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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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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 10:49 빛 가운데로 걸으며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

빌립보서 4:8-9

오수웅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 하나님의 평강의 비밀과 평강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주목할 주재의 말씀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하나님과 함께 평강한 삶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구원받은 지 오래냐 아니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강을 누리느냐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봅니다. 수많은 날을 주님과 함께 있어도 우리들의 마음에 우리의 심령이, 우리의 모임이 평강하지 않다면 그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교회에게, 성도들에게 평강이 있느뇨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돌이켜 볼 때에 주님의 말씀으로 평강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우리의 믿음 가운데서 나타내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서 여러가지 삶의 방법을 배울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듣는 것입니다. 이 출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근본적인 요소인 믿음을 통해서 롬 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살아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 있던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나는 역사를 배우고 듣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침체되고 병든 자와 같은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가지 형태로 씨 뿌리는 모습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동일한 말씀을 들었으나 한 사람은 마음이 딱딱하므로 새가 와서 쪼아 먹었고, 또 세상의 염려와 이런 것들로 말씀을 잊어버렸으며, 한 사람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결실한 자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전해지는 것은 어느 형제가 전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의 권위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유창하게 하느냐 덜하느냐의 차이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분의 일 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참 마음으로 듣는 자가 30, 60, 100배의 결실을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우리는 말씀을 듣는데 무엇을 듣는가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사도행전의 여러 예를 보면 19:8,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어떠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비판적(비난적)으로 받고 행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을 때 그들은 자기의 생각과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마음에 화합되지 않고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으로 우리를 판단해야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반대로 자신이 성경을 판단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종종 이렇게 잘못 분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가 없다.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권면과 가르침은 나와 상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자기의 지성적으로 덮는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에게 특히 지목하신 이러한 말씀들을 봅니다.

사도행전 13:45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말씀을 거부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이 전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이 참이고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과 자기 사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모임의 질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매들이 너울을 쓰는 문제에 있어 자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왜? 말씀이 그런데? 여러가지 핑계와 자기의 생각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평강을 이루는데 큰 장애요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그마한 것이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주어졌을 때 성경은 주여 내가 이 말씀을 받겠습니다. 이사야는 주여 나를 보내소서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수많은 선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었고 모임에 덕과 유익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문제들은 말씀을 거부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1장에 말씀처럼 들은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거울을 볼 때는 아 내 모습이 이렇구나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지하지만 뒤돌아가서 말씀을 잊어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모친이 연세가 있으시니까 종종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까 생각했던 것을 금방 까먹고이것은 우리의 육체의 노쇠로 건망증이 생기는 이러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그것을 착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안되어 있을 때 건성으로 듣는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큰 슬픔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6에 보면 아덴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우리가 한 번 알아보자 그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시간을 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가 많이 들었습니다. 들려지는 수많은 말씀들을 듣고 말씀에 대한 자기의 기준이 높아져 가지고 자기의 욕구를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흔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서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비결은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함으로 또한 진지함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밭에 뿌린 씨처럼 결실을 맺는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준비되고 기경된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가운데로 그의 마음을 기경시켰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기 위해서 농부가 그 거칠은 땅을 갈아 엎고서 가래질과 쓰레질을 통해서 그 땅을 부드럽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씨앗이 떨어졌을 때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돌밭에 떨어지는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사야 66:1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들을 주님께서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데 우리의 심령에 떨림이 없습니다. 복음서에서 시장에서 피리를 부는데 춤추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며 주님께서 한탄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경고가 있을 때 이 말씀에 떨림을 갖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39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였다든지 어떠한 장소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리스도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마리아와 같은 마음과 심령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많은 문화적인 매체를 통해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리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 학자들은 이것을 영어로 합성어를 만들어서 압솔리지*라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아도 듣는 것입니다. 저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있기 때문에 이 차가 새로 만들어지면 노이즈가 발생되는지 안 되는지를 검사하게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공한 사람들은 조그마한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이라도 잡아내는데 전문가로 대우 받습니다. 이 세상의 소리를 잘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소리 즉 새소리, 개짓는 소리, 잡소리 등 소리로 끝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으로, (),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우리의 감정을 격동시킵니다. 우리가 좋은 음악을 듣게 되면 몸이 움직이고 춤을 추고 기분이 업됩니다.

