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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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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1. 18:47 빛 가운데로 걸으며

목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사람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포이멘,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4:11).

여기서는 초대교회에서는 결코 없었던 성직제도가 과연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기독교서회에서 발간한 그리스도교 대사전(1987. 6.30, 8. p.327)에 있는 목사에 관한 설명 중 아래 부분을 먼저 발췌해 보겠습니다.

(목사의)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성서에는 이상과 같은 그런 분업적인 교사나 목사에 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자는 각자가 다 제사장이며 기도와 설교를 할 수 있으며 세례를 주는 일과 성찬식을 집행하는 권한이 있다(5:2, 2:19~22,3:12, 벧전 2:9, 2:27, 1:6,5:10). 그러므로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라(16:19)고 하신 말씀은 베드로 개인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신앙을 갖는 자에게는 다 같이 주시는 은혜라고 생각되었다. 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감독, 장로, 집사 등 성직의 구별이 생겼다.

물론 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성직 제도가 생겼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왜곡시키고 교회를 변질시키기 위하여 거짓된 무리들이 만들어 낸 제도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그런 제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계는 90% 이상이 목사라는 성직 제도를 당연시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없는 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그런 세태입니다. 그러나 덧붙여서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서는 목사라는 호칭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으로 고착된 목사라는 신분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광대하시고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때로는 바로도 사용하시고, 아비멜렉도 사용하시는가 하면 발람도 사용하시고 사울 왕도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목사들 증에서 쓰실만한 사람들을 필요를 따라 합당하게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그가 목사이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쓰실만 하기 때문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들 자신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목사직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사를 구약시대의 제사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의 사제가 그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죄를 범하거나 문제가 있으면 제사장에게 가지고 나갔던 것처럼 사제나 목사에게 가지고 나가서 그들의 중보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사람의 중보는 필요 없습니다. 다음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지 아니하셨다면 여전히 어떤 사람의 중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이 되셔서 친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기 때문에 별다른 사람의 중보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엄연히 말씀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만든 의식과 제도가 유전과 전통이 되어서 그것을 진리인양 철석 같이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중세 종교 개혁자들은 말씀을 통해서 이제 은혜 시대에는 특별한 계급의 제사장이나 사제 같은 성직자 그룹이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개인적으로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만인 제사장설을 전파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잘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리(왕들)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1:5-6).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사가 구약 시대 제사장처럼 성례전을 집전하고 제사장이나 사제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신분을 주장한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도 무지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런 목사제도에 대하여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쯤하고 그 성직화된 목사제도가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부분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목사제도를 통하여 교인들이 늘어나고 조직화, 체계화 되고 외형상 기독교의 부흥과 발전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복음적이고 희생적인 목사들이 있었음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순기능을 인정한다고 해도 목사제도가 끼친 결정적인 해악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불구자가 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분쟁의 중심에는 목사가 있습니다. 원로 목사파와 담임 목사파로 나뉘고, 원 목사와 청빙 목사파로 나뉩니다. 그 목사가 정말 성경적으로 옳은 목사냐 아니냐를 분별하는 것보다는 그저 자기 감정에 따라, 자기 마음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로 어느 목사 편에 섭니다. 어쨌든 그들은 어느 목사 편에 서야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래야만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런 분쟁 가운데 있는 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성경의 지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같은 예배당 안에서 서로 상대방을 향하여 마귀들과 싸울지라····찬송(?)을 소리 높여 부릅니다. 그들에게 상대방 목사나 그에게 속한교인들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에게 속한 원수입니다. 목사들 또한 자기를 따르는 교인들은 어린 양들이지만 상대방 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은 이리떼입니다.

이린 분쟁의 와중에서 목사들은 대부분 그 분쟁의 해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도리어 문제를 더 악화 시킵니다. 그 수많은 교인들이 머리 없는 몸통과 같아서 목사를 머리로 생각하여 죽기 살기로 매달리고 쫓아다니는 모습은 정말 가관입니다.

목사가 어찌하여 머리입니까? 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현미경으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목사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머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예수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1:22)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4:15).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1:18).

사도들조차도 머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따라서 목사일지라도 목자(목동)와 같은 마음으로 섬겨야 하지 군림하는 자세, 주장하는 자세, 신분으로 착각하는 그런 태도를 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목자)는 목자장이 얼마동안 일부분의 양떼를 위탁해 준 목동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런 부분에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오래 전 어떤 기독교 계통의 월간지에 목사도 형제, 교인도 헝제?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의 핵심은 어떻게 성직자인 목사가 일반 평신도와 똑같이 형제가 되고 또 형제라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목사라는 신분의 우월성이 강하게 깔려있습니다. 즉 목사가 어떻게 일반 교인과 같을 수 있느냐는 목사의 성직화 의식이 짙게 배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사보다 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초대교회 사도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 믿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다음 말씀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15:22.23).

