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2. 11. 23. 07:24 횃불/1987년

사라

 

이름이 명예롭게 기록된 여인( 18:1~15, 21:1~13).

 

무대는 기원 전 2,000년의 헤브론입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나이 89세나 된 그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아이를 갖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아이를 기다려 왔다 할지라도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25년 전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라는 지난 해를 회고해 보았습니다····

그들은 남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인 우르에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우르가 역사 가운데서 그 전성기는 지나갔을지라도 아직도 번영하고 있었으며 그 기술자들은 애굽 다음 가는 솜씨를 자랑했습니다. 항구에 있는 선박들은 동양에서 곡식과 교환한 상품을 가져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유했고 넓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녀와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그들의 시간을 즐기면서 친척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삶에 일대변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출현은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할 만큼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숭배하던 태양신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본토친척을 떠나서 그분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는 약속과 함께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사라는 남편의 결정에 순응했습니다. 그들은 졸지에 안락한 도시의 부유한 시민이 아니라 반 유목민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그녀도 미지의 미래에 직면하기 위하여 자기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순복했고 남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들은 짐승들 때문에 여러 달 동안 천천히 땅을 가로질러 여행하다가 마침내 북서쪽으로 600마일쯤 떨어진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으며 생활은 비록 우르에서처럼 훌륭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다시 조금 더 안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유랑생활 보다는 훨씬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번에는 남서쪽으로였습니다. 약간 더 나았던 그녀의 안전은 이것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할 기회가 매우 제한된 그 당시에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가까운 친족 중에서 배우자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친척들은 모두 하란에 있는데다가 이제 아버지 마저 죽었으니 그들의 삶은 더욱 외롭게 되었습니다. 오직 조카 롯만이 그들의 여행에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계속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록 나이 늙어 아브라함은 75세 그녀는 65세였지만 아직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변치 않는 서로간의 사랑과 존경을 계속 경험해 왔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처럼 잘 계발된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신을 남편에게 적응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그녀 특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자유로 인해 남편에게 자기 자신을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가 회상했던 바 대로 그녀의 남편과의 관계는 그녀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그녀를 신실하고 강한 여인으로 만들었고 그녀로 하여금 매사에 굴하지 않고 견고하게 했으며 그녀의 남편과 조화를 이루며 살게 했습니다.

그녀가 그에게 순종하여 첫째 자리를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도 그녀를 존중했고 그녀의 충고를 들었으며 우정으로 그녀를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상호 관심사와 일상의 문제를 서로 의논하는 연인이자 친구였습니다.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생활과 영적인 짧은 건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세겜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약속된 자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기근이 그 땅에 닥쳐왔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가족과 가축들을 위한 음식을 구하려고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충고도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는 방향으로 갔던 것입니다.

애굽은 편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라가 아름다웠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애굽인들이 아내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전하겠노라.” 그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말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하고 그녀는 의심했습니다.

방랑 생활의 시작에 이 전략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마음이 맞았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로 그들의 양심을 진정시켰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이것이 그릴듯하게 들렸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는 배반을 당했다고 느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아름다움은 주목을 받았으며 그녀는 바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그녀의 순결을 위태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사라로 하여금 남편이 그들의 자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신뢰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큰 재앙을 통하여 이방 왕에게 사태가 어떠한지를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녀는 이 모든 일의 결과로서 남편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잃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는 그의 주춧대를 떠났고 그녀의 자그마한 안전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애굽의 어린 여종 하갈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약속된 자손이 없이 수년이 흘러갔을 때 아브라함은 아마도 양자를 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 자식이 그의 가족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인 엘리에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서 잉태친 아들이 상속인이 되리라고 이미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자손에 관한 약속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며 맹세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되풀이하기는 하셨지만 그것을 이 행하시는 데는 더디셨습니다.

그녀는 믿음의 삶을 살려면 인간적인 안전을 기대하지도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인내가 요구된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과 인내는 동행했습니다. 이것들은 상품처럼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삶의 고난학교를 통해 배워야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녀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견고한 토대 위에 두어야지 인간적인 가능성 위에다 두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급해졌습니다. 자기가 너무 늙어서 임신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녀는 아브라함에게 애굽인 하녀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이도록 제안했습니다( 16).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그 당시의 관습에 순응했으며 그와 같은 일들은 흔히 있었습니다. 아마 그녀는 남편에게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약속했던 자신의 결혼 계약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합법적으로 변호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가 행한 일은 잘못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믿음이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자기 부인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큰 희생을 치르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약속된 아들이 그녀 자신의 아이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변명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자기가 정해놓은 시간에 어떤 값을 치루어서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기를 필사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희생을 치루었을까요? 그때까지 10년이라는, 기다림의 긴 시간은 거의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진짜 문제는 그녀의 인내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그것에 대하여 비싼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녀의 말을 듣도록 영향을 주었을까요? 이것은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살았던 아담처럼 그는 아내의 잘못된 제안을 들음으로써 쓰디쓴 열매를 따고 말았습니다. , 어째서 그는 그녀의 말을 들었을까요?

