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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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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31. 13:19 빛 가운데로 걸으며

베드로의 실패와 주님의 가르침

태수

누가복음 22:28~34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한 시간 동안 인도 받을 말씀은 베드로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짧게, 어떤 분은 많은 분량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신약성경에서 많은 사건들과 연루된 많은 기록을 가진 사람이고 바울과는 달리 특히 실수 실패 또는 허물 이런 것들이 주로 사복음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시간 동안 상고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한 관점을 보겠습니다. 물론 베드로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관점이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관점으로 인도를 받을까 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을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을 하려고 했을 때 베드로는 나도 너와 같이 성정이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성인처럼 뭔가 사람 차원에서 뛰어난 어떤 사람처럼 숭배를 하거나 과하게 높이기도 하지만 베드로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믿지 않는 일반적인 우리와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베드로는 그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몰랐겠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부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어떻게 쓰임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 마음 속에 계획을 가지고 베드로를 훈련하시고 교훈하시고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님의 시각에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베드로를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로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훈련하시고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돌보시고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본다면 아마 그러한 측면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말씀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먼저 말씀 드렸듯이 베드로에 관련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 다루기에는 힘들고 그래서 우리가 핵심적인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의 부인과 관련해서 살펴볼까 합니다.

베드로는 많은 실수 또는 실패를 했지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도저히 주님 앞에서 일어날 수 없는 큰 타격이라고 봅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베드로를 다른 여러 사람들과 비교하기도 합니다만 가롯 유다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행동은 틀리지만 특징은 비슷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종 묻기를 가롯 유다는 주님께 버림을 당하고 베드로는 주님께 쓰임을 받은 이유가 뭡니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 마음 속에 베드로와 가롯 유다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의 이 세 번 부인은 자신에게 큰 타격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베드로의 완전한 실패, 완전한 낙담, 이런 것들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이 앞에서도 베드로는 주님에 관련되어서 많은 실패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베드로가 마음적으로 내가 잘못했구나, 다시 회개하고 돌이켜서 주님을 섬겨야겠다. 그래서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주님을 따르는 어떤 정도의 실패나 실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르며 베드로 스스로가 일어설 수 없는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베드로에게 가한 하나의 일격인데 이 일격은 베드로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타격이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베드로를 곁에 인도하시고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본다면 우리들은 베드로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주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안을 받으면서 베드로의 실수만 주목을 합니다. 그래서 실수를 통해서 베드로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나도 실수가 많고 실패가 많지만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살아있구나 하고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만약에 베드로를 배운다면 베드로의 실수를 가지고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주님께로부터 쓰인 사도행전을 보고서도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베드로를 일으키셨다면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받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영적인 성장과 영적인 힘과 영적인 성숙에 관련해서도 우리가 도전을 받고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한 시간 동안 베드로의 핵심적인 실패의 특징,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주님의 인도와 마음들을 인도받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드린대로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과 대비해서 교제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구약과 비교를 한다면 어떤 형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이 아론과 비교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세워진 이후에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이후에 그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을 가진 사람은 아론이었습니다. 주님의 품속에 누울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가 있고 그 경험을 그 특권을 유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은 아론이었듯이 요한은 하나님의 품에 있는 어떤 특권을 누린 사람으로 보면서 요한은 아론과 대비가 됩니다.

바울은 여호수아와 비교 된다고 보여집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실제로 가나안 땅을 취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한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동일하게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영적인 축복을 실제로 모든 성도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말씀을 펴서 적을 점령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누리도록 많은 말씀들을 내고 많은 비밀들을 증거한 분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특징적인 측면에서 바울은 여호수아와 비교된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면 지금 교제하려는 베드로는 구약의 모세와 연결된다고 합니다. 모세의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 길을 갈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모든 영적, 육신적인 필요를 공급한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동일하게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 황량한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필요한 말씀과 필요한 양식과 필요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세와 비교된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또한 바울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이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활동 영역에 따라 바울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라고 해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을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주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서 바울과 베드로가 인식한 것이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이며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또 말씀드린대로 베드로는 가롯 유다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내가 부인하겠다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게 될 때 가롯 유다와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실패의 엄숙함 때문에 베드로의 부인과 가롯유다가 주님을 판 것이 특징적으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공통적인 특징 때문에 베드로를 가롯유다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 사람만 데리고 가서 무언가를 하신 적이 3가지가 있는데 모두 죽음과 관련한 것으로 베드로는 이 두 사람과도 연관이 됩니다.

