며.” 사랑과 진리는 함께 기뻐한다. 신성한 사랑을 만족시키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만족시킨다. 의와 진리는 에베소서 5:9절에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Beareth all things (RV margin: “cove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and endureth all things.” The last four things all go together for they all end with the phrase, “all things.” Love does not unnecessarily expose. (Of course, love will expose anything that needs to be dealt with judiciously. The previous characteristic makes that plain.) “Believeth all things” does not mean that love is gullible, but that it puts the best possible construction on every word or action. What does love do when the facts show that it can no longer believe the best? “It hopeth all things.” Love hopes for the best. What does it do when its hopes are dashed to the ground? “Endureth all things!”

 

모든 것을 참으며(RV 난외주: “모든 것을 감싸줌”)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마지막 네 가지는 모두 함께 가기 때문에 모든 것이라는 문구로 끝난다. 사랑은 불필요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은 현명하게 다루어져야 할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이전의 특성이 그것을 명백하게 한다.) “모든 것을 믿으며는 사랑이 속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어나 행동에 최상의 구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더 이상 좋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사랑은 무엇을 하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바란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소망한다. 그 소망이 땅에 떨어졌을 때 그것은 무엇을 하는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And now abideth faith, hope, and love, these thre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v13). The Greek word for “now,” can have a temporal meaning or a logical meaning, bringing the whole argument to a conclusion as it does here. “Now these things have been shown to be” (Alford).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13). “이제라는 헬라어 단어는 일시적인 의미 또는 논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여기에서와 같이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모든 것들이 나타났다”(알포드).

 

It is not 100% true that, at the Rapture, faith will give place to sight, and hope will be emptied in delight. It is true that we will no longer have the testing of faith, but there will still be room for perfect obedience and trust in God. It is true that we will no longer hope for our glorified bodies, for we shall all have them, but all of God’s purposes will not come to fruition the moment we have our glorified bodies. There will still be room for the exercise of hope as we look forward with joyous expectancy to the certain fulfillment of God’s plans. We will still remain finite and dependent on our infinite God. Therefore, faith and hope, as well as love, will abide eternally. Faith is trust, entire and undoubting. And hope is anticipation certain to be fulfilled. Hope will never cease to catch new perspectives of glory. The glories of heaven are inexhaustible!

 

휴거에서 믿음은 눈에 띄게 될 것이며 소망은 기쁨으로 사라질 것은 100%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믿음의 시험을 받지 않을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신뢰할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영화롭게 된 육체를 소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것들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롭게 된 몸을 가진 순간에도 하나님의 모든 목적은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하게 성취하는데 즐거운 기대를 기대하면서 소망을 행사할 여지가 여전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채로 우리의 무한한 하나님께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 사랑은 영원히 거할 것이다. 믿음은 신뢰이며 전체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망은 성취될 것으로 확신한다. 소망은 영광의 새로운 시각을 포착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영광은 무궁무진하다!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Verses 1-3 show that gifts without love are valueless; verses 4-7 show that love, even without “gifts,” is still valuable. In verses 8-13, while gifts are transient, these three will abid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Some gifts are greater than other gifts but love is greater than the greatest gifts.

Not only greater than the passing things,
Also greater than the permanent things.
Not only the greatest thing on earth but also
The greatest thing in heaven.
Not only the greatest thing in time but also
The greatest thing in eternity.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1-3절은 사랑이 없는 은사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4-7절은 사랑이 은사들없이도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13절에서 은사들은 일시적이며 이 세 가지는 지속하게 될 것이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어떤 은사들은 다른 은사보다 크지만 사랑은 가장 큰 은사보다 더 크다.

지나가는 것보다 더 큰 것뿐만 아니라 
영구적인 것보다 더 크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이다.
시간 안에 가장 위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히 있을 가장 위대한 것.

 

Why is Love the Greatest?

Love is an end in itself. Faith and hope are means of attainment, but love is attained. Faith and hope belong to the race, but love is the prize. We cannot rest on faith and hope without them being diminished, because our eyes would be on the means instead of the end. But we can rest in love, as God Himself does (Zeph 3:17).

 

왜 사랑이 가장 위대한가?

사랑은 그 자체로 끝이다. 믿음과 소망은 성취하는 수단이지만 사랑은 성취된다. 믿음과 소망은 경주에 속하지만 사랑은 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줄어들지 않고서는 믿음과 소망에 안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끝이 아니라 수단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자신처럼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3:17).

 

Love is sacrificial. We do not and cannot exercise faith and hope for another, only for ourselves. Our faith and hope in God brings us spiritual gain, but love is for others. We cannot bestow on others our faith or hope, but we can bestow our love.

 

사랑은 희생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믿음과 소망을 행사할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우리에게 영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이나 소망을 줄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사랑을 베풀 수 있다.

 

Love is of the divine essence. Faith and hope are human, but love is divine. You cannot describe God in terms of faith or hope. God, the all-knowing and all-powerful, does not trust, and God, the all-possessing, does not hope. But you can describe God in terms of love for “God is love” (1John 4:8, 16, KJV). Faith and hope are things “to have,” but preeminently, love is something “to be.” “God is love; and he that dwelleth in love dwelleth in God, and God in him” (v16, KJV). What a privilege we have of manifesting the divine nature!

 

사랑은 신성한 본질이다. 믿음과 소망은 인간에게 있지만 사랑은 신성하다. 믿음이나 희망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수는 없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은 소망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16, KJV) 대한 사랑의 측면에서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다. 믿음과 소망은 가지는 것이지만, 탁월하게, 사랑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6KJV). 신성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특권인가!

 

Considering chapter 13 we realize we have all come short, but we are thankful for the measure in which we know the preciousness of love, the practices of love, and the permanence of love. Realizing human failure, the apostle writes, “Follow after love”(1Cor 14:1KJV). The word denotes a passionate devotion and a determined effort. We likely have not attained to the perfection of a love-mastered life. But we can and must “follow after love.”

 

13장을 생각하는 우리는 모두가 부족함을 깨달았지만 사랑의 소중함, 사랑의 실천, 사랑의 영속성을 아는 척도에 감사한다. 인간의 실패를 깨닫고 사도는 이렇게 적는다, “사랑을 따르고”(고전 14:1KJV). 그 말은 열정적인 헌신과 단호한 노력을 나타낸다. 우리는 사랑이 넘치는 삶의 완벽함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따라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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