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행인의 삶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구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긴 기간 동안 여러분들이 집중하고 계시기에 힘드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제 음성을 듣기에 조금 피곤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부터 25절까지입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기 두번째로 보고자 하는 도입 부분에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성도들은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두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2절은 도입부라 합니다. 13~17절은 시민으로서의 성도들을 말씀합니다. 18~20절은 종으로서 우리를 다룹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땅에서의 시민으로서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 고용된 종으로서의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두 주인이 있는 셈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정부와 우리를 고용한 업주가 있습니다.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큰 예가 있습니다. 이 몇절에는 네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도입 부분을 보겠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나그네는 이곳에 그들이 속하지 아니했음을 나타냅니다. 행인은 이 사회 가운데 일부분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또 나그네는 어떤 곳으로 지나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땅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와 행인 된 자들에게 첫번째 경고가 나옵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것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거스려서 싸우는 존재입니다. 영혼을 거스려서 싸운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새로운 삶 가운데 앉아있는 즉 거주하는 것이 바로 우리 영혼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구원함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니 이 새성품에 대해서 육체가 대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날에 영광에 들어가기까지 우리 몸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번째 육체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영혼에 대해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부가 처해 있는 전쟁입니다. 전쟁이라는 말은 매우 강한 말입니다. 영혼을 향해서 강력하게 진군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의 원수는 집중하여 여러분들은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 말로 시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날 때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또한 나그네와 행인으로 지날 때 원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으로부터 공격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은 구속을 받았지만 우리들의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에 구원을 받겠지요. 그래서 구속 받은 육체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는 시험을 받고 또한 테스터를 받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정욕은 여러분의 영혼을 완전히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우리들의 원수들을 맞닥뜨림에 있어서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대적들이 누구인지를 민수기로 가서 보겠습니다. 민수기 20장 14절에 보면 맨 먼저 만났던 대적이 에돔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자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육체로부터 나오는 자연적인 성품과 관련된 것입니다. 육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원수인데 이것이 바로 에돔입니다. 두번째는 21장 1절에 나옵니다. 가나안 왕이 나옵니다. 가나안이라는 뜻은 상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물질주의적인 대적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 오늘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상고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대적입니다. 세번째 원수는 21장 21절에서 발견합니다. 아모리입니다. 가나안에서 아주 강력한 족속이었습니다. 높은 곳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높은 곳에 거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대적의 힘입니다. 높은 곳에 산다는 의미는 바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의미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지성을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지성이 바로 우리들을 공격합니다. 다음의 원수는 21장 33절에 나옵니다. 바산의 왕입니다. 바산의 왕 옥에 대해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2장 11절에 보면 강력한 경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12절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공격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 베드로가 한 말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여러분의 선행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차이점을 보고 있습니다. 뭔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분들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실 때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준비하여야 합니다. 권고하시는 날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실 때에 그분께서는 복음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 그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입니까?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어. 그래서 하나님의 살아계신다는 존재를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읽었어’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권고하시는 날에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가져다 주기도 하시지만 심판도 가져오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도입부입니다.
13절부터 우리가 시민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법을 어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두가지 이유 때문에 순복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징벌하기 위함 때문에, 또한 포장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정부는 이렇게 잘 하지는 않습니다만 성경가운데 있는 정부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정부는 그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시민들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서 일하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부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왜 좋은 시민이 되어야 되는 지 두가지 이유를 줍니다. 먼저 15절에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려고” 여러분들이 시민으로서의 삶을 잘 살면 무식한 분들의 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여기 입을 막는다는 흥미로운 단어가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의지적으로 침묵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선함을 보고 ‘내가 더 이상 핍박하지 말아야겠다’ 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저들을 내가 비난해도 소용이 없구나. 여기서 베드로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들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개의 입에다가 입 덮개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침묵하게 해야 합니다. 강제로 그들을 침묵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선하다면 감히 폄론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16절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 자유로서 악을 가리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는 자들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들을 괴롭게 하는 자들에게 쓴 말을 내는 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경건하게 대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종과 같이 그러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주의합시다.
어떻게 시민으로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피고용인으로 고용되었다고 생각합시다. 18절에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두가지 주인이 있습니다. 좋은 주인도 있고 나쁜 주인도 있습니다. 좋은 고용인도 있고 나쁜 고용인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좋은 주인에게만 잘 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둘 다에게 잘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완전히 다른 방식입니다. 세상은 나쁜 주인에게는 잘 순복하지 않습니다. 좋은 주인들에게만 잘 순복하고자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둘 다에게 모두 잘 순복하는 자들입니다. 먼저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일터에서 최상의 피고용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할만한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주인이 좋던 나쁘던 그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19절부터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뭔가 애매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함으로 주인이 고난을 준다면 그것은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다른 측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19,20절에서 다루는 사항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못함으로 오는 고난을 받는 것보다 착함에도 불구하고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20절에서 죄가 있어 받는 고난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매를 맞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펀치를 맞듯이 얻어 맞는 것을 말합니다. 매를 맞는 것에 대해서 두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매우 고통스럽겠지요. 그리고 많은 동정심을 발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주인이 이 매를 통하여 고통을 주면서 여러분들을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잘하고 있다면 인내를 가지십시오. 이것은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들에게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이 장의 구절들을 자세히 봅시다. 이렇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 본을 끼쳐서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고 2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했습니다. 굴욕을 당했어도 반항하지 않는 한 고난 받는 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되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그리스도의 원리를 좇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세가지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22절에서 죄를 범치 아니하셨다고, 23절에서 고난에 대해서 말하지 아니했다고, 주님께서는 아마
다시 한번 반복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9절, 7절을 따라서 4절이 오고, 그 다음에 4절을 두번이나 인용했습니다. 좀더 다르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로 이사야서 53장 처음부터 시작하는데 그 인용하고자 순서의 마지막부터 올라가고 있습니다. 9절로부터 4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사야 53장으로부터 인용하면서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23절이 말씀하는 바를 보겠습니다. 죄를 범치 아니하셨습니다. 그 입에 궤사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으로부터 인용하면서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하신 것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누가 그 입에 궤사가 있습니까? 누가 그 주님을 부인했습니까? 베드로가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그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만 우리 주인께서는 완전히 죄가 없고 흠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자신의 자질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겨야 할 것들을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의 결점을 숨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므로 말미암아 그 입에 궤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경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성숙하게 합니다.
이 장은 아주 아름답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양은 그 목자를 따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들의 목자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는 누구이십니까? 마가복음에서 5천명을 먹이실 때 그들이 음식이 없으므로 걱정을 합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음을 보고 마음에 민망해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목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 양들을 굽어 보살피시는 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그의 자취를 따라갑시다. 그분을 따라가면 그분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아무도 해할 수 없도록 그분은 잘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2장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것으로서 이렇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었습니다. 이 저주에 관해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언어가 아닙니다. 맹세라는 것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강력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주는 어떻습니까? 하늘로부터 저주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입에 궤사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울었습니다. 그 자신은 그 곳에 죄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마음이 굳어진 베드로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베드로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도 가져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전혀 놀랄 바가 못됩니다. 이런 것들을 좀 더 깊이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너무나도 많이 인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매우 피곤해 보이십니다. 여러분들의 집중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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