신약에서 베드로 이외에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실패를 한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할 때 두 사람이 떠오르는데 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면서 종종 실수나 실패를 합니다만 스스로 내가 잘못되었구나 하면서 일어서서 나아갈 수 있는 실패나 실수들이 있는 반면에 어떤 것은 , 나는 끝났다 더 이상 주님 앞에서 희망이 없다, 내가 한 일을 생각할 때에 나는 더 이상 주님 앞에 희망이 없다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릴 만큼 치명적인 실패를 한 사람들이 세 사람으로 보는데 베드로, 마가, 도마라고 봅니다.

마가를 생각해 보면 마가는 성경에서 8번 언급이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4, 서신서에서 4번 나타납니다. 마가를 3 영역으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마가의 혈육적인 관계입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서 찾아간 곳이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던 마가의 어머니 집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고 만찬을 제정하신 그 장소가 마가의 어머니 집에 있는 다락방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120명이 모인 그 장소가 마가의 어머니 집에 있는 다락방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마가는 육신적으로 신실한 어머니와 연관되어서 나타나며 그리고 바나바의 생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가는 육신적이지만 대단히 영적인 사람들과 연관되어서 그 출생과 자람이 관계 지어져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가의 영적인 관계를 보면 베드로전서 5장에 의하면 베드로가 내 아들 마가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마가는 베드로를 통해서 구원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며 사람은 절대 관여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충성스럽게 전할 수 있으며 그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지 베드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복음을 전해주었다는 것이지 베드로가 그 사람을 구원한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분이 복음을 전하든지 간에 그 복음을 말씀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을 말한 그 사람이 주목되면 그 구원은 가짜일 수 있으며 실제적인 능력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하는 가운데 마가의 영적인 관계는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베드로와 관련되어서 마가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마가는 예루살렘에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마가를 보았고 마가의 어떤 삶이나 태도가 상당히 겸손하고 주님께 스임받을 가능성이 보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마가를 데리고 갔습니다. 12장에서 데려왔고 13장에서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있는 가운데 성령께서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는 명령에 의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기도와 지원 가운데서 첫번째 전도여행이라 불리는 길을 떠납니다. 떠나면서 거기에서 마가를 수종자로 두면서 떠나는 것이 행 13:13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은 베드로와 연관되어 있고 구원의 의미나 구원 받은 후 봉사나 활동은 바울과 연관을 맺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에 가장 위대한 두 사도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마가였습니다. 베드로는 구원과 연관이 되었고 그 구원의 연장선에서 주님을 봉사하고 섬기며 따르고, 또 그 구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복음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것처럼 몇 마디로 말할 수 있지만 물론 그것이 복음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만 성경은 그것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있으며, 갈라디아서, 로마서는 복음과 관련된 편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베드로가 5~10짧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복음의 증거에 대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5~10분 만에 알 수 있는 내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복음서를 통해 복음에 관한 풍성한 것을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로마서 그리고 서신서 곳곳에 하나님의 복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았지만 결코 학교에서 1학년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2학년과정을 하는 사람, 또는 대학교 간 사람이 초등학교 공부가 필요없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복음에 관련된 것들이 필요 없다 그런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성경에서는 복음에 대해서 깊고 다양하게 증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마가는 베드로를 통해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알았다면 바울을 통해서는 복음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를 알게 되고 그 복음에 봉사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그 당시에 가장 유명하다면 유명하고 소중하다면 소중한 유대인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대 사도인 두 사람과 연관되어 영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으로 마가는 영적인 축복의 기회를 가진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세번째 마가는 수종자, 즉 섬기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성령이 활동하려는 시점에서 마가는 두 분을 섬기면서 성령의 역사를 보는 굉장한 기회를 가진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첫발을 떼었습니다. 왜 마가는 중간에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보냄을 받아 함께 출발을 했는데 왜 중간의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지 여러가지 상상을 하며 여러 말들을 합니다. 어떤 분은 마가가 향수병에 걸렸다. 집을 떠나게 되면 마음이 불안하게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향수병에 대해서 전혀 못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마가는 향수병에 걸려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아 출발했듯이 그 둘을 따르는 수종자지만 마가도 개인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가야 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겉모습 또는 언행을 보고 가자고 해서 갔기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한 면으로는 마가가 주님을 열심히 배우고 봉사하기 위해서 따라갔는데 바보에서 엘루마 박수와의 관계되는 그 일을 통해서 자기가 생각한 반대 고난 등 현실적으로 닥쳐보니까 마음이 약해져서 돌아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마가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로서 마가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분명히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세계로 가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온갖 고초와 고난들을 감당하기에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기는 과정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쓰임을 위해서 필요한 마음의 태도나 자세는 다르기 때문에, 마가는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기에 중간에서 포기하고 돌아갔다. 