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와 영적부흥
존 그란트
안녕하십니까? 짧게 세 군데 말씀을 읽겠습니다. 먼저 열왕기하
1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역대하 29:1~4
1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야라 스가랴의 딸이더라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원년 정월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편 광장에 모으고
역대하 30:1
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어둡고 나쁜 상태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둘로 나눠진 이후 약 250년이 지났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남방 유다를 대적했습니다. 우리는 북방 이스라엘 왕들을 조사해보면 그들 중에는 한 명도 의로운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방 유다 왕들 중에는 선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 가장 좋은 것에서 몇가지 교훈을 얻겠습니다. 남방 유다 왕들 중에 네명은 특별히 선했습니다. 그 네 명들을 그 조상 다윗의 길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좋은 왕이었습니다. 왕 아사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아 왕은 선한 왕이었습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히스기야도 좋은 왕입니다. 다른 왕들을 이 네 왕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선한 왕 히스기야가 다스릴 때 일어났던 부흥에 대해서 오늘밤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대해서 잠시 보겠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아버지가 남긴 그 상태가 매우 어둡고 나쁜 상태라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그는 많은 하나님의 법들을 어겼습니다. 역대하 28장에 보면 그는 유다의 모아놓은 부들을 없앴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문을 닫고 그리고 성전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는 다메섹 우상 제단의 모양을 본 따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밖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28장 27절에 보면 이 악한 왕의 행한 일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워낙 나빴기 때문에 왕들이 묻히는 곳에 묻히지 못하고 성밖에 묻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어떻게 좋은 왕국이 있겠습니까? 이것을 조사해보면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집에서의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제단을 살펴보면 제단은 식었습니다. 거기는 제물이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예배 없이 지냈습니다. 예배 없는 생활은 만족이 없습니다. 의로운 것을 거절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식은 제단이 있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모이는 제단이 이와 같이 식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예배가 없었습니다. 또한 빛이 꺼졌습니다. 예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빛도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진리의 빛이 없다면 재앙일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그릇들은 부숴졌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장의 일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빛이 없고 예배가 없고 제사장들의 활동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전 뜰은 비었습니다. 아무도 거기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교제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성전에 모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성전 문이 닫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슬픈 상황이라고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이러한 상태를 봅니다. 예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빛이 없습니다. 교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근도 없습니다. 또한 영혼들을 위한 제사장들의 활동도 없습니다. 여기서 부흥을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섬김도 없습니다. 남방 유다 나라는 경고 받았음을 여러분에게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이사야가 약 30년간 예언을 한 시기였습니다. 또한 호세아가 히스기야 왕 막바지에 예언자로서 동참을 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사야 7장에 나오는 그 기록일 듯싶습니다. 아하스는 이사야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를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경고를 받았습니다. 선지자가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경건하지 않은 가운데 계속 거했습니다. 왕도 그러했습니다.
부흥의 시작
히스기야 왕 때 큰 부흥이 일어난 것을 보고자 합니다. 그가 즉위할 때 젊었습니다. 그는 25세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분들에게 이 나이가 격려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젊었을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25세일 따름인데도 말이죠. 그는 유다의 영적인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들이 히스기야가 무엇을 했는지를 알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에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는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가 취한 정확한 발걸음을 보고자 합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산당을 짓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을 없앴습니다. 또한 주상들과 우상의 형상들을 부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숲 속에서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없앴습니다. 여기서 슬픈 일 중에 하나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그 놋뱀을 지금까지 우상처럼 사람들이 숭배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가져다가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북방의 앗수르가 유다에 대해서 협박을 했지만 앗수르를 거역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흥을 꾀했습니다. 하나님의 옳은 길을 위해서 옳지 않은 것들은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은 없애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우상들은 보통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 마음 속에 우상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 이외의 것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왕국 안에서 이러한 것들을 모조리 없애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통치 원년에 이것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다시 불을 켰습니다. 유다에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마음이 멀어졌음을 느낍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런 경우에 무엇을 먼저 해야 되겠습니까? 완전하게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없애야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히스기야는 해야 할 것을 알았고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두번째로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무엇을 원했겠습니까? 그는 이 장에서 보면 여러 그룹들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5절에 보면 그는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에게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9장 9절에 보면 그는 방백들에게 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백성에게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흥이 자그마한 지역에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온 나라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들이 오늘 모임을 통해서 이것에 대해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모든 개인 성도 한 분 한 분은 하나님의 일에 동참을 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모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에게 부흥일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부흥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것들을 모든 사람에게 원했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말한 것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존귀한 것들을 위해서 부름받음
11절에 여러분은 레위인들에게 말한 놀랄만한 것을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택한 것을 기억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손에다가 섬길 것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어렵더라도, 문제가 있더라도, 히스기야는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하신 것들을 그들은 했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위대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존귀한 것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의 주님의 부르심도 존귀합니다. 우리는 하늘 성소의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을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왕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모임 안에 모든 성도들이 일을 한다면 그것은 복될 것입니다. 선택된 택함 받은 종들이 존귀함을 그는 일깨웠습니다.
