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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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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2. 14. 20:25 빛 가운데로 걸으며

() 본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화려하고 매혹적이고 지순(至純)한 광채로 빛을 발하는 면들을 지닌 보석입니다. 온전히 무흠하고 극히 찬탄해마지 아니할 분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창의적인 상상력을 뛰어넘는 보배요, 하늘 회랑(回廊)의 자랑이요, 모든 영적인 감화의 근원이십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의 본질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를 연구하는 학문인 미학(美學)에 의하면 아름다운 물체는 복합, 대칭, 조화, 순수, 광택, 율동, 색깔, 진실 등과 같이 인간의 마음에 기쁨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특징들을 지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아름답다는 것은, 그분께서 이들 특징들을 놀라웁게 구체화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분은 그 모든 면에 있어 뛰어나시며 어느 한 면도 결여하지 않으십니다. ()의 모든 특질들을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구현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미()의 본체를 밝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분은 아름다움자체이십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과 공통되는 면을 적어도 한 가지는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영원한 미()의 전형일뿐더러, 더 나아가 다른 모든 미()가 흘러나오는 미()의 예술적인 원천이십니다. 그분을 떠나서는 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특질 중 대칭성, 복합성 및 순수성의 세가지 특질에 대해서 상고해 보기로 합시다. 먼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거듭해서 최상급 술어들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매스컴이 광고 문구들이 이 고상한 어휘들을 부끄럽게도 오용(誤用)내지 남용(濫用)해 왔습니다. 도시 곳곳에 만연돼있는 방탕한 풍조로 인해 아무도, 전에는 위력을 지녔던 최상급 술어를 신중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술어들을 신중히 다뤄야만 합니다. 최상급 술어들은 예배에 사용되는 어휘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 술어들은 여타 사람과 사물들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실로 그러한 표현에 온전히 합하는 자만이 그렇게 묘사될 수 있는 것입니다( 45:2, 9:6).

 

균형미

균형이 잡히지 않았거나 일정한 모양 없이 덩어리진 모습은 비록 현대예술 속에는 널리 유행되고 있지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한 외양(外樣)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갓돌(돌기둥이나 돌담 따위의 꼭대기에 지붕같이 덮은 돌-역자주)의 안정감 있고 균형잡힌 모습과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48개의 우뚝 솟은 도리아식 기둥들이 훌륭한 균형미를 과시하며 이 건물의 단면(端面)과 측면에 멋을 더해 줍니다. 그리고 삼각형 모양의 페디먼트(고대 건축의 삼각형의 박공 벽-역자주)가 손상되지 않았을 때는 파르테논 신전의 길이와 폭이 케플러(Kepler)()의 분할이라고 일컬은 황금 비율을 이루었습니다. 멋과 균형을 향한 강렬한 집착으로 인해 당시의 건축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이상(理想)을 포착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의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균형미의 표준인 그리스도에 접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불완전하게나마 그분을 반영했습니다. 모든 가치 있는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파르테논 신전은 미학적(美學的)인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수학적인 균형, 비율, 밀도 및 대칭에 있어서 매혹적인 연구 대상이십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이어서 그분께서 무수히 많은 대립 개념들을 조화시키시는 방법을 개괄해 보고자 합니다.

계시록 5 5, 6절은 의도적으로 대조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파의 승리의 사자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전혀 반대되는 대상 같지만 실상 동일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무한한 승귀(昇貴)와 무한한 비하(卑下)를 아름답게 조화시키십니다. 그분은 헤아릴 수 없는 영광과 측량할 수 없는 겸비, 최고의 위엄과 뛰어난 온유, 다함 없는 공의와 한량없는 자비, 그리고 충만한 자기 만족과 온전한 의뢰 사이에 훌륭한 균형을 이뤄내십니다. 극도의 빈곤과 극도의 풍부가 예속과 우주적인 통치처럼(2:5~11) 동일한 지렛대 위에 나란히 얹혀있습니다.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증오가 이렇게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1:9). 그분은 상반되는 속성들을 결합시키시며, 그 결과로 이뤄진 균형은 그분을 심히 아름답게 드러내 줍니다.