그 결과들은 거의 즉시 명백해졌습니다. 불신과 성급함의 죄는 하갈의 자궁에서 아이가 오래 있기도 전에 열매를 맺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의 가정은 불만과 평화의 부족으로 인해 갈갈이 찢겼습니다. 하갈은 우월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사라는 자기가 솔선하여 그 불행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해 있었던 탓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거나 회개하는 일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 대신에 그녀는 남편을 비난했습니다. 또 그녀는 하갈을 너무 심히 대했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그 젊은 여인은 아마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라는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녀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 사람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벌려고 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갑자기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와서 그의 앞에 서있는 손님들을 접대하기에 매우 바빴습니다. 그들의 방문 동안 사라는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섬기는 시간이 왔을 때 그녀는 남자에게 지배를 받는 동양의 관습을 좇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의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그녀는 장막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그들은 나에 관하여 무엇을 더 알고 있을까?’

아브라함이 장막에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자 깜짝 놀랄만한 말이 들려왔습니다. “일년이 지나면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사람들은 여전히 등을 장막 쪽으로 향하여 앉아 있었으므로 사라는 자신이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이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자기 그녀의 생각이 현실로 되돌아왔습니다. 깜짝 놀랍게도 그녀는 입 밖에 내지도 않은 그녀의 생각들을 그들이 알아채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라가 왜 웃으매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아들이 약속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서 그분은 그들의 이름을 바꾸셨었습니다. ‘높음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람 대신에 그의 새 이름은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사래는 여주(女主)’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었습니디.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다림의 시간이 끝에 다가왔다는 것을 오직 그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라에게도 직접 말씀하시려 오셨습니다.

 

다음 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삭이라는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존해 있는 동안 이삭은 그의 부모에게 그들이 그의 이름 뒤에 의문부호를 붙였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후에 이 의문부호를 감탄부호로 바꾸셨습니다).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는 사라의 실수의 결과는 계속하여 매우 심각해졌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젖 떼는 날에 이삭을 조롱했기 때문에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그 죄에 참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애굽인을 그의 아들과 함께 내쫓았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역시 사랑하셨지만 이삭과 이스마엘의 자손들 사이에 점점 뚜렷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라는 이삭이 태어난 후 37년 밖에 더 살지 못한 관계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 전개되는 고통과 슬픔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과 이삭의 후손인 유대인은 영원한 원수가 되었습니다. 수 세기 후에도 중동지역의 문제들은 여전히 그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성급했던 한 행동이 이처럼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만약 사라가 알았더라면 그녀는 얼마나 슬퍼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사라의 이야기를 슬프게 끝내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묘사하는 히브리서 11장의 첫 번째 여성은 사라입니다. 거기에서 그녀는 명예롭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녀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가지고 있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녀의 긴 생애 동안 계속 성장했습니다. 생은 사라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고 바라는 많은 것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녀는 고난과 실망을 모두 경험 했으며 이것에 대해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환경을 바꾸는 일에 유연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남편에게 순응시켰습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복종함으로써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쁜 감정이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또 그들은 행복감과 만족감과 하나님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지배를 받는 건강한 감정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좋은 건강과 장수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라의 외모의 아름다움과 생기의 비결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그녀를 본받으라고 모든 여성에게 도전합니다(벧전 3:6). 왜냐하면 사라는 모든 여성들 중에서 참으로 여주(女主)이기 때문입니다.

 

(19871월호)

 

'횃불 > 1987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느낌이 아니라 믿음  (0) 2012.11.23
석탄  (0) 2012.11.23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삼위일체  (0) 2012.11.23
나무를 죽이는 식물  (0) 2012.11.23
자비로운 주 하나님  (0) 2012.11.23
믿음과 행위  (0) 2012.11.23
만년필  (0) 2012.11.2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  (0) 2012.11.23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