등 이러한 여러가지 말들을 합니다만 이러한 말들을 할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여러가지로 생각하며 상상할 수는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를 넘어가지 말 것을 극히 주의해야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는 확실히 취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물론 성경을 더 알고 싶어 가지고 그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어 버리면 매우 위험한 상태로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겸손하게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만 확신을 가진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가지면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가 확실히 말하고 있는 것은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마가는 돌아갔고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어서 나뉘게 할 정도로 심히 심각한 문제였고 바울이 볼 때에 그 때 그 당시에 마가를 얼마 전까지 마가가 일관되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그 돌아간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서 마가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바울의 마음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간다는 것을 분명히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서 우리는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분명하고 바울이 마가가 다시 수종자로 일하는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 거절할 정도로 그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하는 것들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마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훌륭한 기회를 가졌다. 나는 베드로에게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대 사도인 바울과 함께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도중에 그것을 버리고 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오는가 했는데 대 사도인 바울의 분별에는 자기는 더 이상 거기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표현을 했으며 그리고 자기의 삼촌과 싸워서 갈라졌다.’ 이것을 통해서 마가의 마음 속을 본다면 평상시에 일어나지 않는 어떤 마음의 큰 타격이었으며 이러한 타격 속에서 마가는 실망에 빠질 수도 있고 침륜에 빠질 수도 있고 여러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가를 사용하셨으며 마가는 달라졌습니다. 주님과 바울이 틀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때 그 분별에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따르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가에게 새로운 어떤 훈련을 계획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마가는 그 훈련을 통해서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의 종 되심에 대한 기록입니다. 종에 대한 실패자가 주님의 종되심에 대한 기록을 했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인도하심과 훈련과 주님의 생각이 놀라운지요! 마가는 수종자라는 위치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자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한 마가를 통해 주님의 종되심을 나타내 보이면서 마가는 주님의 종되심을 깊이 묵상하고 거기에 대해서 마가복음이라는 성경을 기록할 정도로 인도함을 받는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쓰임과 마가 스스로의 겸손과 훈련과 인도하심을 10여 년이 지난 후에 바울도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 바울은 세 번이나 마가를 언급하면서 골 4:10에서는 마가를 골로새 교회에 보내면서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딤후 4:11에서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했습니다. 이제 마가는 바울의 수종자가 아니라 바울이 주님을 섬기듯이 마가도 주님을 섬기는 같은 동역자요 같은 주님의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가는 주님의 훈련과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도마를 보겠습니다. 도마는 요한복음 20 24-25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앞 뒤 문맥에서 보면 이 내용이 뭔지 알 수 있으며 도마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불신의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10 사도들이 듣는 앞에서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믿지 않겠다.’ 이것은 나중에 도마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어떤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도마의 이 말을 생각할 때 이렇게 빠진 이유는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19)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여기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이 부분을 많은 분들이 교제를 하십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가장 선한 것, 주님 자신의 나타남, 여기서는 나타나셨는데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모든 사람들과 사도들은 실망에 빠졌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한 죄인처럼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 제자들은 심한 실망에 빠졌고 유대인들을 무서워하면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신지 첫번째 안식 후 첫날에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주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므로 놓쳤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엄청난 환난과 상심 가운데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 상심 때문에 주님이 있으라고 하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 가운데서 성도들에게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이면서 기쁨과 주님에 대한 확신을 줄 터인데 반드시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주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했는데 이 불신은 불신자의 어떤 고백처럼 보여집니다만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도마의 이 말은 저도 종종 하는 말이었습니다. 어떤 압제나 어려움 가운데 들어갈 때에 주위의 형제 자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계시니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형제와 자매는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고 주님을 본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위로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사람은 그 상황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나도 그것을 믿고 싶지만 지금 나에게 주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나는 정말 그 말을 못 믿겠다합니다. 그래서 도마의 이 말은 불신자의 믿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로 살아나신 것에 관심도 없고 그 말은 내가 믿을 수 없다하고 불신의 마음으로 말하는 선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러한 선언이었다면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의 이 말은 믿지 않으려고 악심을 품은 자의 말, 불신하는 그 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물론 도마는 제자들의 말 자체를 불신하지 않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의 마음 속에는 영으로 오신 주님을 보았을 것이다.’ 