 

복합미

어떤 물체가 접촉하는 모든 물체와 조화로이 영향을 주고 받을 때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삼각형의 면과 모서리들은 서로 공평한 공간을 차지하는 까닭에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한편, 관계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아름다움도 복잡하고 심오해 집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여럿이 한 가락에 맞춰 소리를 내는 까닭에 단순한 동일성의 미()를 드러내 줍니다. 그러나 4부로 된 화음은 보다 정교한 미()를 보여 주는데 이는 그것이 네 가지 가락을 동시에 조화로이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베에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보다 섬세하고 만족스럽습니다. 전 악보에 걸쳐 작곡자의 예리한 재능이 화음 법칙에 맞춰 복잡하고 정교한 악상 부호들을 조립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작곡 과정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가 놀랍도록 아름답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그러한 정교한 아름다움의 실례를 보게 되면 단순한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단조로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감상한 후에는 나무 공작품을 버리게 되며, 멜빌(Melville)의 작품 모비딕을 읽고 난 후에는 만화책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작품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심오한 인간의 작품들도 복합미의 표준 앞에서는 초라하고 비천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미()의 길이를 재보고자 할 때 우리는 그분의 미()의 바다는 끝이 없음을 발견케 됩니다. 한눈 팔지 않고, 깊은 관심 가운데 그 깊이를 조금씩 알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그 정교함에 탄성을 발하게 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속성들을 짜맞추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눈부신 세공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분의 성육신 사실을 통해 이 만족케하는 복합성에 대해 잠시 살펴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히 별리되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둘을, 창조되지 않은 자이자 창조된 자요, 말씀이자 육신되신(1:14) 자신 안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합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하나님과 인간의 혼성물(混成物)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두 속성을 혼합하거나 뒤섞음 없이 신성과 인성을 결합시키셨습니다. 그 두 속성이 이성의 이해를 초월한 하나의 위격(位格, Person) 안에 전혀 손상됨 없이 아름답게 보존돼 있습니다. 그분은 신성의 위엄을 조금도 결()하지 않은 하나님이시며, 무죄한 인성 속에 담긴 모든 요소를 포함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부요한 아버지께서 넘치는 사랑으로 그를 만물의 후사로 삼으셨습니다. 아무도 이 영원한 수여(受與)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1:2). 그분의 가난한 어머니는 더러운 구유 안에 사랑스레 그를 뉘었습니다. 아무도 인간적으로 이 가련한 처녀에게 거할 곳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2:7). 이 육신의 몸을 입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 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떨리며 우리의 말은 더욱 힘을 잃어 버립니다. 금색한 직유법에 의지하여 몇 마디 더듬거리다가는 결국 표현할 말을 잃고 그 신성의 신비로움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 꿇고 맙니다(딤전 3:16). 분명 아무도 그분의 아버지를 제쳐놓은 채 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11:27). 신비의 기운이 그리스도를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비롭고 끝이 없는 심연(深淵)을 탐구하고 채굴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결코 그분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족할 뿐입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탐구가 비록 영원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분의 복합미의 영역을 고갈시키지는 못할 것임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미

진정한 순수함은 늘 인간 정제자(精製者)의 손길을 벗어나 있습니다. 생산업체의 분석 화학자들은 어떤 임의의 수치 이하를 불순물로 규정하는 순도(純度) 측정기를 사용하여 금속이나 가공 식품이 순수하다고 발표하곤 하는 데 사실 그들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어떤 물질도 순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도 역시 그러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많은 정화 방법과 정화의식을 시도해보았지만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떤 순수한 결과물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순수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는 그것이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최선도 그것에 접근 정도만 해낼 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지상의 순수함은 아무 구체적인 실례가 없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영원히 머무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오시자 지상의 순수함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즉 이론이 실제로 변화되었습니다. 인간이 꿈꿀 수 밖에 없는 것이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요일 1:1). 도덕적인 미()의 표준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삶을 사셨고 끝내 무거운 죄짐을 지고 죽음 앞에 나아가셨지만 실상 그분은 죄와는 무관한 분이셨고 흰 눈처럼 순결하고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사단의 시험에 대한 그분의 승리가 그분의 순결성을 입증했습니다.

