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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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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같은 제사장

이번에는 베드로전서 2장 전체를 통해서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먼저 1장의 제목을 붙인다면 거룩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함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지요. 1 1~10절까지를 건강한 성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1장이 거듭남에 관련된 것이라면 18절에서 보게 되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 너희가 거듭났다고 하는 말이 또한 나옵니다. 거듭남 사람들은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래서 2 10절까지를 그것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먼저 1~3절을 다루겠습니다. 1장에서 먼저 여러 곳에 흩어진 무리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읽게 되면 유대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1~3절까지는 거듭난 사람들이 무엇으로 양육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먹이지 않으면 양육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건강하고 건전한 음식을 먹게 되면 자라게 됩니다. 여러분은 항상 성숙되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양육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2,3절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먹여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먼저 1절을 보게 되면 이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특징이 됩니다.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먼저 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옷이나 무엇인가를 벗어서 제쳐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옷을 벗게 되면 옆에 놓게 됩니다. 더 이상 이런 것들을 보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 옷을 벗고 나면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죠. 옷은 성경 가운데서 보통 그 사람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더 이상 이전의 특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그런 것들로 먹지 아니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들이 먹는 것입니다. 마치 옷을 벗듯이 이런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더 이상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 어떤 옷을 버려야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먼저 악덕이라는 옷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악한 생각과 악한 말을 말합니다. 그리고 궤휼이 있는데 이것은 교활한 것이요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뜻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라는 것은 질투를 말하죠. 그리고 비방하는 말은 단순하게 보면 남을 나쁘게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속받은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것들을 옆으로 제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것들로서 먹고 삽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사랑합니다. 이런 것을 갖고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사라고 다음에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런 것들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들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옆으로 제쳐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하게 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먹어야만 합니다. 모든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궤휼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외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2절 같은 것을 먹여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순전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순전한 우유를 말합니다. 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도가 그대로 유지된 우유를 말합니다. 그기에 독이 들어가지 않은 우유를 말합니다. 그래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신약 가운데서 유일하게 여기서만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먹어야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마치 갓난아이들같이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늘 갓난아이들 상태에 머물라 하는 뜻은 아닙니다. 갓난아이 이후로 여러분들은 점점 더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식욕은 갓난아이들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내가 식욕이 없다면 전혀 성장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성장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 식욕은 갓난아이와 같은 상태를 늘 유지해야 합니다. 갓난아이들 같은 이 식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갓난아이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압니다. 언제 먹어야 하는지 압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압니다. 성도들께서는 성경을 이와 같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어야 되고 먹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갓난아이들은 때가 되면 언제든지 먹고자 합니다. 더 많이 먹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식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들 같이 식욕을 늘 유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만큼 그렇게 먹고 있는지 제가 잘 모릅니다. 매일 읽으십시오. 그리고 알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 주님께서 축복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 여러분들은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도들의 성장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실 것을 제가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강한 성도가 되어서 일을 잘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실 것입니다. 3절에서 사도가 말씀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맛보게 되면 식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맛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자 하는 식욕을 일으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시고 자비롭다는 것을 알게 되면 식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인자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먹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하는 말을 기록하였습니다. 제가 어저께 말씀을 드리면서 베드로의 천로역정이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 약속된 기업이 1장에 나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넘어왔듯이 우리들은 주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것은 없습니다. 왜 세상의 것을 먹지 않아야 합니까? 세상의 음식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먹는 음식은 마치 만나와 같은 음식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음식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만나라 할만합니다. 만나는 성경 가운데서 주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세상 가운데는 없는 메뉴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맛보았다는 것은 마치 주님을 맛본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맛보는 데는 하나의 주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맛보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식욕을 주고, 또한 그 성경이 우리로 주님을 더 맛보게 욕구를 일으키고, 그리고 더 크게 주님 자신을 맛보게 하고자 식욕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큰 식욕을 일으키게 되면 그것은 성경을 더욱더 많이 맛보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하늘이 주신 식단에 있는 메뉴입니다. 이 성경을 보게 되면 그 말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영국에는 나쁜 것에 탐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중독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 수 없는 것에 중독되어서는 안되고요.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그것에 중독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3절은 훌륭한 소개의 말씀이 됩니다. 성경에 대한 놀라운 식욕, 그것을 맛보게 되면 더욱 더 주님에 대해서 맛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욱 더 먹고자 하는 식욕을 일으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소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소라고 하는 곳은 희생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여기서 성소에 관해서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이 땅에 성소가 없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라는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성소가 있겠습니까?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4절에서 그 답이 나옵니다.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물리적인 장소가 있었으나 저희들에게는 사람이 하나의 장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장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성전이 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산 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기에 있습니다. 이 성소가 영원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 내부가 성소와 같습니다. 산 돌이십니다. 여기서 또한 그리스도를 요긴한 모퉁이 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주의하실 것은 이 돌은 사람들에게는 버리움을 당했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8절에서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로 되어 있는데 사람들에게는 버리움을 당했으나 하나님께는 시험한 돌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돌을 자세하게 조사했는데 우리는 거절하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돌이었습니다. 보배롭다는 말이 세 번 정도 이곳에 나타납니다. 4,6,7절 이 세 곳에서 보배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어떤 성전이나 성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그 자체에게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5절에서 너희가 산 돌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 놀라운 집은 살아있는 돌로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하나의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시고 우리도 산 돌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분의 특성을 우리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를 닮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동질입니다. 이 성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분이 바로 요긴한 모퉁이 돌이고요(6) 주님께서 그 집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무너지겠지요. 