도마에게 필요한 것은 영으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실체, 즉 정말로 살아나신 주님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지칭을 합니다. “거룩한 의심의심인데 거룩한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도마는 믿을 마음조차 없는 불신자들이 내뱉는 그러한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마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긍정적인 면을 보기 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는 것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하셨을 때 도마는 나사로를 깨우는 것은 별 관심이 없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일을 만날 때에 도마는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보다도 약간 어두운 측면들이 많은 편의 사람이었고 또한 빛에서 기뻐하는 것보다는 약한 달빛 가운데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확인하는 특징을 가진 기질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제자들의 하는 말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았겠지만 도마의 마음 속에 필요한 것은 지금 현재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그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이러 말들을 합니다만 정말로 어려움이나 어떠한 곤란에 빠졌을 때에 성도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해 줍니다. 위로의 그 말이 말씀에 부합되기 때문에 그 위로나 말씀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내가 참으로 곤란하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는데 주님 자신이 실제적으로 나에게 역사해 주지 않으면 나는 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들이 우리들에게 종종 있는 것으로 봐서 도마의 고백도 그러한 특징의 고백이지 불신자들의 믿지 아니하는 악심에서 나오는 불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이 뒤에도 나오는데 주님께서는 도마를 위해 나타나셨고 도마가 한 그 말을 인용하시면서 도마에게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 때에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도마가 주님의 몸을 만졌는지 아니했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도마가 살펴볼 시간이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리고 도마의 마음 속에 만약에 참으로 주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했는지 안 했는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주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면밀히 살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면밀히 살피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최소한 순간적으로 만졌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 내가 실수를 했네요, 잘못 생각했네요.’ 이 정도로 끝나지 절대로 주님을 향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데 까지 인도 받지 못한다고 봅니다. 도마는 주님의 현존을 보는 즉시로 사라졌기에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도마의 의심은 불신자의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현존을 보았을 때에 즉시로 주님 자신에 대한 믿음과 놀라운 고백을 나타낸 것입니다. 지금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보게 될 때에 도마처럼 주님을 향하여 그러한 고백을 하겠습니까?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주님을 피해서 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아니하는 악심에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해서 믿고 싶은데, 주님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도 우리가 잘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을 보고 믿는다는 말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에 대한 아무런 생각없이 무조건 믿으라는 말도 이 말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도마는 주님을 보고서 믿고 난 이후에 그 의심을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의심 이후에 그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우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마에게 주님이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담대하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러한 상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마의 의심은 이러한 측면에서 거룩한 의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마의 의심은 믿고 난 이후에 그 의심은 믿음에 대한 힘이 되었고 확신이 될 정도로 변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도마는 결정적인 아 이제 끝났다.’ 주님을 섬길 수 없는 어떤 상태로까지 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믿지 않겠다고 했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도마의 이러한 특징들을 아시고 도마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도마에게 믿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두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으로 다시 와서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1절에서 보면 마지막 주님과의 밤을 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마지막 밤에 요한복음에 의하면 많은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셨고 만찬을 제정하셨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 13장부터 나오는 많은 가르침과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우리가 읽었던 대로 22절에 배도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보좌와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계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나라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들을 때에 제자들은 굉장히 상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을 것입니다. 이 목적 하나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주님의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는 이 목적을 두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주님을 통해서 들을 때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굉장한 상기된 가운데서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지 않았나 보여집니다. 주님은 다시 한 번 보증해 주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했다. 내 나라에서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는 주님의 의지와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듣는 제자들은 상기된 가운데서 주님의 약속에 대한 이루어짐이 이제 왔나보다하며 상기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31절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계시해 주시기를 주님의 세우신 나라를 대적하는 어떤 존재의 나라와 서로 충돌하는 충돌과 관련해서 제자들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게시에 대해서 베드로의 반응은 그 세력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보아서 베드로는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만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하겠다고 하는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닌데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돈을 주고 고용하는 용병이 있습니다. 자기 나라는 아니지만 용병이 되기 위해서 지원을 하여 군인으로 생활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용병의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계시를 해 주셨는데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항상 대적하는 존재가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참으로 순종하려고 하면 반드시 영적인 싸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금은 민주주의로 자유와 평화가 우리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집회 참석하는데 있어서 누가 막거나 목숨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 우리들은 자유로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대이구나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주님의 말씀을 실제로 이루려고 한다면 그 대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대적이 사용하는 방식이 다양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는 사자요, 하나는 광명한 천사인데 지금 시대는 광명의 천사로 더 부각시키는 시대인 것으로 봅니다. 