이 시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기본 사항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페이라자인은 단순히 시험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 뜻이 모호합니다. 시험이 나쁜 것이냐 좋은 것이냐는 문자적인 풀이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원천과 주체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폭넓게 얘기해서 시험은 두 영역과 세 원천에서 비롯됩니다. 두 영역은 내부와 외부이며 세 원천은 육신과 하나님과 사단입니다. 한편 흠정역 성경(K.J.V)은 일반적으로 페이라자인시험하다 대신에 유혹하다로 옮겨 놓았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시험은 죄를 범케하는 유인, 속임, 미끼, 덫 등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헬라어에서 영어로 옮겨지는 사이 이 동사는 도덕적인 모호함에서 부도덕한 의미로 뜻이 변천됩니다. 이러한 변천의 흐름은 현대 번역가의 손길에 의해 하나님의 시험이 유혹하다로 옮겨질 경우 급작스레 신성모독의 벼랑 아래로 추락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분께서 죄인들이 죄의 유혹을 받도록 섭리적으로 허용하시지만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초래하거나 고무하실 수 없습니다(1:13). 그분은 자신의 의로운 목적에 적합하도록, 다른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죄의 유혹을 지혜롭고 능력 있게 굴복시키되 때로는 그 과정에서 유혹자들을 좌절시키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그분 자신이 직접 시험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반면에 사단과 육신은 유인과 속임과 미끼와 덫을 놓는 일에 능숙하며, 따라서 그들의 행위야말로 유혹으로 묘사하기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요컨대 유혹하다는 말은 그들과 관련해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영역과 원천에서 시험을 받으셨을까요? 첫째로, 그분은 죄 많은 육신을 결코 가지지 않으셨으므로 내적인 유혹을 결코 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요일 3:5). 그분의 미덕으로 장식된 거룩은 우리의 악의 지배를 받는 타락성과 완전히 대조됩니다(1:14). 그분께서는 비록 우리의 고난은 동정하실 수 있지만-히브리서 2 18절은 그분께서 시험 받으실 때 고난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된 욕망은 결코 동정하실 수도 동정하신 적도 없으십니다(4:15). , 그분은 시험의 원천으로서의 육신과 시험의 영역으로서의 내면을 결코 지니지 않습니다. 그분의 시험 받으심은 전적으로 외부적인 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시험의 원천이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일반적인 이유에서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다른 자녀들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시시때때로 시험을 보내십니다(12:10, 1:2~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도덕적인 훈련이 일절 필요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도 그분의 순결성을 정화시키고자 시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인격적으로 시험을 부여하고 섭리적으로 유혹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체휼하시며, 믿을 만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반면에 둘째로, 아버지께서는 단순한 선언의 차원을 넘어 당신의 아들의 순결성을 실제로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시험에는 사단 또한 관련돼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유혹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한 악한 의도에서 설치된 많은 장애물들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16:23). 사단은 때로 이 가혹한 걸림돌들을 자신이 직접 설치하기도 했고, 수하의 종들을 시켜 설치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그의 개인적인 권리이긴 하나 사단은 자신의 악한 의지를 하나님을 좌절시키는데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사단이 그리스도를 굴복시킬 계획을 가지고 광야로 나아가고 있었을 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손바닥 위에 놓고 조정하고 계셨습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시험의 열기를 받으셨습니다. 사단은 그 열기를 극도로 가열시켰으나 그 분의 비할데 없는 순결성으로 말미암아 그 기운은 식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며, 반면에 하나님은 당신의 초월적인 목적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무흠한 순결성을, 둘러 있는 영물(靈物)들과 장래의 성경 독자들을 위해 밝히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무흠하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시험의 하중(荷重)에 눌려 주저 앉는다는 것은 순결미의 완전한 표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단의 실패가 유혹을 무력화 시키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코오스를 벗어나거나 자기의 허들을 건드려서는 안되는 운동 선수를 상상해 봅시다. 그의 뛰어난 주력이 허들을 사라지게 하거나 그것을 말끔히 치우는 것을 용이하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모든 장애물들을 한 번에 하나씩 무너뜨리셔야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무흠성은 유혹의 잔인성을 증가시켰습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그것은 결코 실패할 수 없으신 분만이 유혹의 모든 고통스러움을 경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무게도 견뎌내는 믿을 만한 사슬은 약한 사슬이 알지 못하는 무거운 하중(荷重)을 경험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 유혹의 극대치를 경험하신 것은 바로 그분께서 죄를 범하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시험과 유혹을 받으신 그리스도로부터 순결성의 아름다운 향기가 하늘로 피워 올랐습니다. 일찌기 그 곳에서 그 향기는 언제나 친근하고 사랑받는 향기였었습니다. 순결미, 복합미 및 균형미는 그리스도의 여러 아름다운 측면의 세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 미()의 표준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채우실 때 우리의 마음은 크게 뜁니다. 이제,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을 가집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편 27:4).

-데이빗 K. 벨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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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