당시에는 여전히 유대인의 우월의식과 이방인을 경멸하는 사고가 팽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 안에 들어온 후로는 그런 모든 차별을 초월하여 같은 형제로 교제를 했습니다.

사도나 장로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이나 은사는 다만 그들이 맡은 일이었을 뿐 그것이 그들의 신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으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믿는 자들이 피차 통용한 호칭은 형제들이었는데 대략 200번 이상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나의 형제들아····”

“형제들아····”

물론 호칭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대로 수고하는 이들을 존경해야 하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말씀이 그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3:17).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권위는 주장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은사와 삶을 통한 인격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가 없으니까 제도나 복장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권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니 주변 여러 교회에서 전도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 앞에 전도지를 놓고 갑니다. 그 전도지의 모양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담임 목사의 화려한 이력(?)을 소개하는 내용은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도지를 받아 들고 제일 주목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보다 목사가 얼마나 이력이 다양하고 능력이 있고 유명한 목사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전도지에는 풍채 좋은 목사의 사진도 실려 있고 심지어어떤 교회는 교회 수송 차량에까지도 목사의 사진을 자랑스럽게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교회의 달력에는 목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예배당 건축하는 현수막에도 목사 이름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런 교회들은 과연 예수 교회인지 목사 교회인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오늘날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니라 목사와의 연합이 그들의 교리가 된 것 같습니다.

연합의 비밀스런 진리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이 연합, 한 몸 됨의 진리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숭배 받는 대상은 높은데 있고 숭배하는 인간은 낮은 곳에 있어서 절대 상명하복 관계에 있습니다. 이 둘의 연합이란 그들의 종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사람)와 함께계시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려고 하니 그 대상인 인간이 죄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죄 때문에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고 친히 그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능력으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 죄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억지 아니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도록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 성령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침례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2-8).

“너희가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2:12-13).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이와 같이 기독교의 신앙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떼 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머리십니다. 목사나 사제나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절대로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끼리의 연합도 지체와의 연합이지 그 지체들 중의 어떤 지체가 우월해서 그를 머리로 하는 연합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제부터인지 기독교는 피라밋 모양의 구조를 가지게 되어서 그 정점에 목사들이 서 있고 모든 교인들은 그 정점에 있는 목사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이루는 형태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풍조는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심각한 유혹이 되었습니다.

일단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면 권위가 따라오고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호칭은 그래서 기독교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며 필수적인 코스가 됩니다.

근래에 크게 세력이 확장된 어떤 자칭 복음적이라는 조직의 리더는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목사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냉담한 반응을 경험하고 난 후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때의 편리함과 유용함을 깨닫고 자칭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가짜 목사들이 범람하고 있으며 그들로 인하여 또한 계속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목사들은 그 목사의 신비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합니다. 쉰 듯한 거룩한(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40일 금식 기도, 산 기도를 하고 방언을 하고 환상과 계시를 본 경험을 해야 하고, 영안이 떠졌다고 교인들에게 신비감을 줘야 하고,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 고치는 능력을 나타내기도 해야 하고, 무엇인가 평신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숫자가 많아진 교회는 예배드리는 교회,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경영하는 교회, 조직으로 움직이는 체계화된 교회가 되고 목사는 목회에 성공한 유명 인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20:25-26).

이 말씀은 인간의 노력이나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통한 인간의 지혜나 송씨로 하나님 앞에 잘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나 열심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이스라엘)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2-3).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다듬을 수 있는 돌도 아니고 다듬어서도 안되는 산돌입니다. 인간적인 요소의 개입 없이 오직 성령으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때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목사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교인들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없어도 얼마든지 당황하지 않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 얼마든지 거룩한 제사장으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라는 직분을 신분으로 생각하지 말고 작은 목자 또는 목동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주장하지 말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목자 목사가 되면 그래도 괜찮지만 목사가 목자 노릇을 하면 군림하는 목자, 양을 약탈하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양들은 불행합니다.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그런 교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하고 슬픈 일입니까? 그들이 모두 거기에서 건짐을 받기를!

오늘날 다음과 같은 목사가 있다면 과연 그에게로 사람이 모일까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2-3).