옛적에는 우는 사자처럼 믿는 자들을 죽였습니다. 실제로 물어 뜯어 죽였습니다. 지금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그 대적하는 목적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를 대적하는 것은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는 그 대적자의 대적 방법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모임을 참석하거나 주님의 말씀을 이루거나 하는 방해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적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적자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 대적자는 너희라고 하는 주님의 나라의 구성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전체 사람들에 관해서 자기 손에서 밀 까부르듯이 사단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의도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청구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구를 해야 되는 것이며 사단이 마음대로 못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하는 사단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사단은 밀 까부르듯 하기 위하여 청구를 했지만 주님은 베드로 한 개인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주님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 100%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혹시 육신적으로 구했거나 또는 자기 뜻을 따라 구하는 것 때문에,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방법이나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한 것이 말씀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100% 이루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 항상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말씀하시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주님은 사단의 존재와 사단의 활동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요 대언자로서 무한한 사랑과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저에게 감동이 되는 한마디는 너는 돌이킨 후에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번이나 부인할 것인데 네가 마음을 잘 추슬러서 돌이킨다면 아마 네 형제를 굳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조건이 아닙니다. 돌이키는 것은 100% 확정한 다음에 들어갑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는데 있어서 베드로의 결정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를 위해서 주님은 기도하셨고 그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반드시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말씀까지 인도가 될 수 있도록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인할지라도 말이지요.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나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베드로를 훨씬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옥에도 죽는데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말한 그 의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와 베드로 자신이 충분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 속에서 진정으로 주님 앞에 용병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주님 앞에서 말했습니다. ‘옥에도 죽는데도 갈 준비가 되어 있다그러나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베드로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이해하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 앞에 여러가지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도 그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도 잘 모르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 말을 모르고 한다는 것도 알고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도 어떤 면으로는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초창기에 부를 때의 계획처럼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할 터인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베드로를 훈련하시고 교훈하시고,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셨는데 이제 결정적인 어떤 상황에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때에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아셨고 베드로의 모든 고백이 베드로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함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계획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세 사람을 주님의 놀라운 도구로 만드신 주님을 놀라워하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을 들으면서 여러가지 반응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실수나 실패를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가볍게 여길 수가 있다고 봅니다. ‘베드로도 그랬는데 이런 것쯤이야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서 겸손하고 주님께서 참으로 이 말씀들을 통해서 누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가운데서 교제가 되어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는 바는 우리 모두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주님 앞에서 큰 실수와 실패를 했습니다만 그러나 가롯유다는 회복시킬 수 없었지만 이 세 사람들은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 사람을 회복시킬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그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근거 때문에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회복된 것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어떤 것을 그 사람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한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개인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관계가 비뚤어지고 영적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충실히 해야 됩니다. 그런 다음에 수직적인 관계를 확정한 다음에 수평적인 관계를 맺어야 그 관계가 주님 앞에서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역교회는 말씀에 따라서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교회는 주님을 주목해야 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하며 주님 앞에서 관계가 확정이 되어 있어야만 지역교회간의 교제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올바르게 인도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면서 나머지는 주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2 5 28일(월) 의왕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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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