*압솔리지 - '쓸모없다'는 뜻의 'obsolete'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를 결합한 용어로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이 몰랐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시고 떠나실 때 그들의 대화 속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우리에게 들려주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말씀을 들어도 반대를 하지 않더라도 무감각하고 쉬 잊어버리는 이러한 상태로 있지 않는가를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심령과 폐부를 찔러 쪼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들은 살아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시면서 그 내용과 질이 다 다르지만 유일하게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이 말씀이 에베소교회로부터 라오디게아 교회까지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이야기, 세상적인 원론적인 이야기, 뉴스와 시사적인 이야기 등 이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교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도록 성령의 역사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면 교회역사가 없습니다. 성령을 소멸하거나 성령을 슬프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말씀으로 울려지는 이 마음의 움직임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말씀이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를 움직여야 된다고 봅니다. 사람의 소리 형제 자매들의 소리를 듣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들을 귀가 있는 것들을 오늘날 우리 시대에 교회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1-7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우리는 사 6:1에서 웃시야가 죽든 해에 이사야는 보좌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이 웃시야 왕은 우리에게 큰 경고와 교훈을 준다고 봅니다. 웃시야는 16살에 왕에 등극하여 52년을 이스라엘의 왕에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을 비롯해서 그 아들 아몬, 손자 아하스, 증 손자 히스기야까지의 4대에 걸쳐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은 것을 성경이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가 볼 때 이사야가 주님을 보는 것은 웃시야 왕이 죽지 않았을 때도 볼 수 있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왜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를 기록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웃시야는 16살의 소년으로서 왕이 되어 유다의 훌륭한 왕으로 개혁하고 모든 산당과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전의 놀라운 개혁을 통해서 주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이 삶은 그가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제사장의 일까지 넘보는 욕심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실패했던 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젊은이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말씀하심 같이 너의 시작은 미세하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데 처음에는 잘 했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했던 것을 봅니다. 그는 문둥병이 걸려서 그 아들 아몬이 대신 치리하던 52년의 왕으로 있었지만 그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문둥병자는 죄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저 바닥에까지 떨어졌고, 문둥병자는 입술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라고 하면서 회중에서 떠나있는 자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위치적으로는 왕이었지만 그의 말로는 문둥병자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자기 생애를 투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그의 삶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이 웃시야를 통해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의 통치시대 때는 나라는 부패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이사야를 매우 어렵게 했습니다.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의 모습이 웃시야 왕의 시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9-22를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이 디모데 만은 나의 고난에 참여했던 자로 바울이 그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가 부패되고 많은 사람들이 타락되는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고 나서지를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은 디모데의 연단을 우리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어려운 시기에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현재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요?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분과 교제하는 관계가 적립되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지요?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유다의 많은 사람들은 그 최고 통치자가 죽었다는 사실에 그들의 관심이 온통 거기에만 있었습니다. 그 암흑의 시대에 이사야는 주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좌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1에서 요한은 이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도 귀가 먹고 그 마음으로는 원하지 않는 것을 말하면서 이사야 6장에 있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암흑의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요 즐거움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1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연결시키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세상의 왕의 보좌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를 보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보좌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좌는 순간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52년간이나 있었다 할지라도 그 시작은 끝이 있으며 세상의 보좌는 없어지고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보좌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가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에게 이 땅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을 보라고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로 우리를 복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자로서 하늘에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있는 것들,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며 모임의 어떤 훌륭한 모습들을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들은 배우고 나쁜 것들은 버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 오심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을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스랍들이 여섯 날개를 가지고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들의 눈에도 거룩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시선을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천사들은 얼굴을 가리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보다 월등하게 뛰어나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스랍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영적인 존재로 하나님 앞에 찬송하는 천사들이라고 볼 때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섬기기 위한 자로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인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고 이 영적 존재인 천사보다도 월등한 존재로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께서 격상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이 일에 대해서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4절에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이 문지방이 진동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떨리지 않는 이러한 딱딱한 심령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찬송하고 가까이 하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찬송하지 않으면 이 돌들을 들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에 이 미생물인 문지방이 떨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갈 때에 사람들이 떨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미생물에게 떨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주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나는 죽게 되었도다, 나는 부정한 자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내 안에 여러가지 더러운 것들이 내제하고 지금도 꿈틀거리며 언제든지 기회를 봐서 나타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보좌에 계신 여호와를 뵈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자인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렸으며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 앞에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문둥병자가 아니라 자신이 문둥병자인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자신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스랍의 하나가 날아서 단에서 핀 숯을 입에 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핀 숯이 입에 닿았을 때 이사야는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옷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맞춘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깨끗하고 거룩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요 희망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올 때에 목욕재배하고 깨끗하게 하여 나오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 앞에 새로운 입맞춤으로 거룩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보는 것, 듣는 것들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야고보서 2:14-17을 보겠습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우리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들을 때에 영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믿음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행위를 근거로 수반이 될 때 힘이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가 고난한 가운데 배고픔 가운데 있는데 믿음이 너를 세우리라, 믿음으로 이겨라, 믿음으로주님의 말씀은 그 형제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후반절에 믿음의 행위를 두 사람을 표현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말씀하고 두번째 사람은 라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행위에까지 나아가는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컸다 할지라도 그 자신을 드리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평가는 절삭되었을 것입니다. 이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믿음의 여인으로 세우셨습니다. 동일하게 히브리서 11장에서 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믿음을 동일한 선에서 놓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은 일반적으로 믿음의 조상이고 유대인의 큰 족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이방인이었고 기생이었고 이 세상에 제일 천한 위치에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의 대상은 빈부귀천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의 행위를 따라서 하나님의 평가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에 손실비용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차비를 들이고, 시간을 소비하며 와야 하는 손실비용이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하나님의 나라에 오전에 다 구름타고 올라갔는데 그 주님의 평가는 동대문시장의 싸구려 덤터기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별적으로 판단하시며 그 상급의 정확한 것을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며 그 입으로 직고할 것입니다. 남이 나를 평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직접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 섬기는 섬김이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겨가는 그 섬김의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4 9절을 읽으면서 마치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주님의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2012년 5월 28일(월)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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