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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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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3. 07:22 횃불/1987년

믿음과 행위

(야고보서 2:14~26)

윌리암 맥도날드

이 단락은 아마도 야고보서에서 가장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일 것입니다. 심지어 루터처럼 훌륭한 인물도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바울의 주장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갈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단들은 흔히 이 단락을 사용하여 우리가 믿음 더하기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자신의 구주로 믿어야 하지만 이것만으론 충분치 않고 그분의 구속 사역에다 우리 자신의 자선과 헌신의 행위를 더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란 제목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단 속에는 우리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칭의(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관한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3:24).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음을 뜻하며 사실은 그 반대의 것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 5:1).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5:9). 여기에서의 피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도록 지불되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죄의 빚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갚아졌으며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경건치 못한 죄인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으며( 8:33) 여기에서의 진리는 의롭다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2:24). 행위는 우리의 믿음의 실재의 외적인 증거입니다. 행위는 볼 수 없는 것을 밖으로 표현 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사람이 은혜로, 피로, 하나님으로 그리고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모순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내용은 단지 동일한 진리의 다른 면들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원칙이며. 믿음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피는 구주께서 치루셔야만 했던 값이며, 하나님께서는 칭의에 있어서 적극적인 주선인(Agent)이시며, 행위는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헬렌 쇼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선택하여

하늘에 있을 곳을 마련해 주셨네.

이것이 그분의 뜻이었으니

나는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네.

 

때가 되자 그리스도에서 십자가에 죽으셨네.

거기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가장 더러운 자를 눈 같이 희게 했으니

나는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네.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심으로 서약하셨으니

악한 의심들은 사라져야지.

그분의 부활이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니

나는 능력으로 의롬다 하심을 얻었다네.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여 성경으로 데려갔고

나는 진리를 깨달았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네.

 

이제 누가 나를 그리스도께 속한자인

지 아닌지 의심한다면

나는 행위로 보이리라.

내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나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네.

 

나는 주님을 찬양한다.

은혜, 믿음, , 부활의 능력, 행위

이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으니

나는 하나님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네.

 

행함 없는 믿음은 무기력함(2:14)

야고보는 선행을 낳지 않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구절에 이해를 크게 돕는 열쇠는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야고보는 만일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하지 않고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야고보는 그저 믿음의 고백만 가진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의 삶 속에 그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째로 도움이 되는 열쇠는 14절의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질문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종류의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야고보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믿음을 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14절의 초반부에 나와있습니다. 그는 선행으로 지지를 받지 않는, 말뿐인 믿음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말 뿐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행함 없는 믿음을 예시함(2:15~16)

이제 야고보는 우리에게 두 사람을 소개함으로써 행함 없는 믿음의 무익함을 예시합니다. 한 사람은 필요한 음식과 의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둘 다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눠주려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자기 형제에게 대단히 너그러운 것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가셔서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드십시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와 같은 말에 어떤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전혀 무익할 뿐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식욕을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지도 못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 (2:17)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죽은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전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믿음 더하기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고집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다 이루신 사역을 욕되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라는 두 구주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만이 단 하나의 유일한 구주이시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의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행의 삶을 낳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열매이며,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음(2:18)

참된 믿음과 선한 행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야고보는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을 예로 듭니다. 첫 번째 사람은 진짜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18절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선행으로 그 믿음을 실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에게 반박할 수 없는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18절을 풀어 쓰자면 그는 다음과 같이 당연한 말을 합니다. “그래. 당신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을 증명할 행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믿음이 선행의 삶으로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행의 삶이 없는 믿음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데 그것을 저에게 증명해보십시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실증하는 삶에 의해서 입니다. 저는 행위로 제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구절의 열쇠는 보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행함이 없이 믿음을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적인 동의로는 충분치 못함(2:19~20)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첫 번째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고백은 잘 알려진 사실에 지적(知的)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적 동의는 헌신을 수반하지 않으며 변화된 삶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물론 이것은 필수적이긴 합니다만 충분치는 못한 것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결국에 가서 그분께 받게 될 형벌을 생각하고 떱니다. 귀신들은 사실을 믿으면서도 그분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을 진실로 믿으면 이것은 영, , 몸의 온전한 헌신을 수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화된 삶을 낳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예(2:21~25)

이제 역사하는 믿음에 관하여 두 사람의 예가 구약으로부터 제시되는데 그 중 하나는 유대인 아브라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 진리를 합당한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 창세기 15:6절을 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매 여호와께서 바로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음을 읽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단에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마자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7() 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드림으로써 자기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을 실증했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의 믿음이 단지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마음의 헌신이라는 것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는 현장에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의 믿음의 실재를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은 아무도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따라왔던 젊은이가 멀지 않은 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삭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기꺼이 죽이려 했던 것은 성경 기록에 보존되어 옴으로써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위를 불러 일으켰고 이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전자는 후자를 만들어내며 후자는 전자를 입증합니다. 이삭을 드리는 것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제적인 증거를 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는 성경의 실제적인 성취였습니다. 그의 선행은 그가 하나님의 친구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24).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이 믿음 더하기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사람 앞에서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믿는 순간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믿음의 실재를 나에게 보이시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한 행위에 의해서입니다

구약으로부터의 두 번째 예는 기생 라합입니다(25). 물론 그녀는 좋은 성품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자(, 첩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어리고 성에 살던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승승장구하던 군대가 여리고 성을 향하여 오고 있다는 소문과 이 군대를 대적한 나라가 아무도 없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 어떤 값을 치뤄서라도 이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첩자들이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그들의 편이 되어 그들을 도와주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 그녀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했습니다. 그녀는 첩자들을 은닉해 줌으로써 구원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접대의 행위는 그녀가 진짜로 믿는 자였음을 증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사용하여 구원이 선행으로 얻어진다고 증명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선행은 자선 행위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 교회에 잘 다니는 것을 뜻합니다. 이린 것들이 아브라함과 라합의 선행이었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것은 자기 아들을 기꺼이 죽이려는 것이었고 라합의 경우에 그것은 반역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두 사람의 행동에서 믿음을 빼버린다면 그들은 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에서 믿음을 제거하면 그들은 부도덕하고 냉혹한 사람들이 될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맥킨토쉬는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합니다. “이 단락은 생명의 행위를 말하고 있지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에서 믿음을 빼버리면 그들의 행위는 나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믿음의 열매로 본다면 그들의 행위는 생명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는 가르침에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이 단락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살인과 반역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임(2:26)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끝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이 구절에서 단락의 문제가 매우 아름답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인간의 몸에 비유했고 행위를 영혼에 비유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은 생명이 없고 가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아무 효력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짜 믿음이지 구원하는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이제 전체를 요약한다면 야고보는 다음의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나는 의복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검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배고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음식을 절약하고 있는가? 나는 생명의 떡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아브라함처럼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려 하는가? 나는 라합처럼 그리스도께 충성하기 위해 세상을 기꺼이 배반하려 하는가?

 

(1987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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