그런데 그 벽돌들은 산 돌인 성도들입니다. 5절을 보면 우리가 집을 구성한다, 우리가 제사장이다, 우리가 희생을 드린다. 5절에서 이것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말씀 드려볼까요? 너희도 산돌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제사를 드릴은 희생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형제자매들이 유의하셔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은 모두 제사장입니다. 어떻게 침묵하는 사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자매들은 침묵하는 제사장이라면 형제들은 말씀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각각 개별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사고를 옮겨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라는 주제 외에는 우리들에게 없습니다. 각각의 성도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물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기도에 관한 제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들의 찬송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찬송은 예배입니다. 이와 같이 찬미의 제사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돈이라는 물질(제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것을 신약성경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제사라는 의미가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제물입니다. 우리들의 찬송, 우리들의 돈, 우리들의 몸, 이러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5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라 했는데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9절에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성소에서 제사드릴 수 있는 구별된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부정하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는다고 하는 것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합니다. 여기 5절에서는 모든 성도 개개인들이 하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특성을 지닌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 베드로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예배와 찬송을 주님께 드립니다. 6절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기를 요긴한 모퉁이 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8 16절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급절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성장과 앞으로 나아감과 그리고 예배가 나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성장하게 되면 조금 더 많이 예배하고자 할 것입니다. 어떤 한 건물에 예배드릴 때 음악이 흐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가운데서의 이상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단순히 자기 자신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드립니다. 우리들의 시간을 드립니다. 우리들의 지식과 모든 지적인 것들을 드립니다. 이것이 모두 예배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성도들임을 잊지 맙시다. 이것에는 희생이 지불됩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주님께 가정 좋은 것을 드립시다. 두번째 좋은 것은 안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정한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좀더 진행하겠습니다. 7절에서 보겠습니다. 여기 관심을 집중하게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돌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취급을 받았습니까? 여기서 세상이 주님을 대하는 것과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버린 모퉁이 돌입니다. 이 뜻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자세하게 조사해보고 난 다음에 가치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으므로 버리겠다 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8절에 보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습니다. 7절과 8절이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부딪히는 돌은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말한다면 반석은 크고 넓은 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께 걸려 넘어졌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요긴한 모퉁이 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세상가운데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유명하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그를 멸시합니다. 또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부딪히는 돌이 우리들에게 반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는 주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으실 그러한 제물을 가지고 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물을 가지고 나아올 때 각각 자기의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어오는 3절은 매우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이점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명기로부터의 인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7 7절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운 특권을 지닌 놀라운 백성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특히 젋은이들은 선택 받은 자들임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성도들은 택하신 족속이었습니다. 놀라운 특권의 이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제가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이라고 불리는 성경가운데서 첫번째 인물이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서 그 인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로잡혀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를 구출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을 만났습니다. 멜기세덱이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18절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불리웠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이 사람이 한 행동이 무슨 행동입니까? 아브라함을 강하게 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소돔왕을 맞설 수 있는 강함을 주었습니다. 소돔왕이 말하기를 원하는 것을 다 가지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거절했습니다. 21절에서 소돔왕이 말한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너는 물품을 가져가고 나는 사람을 택하겠다. 이것은 사탄이 늘 하는 짓입니다. 너는 물건을 가져가고 나는 사람을 가져 가겠다. 사탕은 사람을 빼고 물건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당신으로부터 한가지도 취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너로부터 나온 것은 하나라도 내가 취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왕 같은 제사장과 똑 같은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14장으로부터 한가지 특징을 이끌어내겠습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권은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훨씬 월등한 것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실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19). 성경의 원리가 이러합니다. 축복을 받는 사람이 축복을 하는 사람보다 높을 수 없다는 원리가 있습니다. 축복하는 사람은 받는 사람보다 더 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를 언급해 보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20). 모든 것에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이유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가장 믿음이 좋았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 다른 믿는 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멜기세덱은 또 다른 성도였습니다.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진 지역입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들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것은 멜기세덱과 같은 왕 같은 제사장임을 의미합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왕이시요 제사장이십니다. 우리의 앞에 있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누가 왕이시면서 제사장일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바로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왕이 갖고 있는 것을 우리도 가집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했습니다. 이 제사장직에 대해서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습니다.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의 날이 다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결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영원한 제사장들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그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이 제사장직을 받았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아론의 제사장권으로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제사장직은 아론은 결코 얻을 수 없는 권리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대제사장께서 여러분과 같은 제사장들을 돌보십니다. 그 슬픔을 굽어보십니다. 어려움을 알아보십니다. 이곳으로 제물을 가져갑니다. 여러분들을 체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성소 가운데서 행해집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렇게 모일 때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좀더 다른 일들이 있습니다.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9).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소유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소유된 백성입니다. 성전은 결코 어두운 적이 없습니다. 성막에는 구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결코 어둡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셨다 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덕을 선전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맛보지 못하고서야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여러분들은 맛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사항입니다. 그 제사장들은 타락하고 악하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다. 여러분들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것을 믿음으로 성전을 갖게 되었다. 이 성전을 여러분들 자신이 구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주님께서 영원히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각각 개개인이 주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주님께서는 그와 같이 우리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찬양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주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예배 행위를 주님께 합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 1 29 부산 명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