이 말씀을 오늘날에는 이렇게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일찍부터 될성부른 나무처럼 자랐고 풍성한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위엄 있고 튼튼하여 풍채가 있으며 우리의 보기에도 과연 하나님의 종처럼 흠모할 만한 모음이었도다. 그는 존경을 받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으며 간고를 뛰어넘고 절고를 극복하였으며 따라서 사람들에게 신비한 능력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그를 아주 귀히 여겼도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기독교인들) 영적인 것보다 육신적인 것을 더 중요시 하고 내면적인 것보다 외형적인 것을 더 중요시 하며 속 사람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겉 사람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기독교계에서는 수평 이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는 기독교인 숫자가 줄었는데 대형 교회 교인들은 늘었다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새롭게 믿어서 대형 교회의 교인이 늘어날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큰 교회로 옮겨갔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대형 교회에서는 그것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작은 교회에 다니면 여러 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담이 많지만 큰 교회로 가면 이미 웅장한 예배당 건물에 유명한 목사가 있고, 각종 조직과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그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어느 한 곳에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저절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인지 조직생활인지 잘 모르지만 대형 교회를 다니면 부담 없고 때로 흥분되고 만족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목사와 건물이 더 우위에 있습니다. 그들은 펄쩍 뛰겠지만 한 번 가슴에 손을 없고 조용히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복음적인 교회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도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멀리 살아서 일주일에 한 번밖에 교회를 나가지 못하면서도 유명한(?) 교회, 큰 교회로 나갑니다. 가까운 곳에 복음적인 교회가 있는데도 그런 교회를 몇 개씩 뛰어넘어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 부담 없이 참석할 수 있는 교회로 나갑니다. 또 그 교회 인도자들도 그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온다는데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교회를 선택해서 나가는 사람들은 한 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지금 나가고 있는 교회를 선택할 때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이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이든 외적인 것을 보고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택했는가? 또한 자기의 은사대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인도하심이 있었는가? 그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가? 사람이 기뻐하는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은 적은 숫자를 옹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게으르고 나태해서 숫자가 적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지요. 여기의 핵심은 두세 사람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모인입니다. 누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습니까? 바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13)

누가 주의 이름을 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나니”(7:48).

이 말씀도 건물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지극히 높으신 분이 계시는 곳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건물은 이제 성전이 아닙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에는 거의 교회 건물을 예배당이라고 일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건물을 지어놓고는 성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우매한 것인지 모릅니다. 신약시대에 보이는 성전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성전이며 그런 성도들의 모임(무형의)이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또한 다음 말씀의 의미를 아십니까?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신부와 같은)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시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238-10).

이 말씀은 아버지가 필요 없다거나 선생이나 인도자,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연적이고 직업적이고 학문적인 부분에서는 부모를 아버지라 부르고, 가르치는 이를 선생이라 부르고, 환자가 의사를 박사라고 부르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에서는 다릅니다.

인간은 영적인 생존을 위해서 생명과 가르침과 인도라는 세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H. G. Weston). 주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영적 생명을 부여하거나 지탱해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세상의 선생도 흠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도 완전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선생이시며 지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대로 믿도록 해야 하는 것이 목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30:27).

그들은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어떤 지도자의 인도에 따라서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을, 눈이 보이는 목사가 없이는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로 만들지 말고 목사가 없어도 예수를 잘 믿는 기독교인들이 되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또 이 시대에 생겨날 새로운 현상 한 가지는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로 인하여 지 성전 제도가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지 성전 제도의 중심에도 목사가 있습니다. 교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명한 목사의 화상 설교를 듣고 그 목사의 얼굴을 본 것에 흐뭇해합니다.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대형 교회들은 각 처에 지 성전을 세웁니다.

지 성전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용어입니까? 이런 의미의 말이 구약에 있습니까? 신약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어느 대형 교회의 목사란 사람은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지 성전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찾지 못했다고 하면서 지 성전제도를 옹호했습니다. 그것은 흡사 무신론자인 옛 소련의 우주 비행사가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를 날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신은 없었다고 한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구약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 말고 어느 곳에 무슨 다른 지 성전이 있었습니까? 여로보암이 벧엘과 아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섬겼던 것이 지 성전입니까? 그러면 신약 시대에는 지 성전이나 지 교회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안디옥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빌립보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 성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들은 각기 그 지역의 독립적인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각각 그 지역교회의 머리셨습니다. 그 모든 지역교회의 성도들은 사람 중심으로 모이지 말고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이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분열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토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13).

이와 같이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전혀 주님의 뜻이 아니며 책망 받을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지 성전이나 지 교회도 그래서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두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믿을지라도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4:13).

“이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하리라’(14:12).

또한 어떤 재료로 믿음을 건축했는지도 드러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2-15).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집이 있지만 그 집들이 다 똑같은 집이 아닙니다. 똑같은 터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해도 각기 집 짓는 재료에 따라서 집의 형태나 운명이 달라집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 것 같아도 그 터 위에 세우는 재료에 따라서 그 집은 각각 다른 종류의 집이 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집을 지은 것을 말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에 쉽게 타는 재료로 지은 것을 말합니다. 한 부류는 하늘에 속한 재료이고 또 한 부류는 땅에 속한 재료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불로 공력을 시험하게 될 것인데 그때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집은 다른 사람이 지어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지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집을 짓는 사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석 위에 짓고 또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짓는다고 하셨지요(7:24-37).

당신은 어떤 기초 위에 믿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어떤 재료로 믿음의 집을 짓고 있습니까?

(아아,)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32:29).

전도출판사 출간 "목사가 없으면 예수를 못믿는 사람들" 정 선 지음-중에서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