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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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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4. 08:54 횃불/1987년

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에서처럼 선한 사람보다 야곱처럼 부정직한 사람을 축복하실 수 있었을까요?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 야곱이 술책을 부려 자기 형 에서의 장자명분과 자기 삼촌 라반의 양떼들을 앗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믿어지는 통념으로서 지난 3천여 년 동안 반복되는 반유대주의 물결을 지지하는, 제일 인기 있는 신화들 중의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자기 조상의 성격을 물려받아 그 결과 오직 돈과 권세에만 관심을 가진 부정직한 농간자가 되었다고 믿는 일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을 신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순간적인 연약성 때문에 교활한 동생 야곱에게 합법적인 유산을 사취당한 에서는 위엄 있는, 밖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형()의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에돔 족속의 조상인데 이 족속은 현재 멸종되었지만 그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비이스라엘계 자손들과 섞이어 아랍 사람들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5-35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참된 성격에 대해 훨씬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동이였으며 에서가 약간 먼저 태어났습니다. 이 두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모에게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5:23).

이 신적인 배열에는 아무런 잘못이 얼었습니다. 장자가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받아야 한다든지 또는 아담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신적인 혈통의 특별한 경우를 살펴보아도 장자가 그 혈통을 유지해야 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메시아 혈통 가운데 셋, , 이삭, 유다, 다윗, 그 밖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장차 오시기로 되어 있던 구주를 통해 세상을 구속(救贖)하려고 각 가족 중에서 마음이 하나님 뜻과 계획에 가장 잘 맞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들의 성격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고 그것을 그들의 부모에게 분명히 알리셨던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라기 1:2,3).

에서의 성격은 육적인 요구에 바쳐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사냥 기술을 익히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다는 것과 가정 일은 거의 돕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가족의 중대한 영적 유산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백성가운데서 아내를 취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가나안 족속 중의 하나인 헷족속 가운데서 두 명의 아내를 취한 것으로 더욱 증명됩니다(창세기 26:34,35).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plain)" 사람이었습니다(창세기 25:27). 중요한 점은 "조용한이란 단어가 대개 "온전한(perfect)"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와 동일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으며,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으며, 특히 중요한 것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대로 자신의 영적인 장자의 명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노년에(이 때 그의 나이는 100세가 넘어 있었습니다) 에서를 편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에서가 이삭을 위해 맛 있는 고기를 획득하고 준비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5:28, 27:1-4). 에서는 야곱에게 해야 마땅한 축복을 에서에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창세기 27:29 12:3, 25:23과 비교해 보십시오). "축복"은 원래 아브라함과 그 다음에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예언적 약속, 곧 모든 족속이 그의 씨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며 그 씨는 어느 날 우주적으로 으뜸이 되실 것이라는 약속을 수반합니다. 반면에 "장자의 명분"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가족을 인도할 권리. 곧 다 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제단에서 그 일을 주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초기의 역사와 및 장례를 위한 모든 은혜로운 약속과 더불어 가족에게 전달하는 권리였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망령된 자"였던 에서는 얼마 전에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히브리서 12:16). 이 장자의 명분이 장자에게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명령적이 아니라) 관습적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에서는 그와같은 권리가 자기에게 아무 가치 없다고 생각했음에 반해 야곱은 그 특권을 간절히 사모했으며 야곱이 제안한 거래가 부적당했다는 지적도 없습니다. 더욱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행사하는 일에 휠씬 더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습니다"(창세기 25:34).

이렇게 하여 야곱은 장자의 명분의 책임과 특권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합법적으로 자기 것이 된 부친의 축복도 얻기 위해 자기 모친이 제안한 전략 곧 눈 먼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가 에서임을 믿게 하라는 전략에 동의했습니다. 야곱이 처음에 그녀의 술책에 반대를 표명하자 리브가는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사용하여 야곱에게 자식으로서의 순종을 요구했고 모든 책임은 그녀가 떠맡았습니다(창세기 27:13).

리브가는 이 술책으로 인해 큰 값을 치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날 이후로 야곱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어쩔 수 없이 에서를 피해 달아나게 되었고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나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야곱도 역시, 비록 그가 자기 모친에게 순종하여 합법적으로 자기 소유가 된 것을 획득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는 할지라도 부친을 속인 죄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방법에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뢰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부친의 불순종을 다스림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기다렸어야 마땅합니다

하여튼 매우 중요한 점은 여호와께서 그날 밤 꿈 속에서 야곱을 만나셨을 때(창세기 28:12-15) 그에게 책망의 말씀은 한 마디도 안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축복하시며 그의 씨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만 하심으로써 그의 부친이 했던 축복을 확고히 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전략에 묶이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불합리합니다. 이삭이나 에서가 어떤 일을 했을지라도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그의 삼촌 라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최초로 이루어졌습니다. 라반이 약속한 아내의 문제에 있어서 처음 그를 속였고(창세기 29:20,25) 그 다음에 약속한 임금 문제에 있어서 여러 번 그를 속이는 등(창세기 31:38-42) 자꾸 그를 속였을지라도 그의 신실하고 유능한 봉사는 라반에게 큰 번창을 안겨주었습니다(창세기 30:27·30). 이와같은 그의 신실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 소유의 양떼를 불어나게 하심으로써 그를 축복하셨습니다(창세기 31:5-13).

야곱은 완전치는 못했지만 모든 성경가운데에서 가장 품위 있고 경건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음은 틀림 없는 사실이며 그의 형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혹 어떤 사람이 왜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로마서 9:13-15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옳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사실입니다. 그 누구든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로마서 9:20). 우리가 온전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든지 안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하시는 어떤 말씀이나 일에 대해서도 선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지혜와 최대의 행복은 그저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1987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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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