또한 15절에서 귀한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성결케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성결케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구별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결이 무엇인가를 여러분이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 성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성결인 것입니다. 주님께 매료되어서 세상 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택함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결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우리들의 섬김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또한 성결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제사장으로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우리의 예배에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을 성결케 한대로 우리들 스스로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 그래서 우리들이 택함을 받았고 성결케 됐습니다.
16절에서 세번째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을 깨끗케 했습니다. 성전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우상과 우상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끌어내서 깨끗케 했습니다. 이들을 택함받아 성결케 된 다음에 매우 바빴습니다.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깨끗해졌습니다. 이들이 이것을 함에 성공적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림
21절에 가면 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택함을 받았고, 성결케 되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분리되었고, 깨끗하면서 활동적이었고, 지금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가 제자 되는 길입니다. 왕은 레위인들과 백성들에게 동참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한 예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성전이 깨끗해지자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깨끗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이 깨끗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의 예배에서 세가지를 여러분들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세가지 놀라운 것입니다. 첫째로 이 제사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주목하기 바랍니다. 21절에 보면 그들이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 27절에 보면 그 다음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레위기 1장으로 가면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첫번째 제사가 언급된 것이 번제입니다. 네번째 언급된 제사가 바로 속죄제입니다. 왜 순서가 바뀌었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번제 전에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 분명히 순서가 다릅니다.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 용서에 관한 자각이 먼저 있었습니다. 한편에서는 성전을 깨끗케 하고 한편에서는 거기에 걸맞은 상태가 요구되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원칙입니다. 내 삶 속에서 어떠 어떠한 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임 안에서는 이것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일은 하고서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감동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죄용서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번죄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거룩합니다. 제사장들이 가죽을 빼고는 얻을 몫이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번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인데 한가지 예외로 가죽만 예외였습니다. 누가 이 가죽을 얻겠습니까? 그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이 그 가죽을 얻습니다. 이것은 좋은 영적인 원칙입니다. 가죽은 그 제물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황소를 보면 그 가죽을 통해서 황소의 특징을 압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가죽을 보면 그렇게 압니다. 그래서 가죽은 그 동물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그 제물의 특징을 띄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내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참됨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 다음에 우리에게 한 특징이 띄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치 번제를 드린 제사장이 그 가죽을 얻듯이 말이죠. 무엇 무엇을 행하게 되면 제단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특징을 띄게 됩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에 많이 참가하면 참가할수록 우리의 특징은 더욱 거기에 걸맞은 특징을 띄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하게 레위기 1장에서 얻는 교훈입니다. 나중에 레위기 1장을 보게 되면 그 가죽을 제사장이 얻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흥 때에 속죄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다음에 번제가 왔습니다. 이 백성들의 부흥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들이 드린 것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배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를 드립니까? 예배는 주일날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떡을 떼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주중 매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든 것을 예배를 드리는 자세로 행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아니면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라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도 하나님께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자유시간일지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러한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물의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 예배 중에 두번째를 여러분이 주목하실 것은 28절에서 그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30절에서는 그들이 시로 여호와를 찬송했습니다. 예배는 찬송으로 연결이 됩니다. 예배드리는 마음은 찬송하는 마음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충만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이 찬송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지역모임에서 예배가 있고 교제가 있고 그리고 찬송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무도 일찍이 이것을 끝내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계속했습니다.
예배의 비용
이들 예배 속에 세번째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31,32,33절에서 발견합니다. 많은 제물이 드려지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원하는 자는 또한 번제물을 가져오니’ 했습니다. ‘소가 육백이요 양이 삼천이라’라 했습니다. 34절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습니다. ‘제사장이 부족하여 그 모든 번제 짐승의 가죽을 능히 벗기지 못하는 고로’ 했습니다. 만약 모임에서 이런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하는 모든 마음을 능가하는 예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목할 것은 제물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값없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이 비용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그기는 반드시 비용이 따릅니다. 이것은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값을 위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그 비용이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제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배를 위해서는 비용이 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만찬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주 중에 성경을 전혀 읽지 않고, 내 시간에 아무렇게나 쓰고, 그러면 나의 예배는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께 시간을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리고 그렇다면 우리들의 예배는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와 같이 힘있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36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백성으로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서 예비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 개개인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일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아마 부흥을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준비시킬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월절이 지켜짐
이제 30장으로 주목을 돌리고자 합니다. 여기는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는데 무언가 하나가 빠졌습니다. 우리가 매주 떡을 떼지마는 무언가 빠진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는 자가 침례를 받지마는 무언가 빠진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빠진 것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알았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잊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당시에 유월절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왜 이것을 기념하지 않았겠습니까? 29:17에 보면 그 이유를 알 것입니다. ‘정월 초하루에 성결케 하기를 시작하여 그 달 초팔일에 여호와의 낭실에 이르고’ 그들은 팔일동안 계속했기 때문에 정월 십육일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에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사실을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지키는 것을 그만 놓쳤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폈습니다. 그기에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 대답을 얻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지키는 것을 놓쳤는데 정월이 아닌 그 다음달에 지키는 것이 성경에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유월절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런 일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30장 초반에 보면 모든 백성들이 유월절 지키는데 오기를 원했습니다.
