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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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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3. 07:25 횃불/1986년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8)

 

7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딤전 1:3)

잡다한 교훈들은 교회의 독소가 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경건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물질과 교계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왜곡시키거나 억지로 비틀고 있습니다. 제가 구원받던 해인 1900년에 불링거 박사는 전성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상한 논문 교회와 경륜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안에서 가르쳐지는 진리들로 기초가 닦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매력을 끌었습니다. 그가 지은 부자와 나사로라는 책은 옛날의 이단들을 소생시켰습니다.” “영혼의 잠이란 책은 그럴 듯하게 보였습니다. 앤더슨 베리 박사의 응수는 우리 건방진 젊은이들이 보기에 반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형제들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링거 신봉자들의 숫자는 늘어갔습니다. 우리는 고오든 선교회에서 탈퇴하여 조오지 스트리트에 있는 홀을 빌렸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일요일 밤에는 복음을 전했으며, 다른 3일 밤에는 불링거의 교회 서신들을 교과서로 사용하여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헬라어의 어원과 의미들을 토론하며 어린 비둘기들처럼 열린 입으로 불링거의 약을 아무 의심없이 삼켰습니다. 우리는 과도기,” “감옥 서신들<“닥칠 것들”>에 점점 정통해 갔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2명쯤 되는 우리 젊은이들은 목요일마다 오래 된 캐슬게이트로 서둘러 갔습니다. 풍적(風笛)소리와 변하는 군중들 틈에서 우리는 복음을 외쳤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우리에게 열매를 주셔서 몇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임에서 온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분명한 복음을 좋아하여 가끔 우리를 도와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집회소로 초청하거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도리들로 우리를 도와 주는 일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한명이 딱 한 번 우리를 초청하여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뒤에 앉아 있게 하고 그들이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구경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들이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반항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더해 주지 못했습니다. 물론 불링거리즘도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세워주거나 결합시키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맥이 곤경에 빠졌으므로 우리 중 2명이 그와 함께 남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프리맨틀까지 그를 데려갔으며 거기서 그와 헤어졌습니다. 저에게 보낸 그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가 퍼어쓰의 옥외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형제들이 그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적은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침례를 받고 우리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던 그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그와 그의 아내는 얼마 안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케네쓰 맥케이는 우리가 밟았던 단계의 진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남부 오스트레일리아의 미드랜드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맥을 아까워하는 마음을 결코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모임으로 인도되기만 했다면 그는 불링거리즘과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믿음의 파선으로부터 구출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거듭거듭 되풀이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초기에 알고 있던 남녀들 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곧은 길을 달려 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제가 주님의 자비와 인내로 말미암아 그분의 이름이 있는 영문(營門) 밖으로 인도되지 않았다면 저도 역시 영적으로 고립되었거나 불링거리즘을 극단으로까지 물고 갔을 것입니다.

나중에 토론토에 있을 때 저는 한 성직자가 영원한 형벌을 부인하고 로마서 15:21을 근거로 하여 회중들에게 두 번째의 기회가 있다고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임과 관련되어 구원받은 어린 남녀들은 영적인 우회 여행과 시간 낭비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준 유산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동안 저는 물질적으로는 잘 지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지식에 있어서나 경건에 있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1905년 초기에 캐나다를 보고 싶어 하던 저의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저는 단풍나무 잎의 땅과 곧바로 사랑에 빠져들었습니다. 저의동료도 역시 믿는다고 고백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자리를 찾으려고 G.T.R.사무실로 갔을 때 지배인이 우리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애버딘에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애버딘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기를 애버딘 사람은 결코 믿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말을 약간 날카롭고도 아주 엄숙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는 제 친구에게 괜찮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몇 분이 지나자 그는 다시 나와 우라의 일자리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저녁부터 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토론토에서 저는 주님의 모든 말씀이 실천되는 곳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저는 닥칠 것들이라는 불링거의 잡지의 독자들과 접촉을 가졌습니다. 그 잡지는 교회는 황폐되었기 때문에오직 개인적인 전도만 있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침례, 주님의 만찬, 교제, 증거, 징계 등은 모두 감옥 서신들밖에 있는 것들로서 현재의 경륜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초경륜주의는 우리에게서 하나님 말씀의 더 중요한 부분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것은 교제와 성장을 갈망하는 저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옥외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되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가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험삼아 여러 교회들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저는 킹 스트리트에 있는 한 교회로 가보았습니다. 설교자는 요한복음 8장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가 삽입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본문을 변경하거나 얼버무린 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는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그 성직자의 말은 저에게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성경을 전파하라고 급료를 받는 성직자들은 엉뚱하게도 제 마음에 의심만을 심어 놓으려 했습니다. 성경을 그와 같이 부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저는 싫었습니다. 그 다음에 저는 시험삼아 선교회들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자들로 하여금 설교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그것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한테도 헌금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저를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틀림없이 저도 극단적인 불링거 신봉자적 말씀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복음과 복음 사역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토요일 밤 저는 한 그리스도인이 퀴 스트리트 이스트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 친구에게 그는 복음을 잘 전하고 있으니 잠깐 들어보자고 말했습니다.(저는 나중에 그분의 이름이 휴 워커(Hugh Walker)씨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잘 전했습니다. 저는 그 훌륭한 남녀들의 무리에 대해 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말씀이 끝나자 두 명의남자들이 우리를 붙잡았습니다. 저는 그들의 액센트로 미루어 그들이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알고 만족히 여긴 후에 그들 중 한 명이 형제님들은 누구한테로 모이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처음에 너무 강한 약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훌륭한 무리가 형제들한테 소속되어 있음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들과 떨어지면서 저는 친구에게 우리가 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발견했는데도 그들이 플리머드 형제들로 판명된 것을 생각하니 아주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또다시 속으로 탄식하며 주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없습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브로드뷰에 있는 집회소에서 집회를 가지고 있다고 광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 저녁에 그곳으로 가서 훌륭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집회소는 꽤 큰 곳이었는데 사람들은 문에까지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군중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추측컨데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이곳에 안 오겠다고 결심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2년 후에 바로 그 집회 장소에서 침례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는 G.T.R.에서 잘 해나가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제가 수 년 전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을 부양해야 할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약혼 상태로 지내왔기 때문에 이제는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교훈에 관해 한 마음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저처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같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우리를 보려고 찾아오곤 했던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가 되었습니다. 많은 대화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복스러운 주넘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의 참된 성장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황폐되어 있었기 때문에우리를 함께 묶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헛되이 실천하고 있던 분리적인 가르침 때문에 집단적인 간증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복음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종류의 그리스도인들과 접촉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우리를 그들의 장소로 초청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북쪽 끝에 있는 어떤 부자집에서 열리던 메마르고 형식적인 성경 공부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 성경 공부에는 사회적인 신분에 걸맞게 잘 차려 입은 12명 남짓한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응접실집회들은 형식과 냉랭함으로 인해 망쳐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기만 당한 우리 마음을 녹일만한 열정이나 열기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형편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회들로도 초청을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더 많은 할렐루야와 열정이 있는 것같이 보였지만 사용되는 방법들은 성경과 맞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는 모모씨의 교회에 가보라는 권고를 받고 거기와 그가 일요일 오후에 설교하는 Y M.C.A.로도 여러번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것은 일인 사역의 수정된 형태에 불과했으며, 그는 교회의 실천 사항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86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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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