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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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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2. 12:02 횃불/1980년

주 교사 샘터

깨끗함을 받은 나병환자

(누가복음 5:12-15/17:11-19)

처음 세 편의 복음서에는, 모두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초기에 문둥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나 누가복음서만이 문둥병자 열명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거의 끝부분에 가서 고침을 받는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사렛 설교는 누가복음에서만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말씀하시기를 엘리사 시대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4:27)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다른 나병환자를 치료하셨다( 7:22). 그리고 그분이 전도하시는 동안 엘리사 시대와 같이 많은 나병환자들이 그분에게 오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분에게 찾아온 사람이 거절을 당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문둥병은 파괴적인 죄의 본질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문둥이는 치료를 밭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접촉으로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로부터 격리시켰다. 이와같은 사실로 보아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5장에서 그를 안수하신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주께서는 그 문둥병자를 안수하셨을 때 감염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깨끗해졌다.

17장에서는 문둥이들이 율법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었다(12).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만이 깨끗함을 받은 후 감사하려고 돌아왔다. 그 때 그는 이미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릴 수 있었다(16). 이와는 대조적으로 5 12절에서는 한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온 몸에 문둥병의 상처가 퍼져 있었다. 이 사실을 볼 때 상기되는 것이 있다. 레위기 13 12절에 보면 문둥병자에 대하여 율법적으로 규정한 대책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문둥병으로 희어져 있으면 그 환자는 정하다하는 판결을 받았다. 문둥병은 인체의 조직 밖으로 표면화되어 분명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며 누가복음 5장의 문둥병자를 설명하는 것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부정함과 죄인된 상태를 전폭적으로 시인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상태에 있으며, 이때에만 깨끗하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5 12절에서 그 이전에 이 사람의 마음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두 가지 관점에서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며 흥미있는 일이다. 하나는 그를 깨끗케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며 다른 하나는 그 일을 행하시려는 그분의 의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능력에 관하여는 그 사람은 이미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意志(의지)에 관하여 그는 재빨리 증거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죄인을 위하여는 지극히 중요한 요점들이다. (1) 예수께서는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7:          25, 딤전 2:4).

17:11그가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라는 기록을 볼 때 이곳의 병고침은 그분의 죽음 전에 그분이 그 도시에 방문한 동안 마지막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맨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때를 맞추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것과 16 24절에서 부자가 너무 늦게 탄원하는 것과 대조해 보라.

 

 (1980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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