이 유월절에 있어서 네가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에게 초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두 지파만 초청된 것이 아니라 북방 열 지파에게도 지파에게 초청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에 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먼저 성결케 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에 대해서는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와 같이 모이도록 말씀을 따라서 부름을 받습니다. 모든 부름 받은 사람들은 주님을 기억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먼저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말씀을 순종한 다음에 그런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면 우리들은 그 사람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한 것은 모든 사람이 오도록 초청했습니다.
두번째로 이 부름은 성경적이었습니다. 성경 가운데 정월 달이 아닌 다른 달에 유월절을 지킨 것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민수기 9장에서 여러분이 발견할 것입니다. 민수기 9장 10,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인하여 부정케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든지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이월 십사일 해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그들이 성경을 순종하기를 원했다면 우상을 버리고 유월절 지키기를 결정하고 이제 이월 십사일에 유월절 지키는 것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원칙이 이와 같이 실제적입니다. 우리들에게 같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 침례 받기를 바라고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가 주 예수님을 기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이 부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역대하 30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합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저희로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일심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이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나누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들의 마음을 일심이 되게 했습니다. 그는 성경방식대로 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데 예루살렘에만 제발 오시오’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되기 위해 오시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친구가 됩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목적은 한 마음이 되며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으로 말이죠. 많은 사람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서 보니까 예배가 없고 일할 데가 없습니다. 또한 성전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따라서 북쪽이나 남쪽이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25절에서 이월 십사일에 유월절 양을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을 백성들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순종했습니다. 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부끄러워하여’ 했는데 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데도 부끄러워했습니까?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우리의 순종이 보잘것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접근하면 할수록 내가 작아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더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다가가는 것은 내가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그렇게 했기 대문에 그들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 다가가면 갈수록 나 자신은 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완전함을 알면 알수록 나의 불완전함을 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자매들과 비교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비교하면 내가 더욱 더 실패한 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유월절의 결과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21절에 보면 큰 찬송이 있었습니다.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 찬송했습니다. 이 찬송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이 찬송이 매일 커졌다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큰 찬송이 계속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찬송만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기뻐했습니다. 기쁨은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찬송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마음 속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또 다른 교훈이 있습니다. 이 유월절이 7일 동안 행해졌습니다. 7일이 끝난 후에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피차간에 교제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으로 찬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또 7일간 여기 머물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합쳐서 14일간이나 지켜졌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교제하면 그것을 복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내일아침까지 있겠다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여러분에게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날 떡을 뗀 이후에 또 두 시간 더 합시다. 아마 여러분이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또 다른 7일을 머물렀습니다. 간단한 교훈은 이렇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주님의 교제를 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차갑다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해야 될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마 집회가 끝난 이후에 집으로 빨리 갈 것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교제를 즐기려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14일간이나 찬송과 교제를 누렸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이런 큰 기쁨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그랬습니다. 26절에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약 300년 동안 이런 희락이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부흥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전 나라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 모임에서 이것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부흥을 먼저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모임의 부흥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왕은 전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속해 있는 모임에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것에서 두 세가지 교훈을 더 얻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제 영적인 부흥은 완성된 것이고 희망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우리 주변에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말이죠. 또한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올바르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죠. 어떤 경우에 분열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떤 높은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모임에 분열의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 장본인이라고 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가 젊었을 때에 이것을 했습니다. 닫혀진 하나님의 집에서 말이죠. 하나님의 집에서 찬송이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빠르게 이 영혼들이 일어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31장에서는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가서 나라 전체에 있는 우상들을 깨트리고 깨끗케 했습니다. 이 영적인 기쁨이 모든 백성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경험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저녁 저는 영혼의 부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임이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제가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보호되기를 바라면서 보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내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택함받고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와 주님의 종으로서 활동적이기를 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에 기쁨이 있게 하기 위해서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찬송으로 가득 차기를 위해서 말이죠. 히스기야는 자기 할아버지인 다윗을 본받아서 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싸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흥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32장을 보면 사단이 승복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부흥되게 되면 사단을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기쁨을 없애려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들의 대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들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게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찬송으로 충만되면 다른 성도들에게도 교제에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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