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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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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3. 07:44 횃불/1987년

믿음에 관한 의문들

-N. 크로포드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 "성숙한 확신"은 서로 다른 것일까요? 믿음은 확신을 필요로 할까요? 믿음은 증거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요? 믿음과 소망은 끝나지만 사랑만 영원한 것입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성숙한 확신

주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믿음을 사용하여 "천국에서 큰 자'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예를 제시하셨습니다( 18:1~4). 믿음은 어린 아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아주 겸손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팔에 안긴 아기처럼 완전한 무기력의 시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겸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의 의존하는 태도를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성장해 가는 것이며(살후 1:3) 우리는 바로 이 믿음의 성장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를 통하여 성도들이 경험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했을 때 그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증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시련은 승리로 바뀌었으며, 고통은 찬양으로 변했고, 슬픔은 영적인 유익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의 청년들이 하나님에서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한 것은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였습니다. 베드로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할 때 그는 바로 이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영적인 경험의 학교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근거는 우리의 경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그릇된 해석에 항상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대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다루심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때조차 우리는 그분을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주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증가해 감에 따라 믿음도 역시 크게 성장해 갑니다. 한 때 매우 제한된 이해력과 더불어 희미하게 깨달아지던 진리는 빛을 밝히시는 위대하신 성령님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무게와 힘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서 깨달아집니다.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그리스도)에 관한 것"( 24:27)은 믿음의 양식이며 성령님께서는 바로 이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점유되기를 기뻐하십니다( 16:14). 일례로서. 성경 학도들은 성령님에 의해 깨우침을 받을 때 구약의 예언과 약속들과 예화들과 그림들과 그림자들과 상징들 속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보고 자기 영혼 속에 넘쳐나는 기쁨과 놀람과 경외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처럼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5:10). 믿음과 성경과의 관계를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입니다. ( 10:17).

 

믿음은 온전한 확신을 필요로 할까요?

그리스도 안에는 "온전한 믿음"이 있으며( 10:22) 이것을 바울은 "원만한 이해"로 칭했습니다( 2:2).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그렇기 때문에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의 특별한 과녁이 되는 것입니다( 6:16). 바울은 골로새의 믿는 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함이니"( 2:7,4). 믿음의 생활은 일종의 전투입니다. 사단은 화전으로 믿음을 공격하며 이것이 일단 마음을 꿰뚫으면 오래탑니다. "믿음의 방패"는 투사로 하여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게"해 줍니다( 6:16). 주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으로 사단의 모든 공격에 대처하셨으며 이것은 우리로 믿음의 방패의 유효성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4:1-11).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할 때 (딤후 3:14) 그는 "미쁜"(faithful)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동사형을 사용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전·후서에는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 믿음의 온전한 확신은 우리가 마귀의 공격에 노출된 채 적의(敵意)의 현장에 남아 있는 한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증거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질문이며,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탈된 답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믿음을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기독교 옹호론"(apologetics)은 모든 인간의 교만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아무 증거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입장을 믿음의 토대가 하나님의 권위라고 가르쳤던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권위가 성경과 "교회" 안에 표현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정의는 이성이나 논리, 또는 확증이나 증거와 무관한 것으로서 무모한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믿음의 증거에 호소하는 내용이 계속 나온다는 것을 보이고자 합니다.

믿음은 이성이나 논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라는 이 진리 자체가 인간의 최고 이성을 능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에 비교될 수 있는 분이 아님과 동시에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 11:27).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많은 진리들 역시 인간의 최고 이성을 훨씬 능가합니다. 성경의 진리들은 인간 지성의 산출품이 아니므로 인간의 이성으로 전부 이해할 수는 결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에 반대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단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성은 우리가 이 복된 진리들을 즐기는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진리들의 위대성은 우리의 영혼 속에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며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더욱 불러 일으킵니다. 로마서 8:26에 나온 말씀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한계성(limitations)을 도우시나니····"

반면에 우리가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우리의 머리를 잘라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믿을 만한 증거들이 풍성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자신이 이방 세계의 종교들보다 지고(至高)하다는 것을 증명하실 때 그분은 믿음을 위한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사야 41 장부터 46장까지 일련의 증거들이 죽 제시되다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요약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46:9-10). 믿음을 위한 이 강력한 증거들은 하나님께서 장래를 미리 예언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전지(全知)를 증거하신 사실과 자신의 모략을 서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주권을 증명하신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믿음을 위해 여전히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돌로 치려는 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10:31~38). 그 일은 믿음을 위한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이것은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했던 논증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22). 물론 이 표적들이 지상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음에는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것이 믿음과 증거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변개시키지는 않습니다.

기록상으로 주 예수님이 공적으로 말씀을 처음 전하신 것은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14:21).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믿음을 위한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5:39). 믿음을 위한 이와 같은 증거는 20세기 사림들에게 적절한 것입니다. 요한과 이사야는 이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주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음을 신중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특징입니다. 제시된 증거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성경을 자세히 성취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에 대한 얘를 든다면 십자가 밑에 있던 군병들이 구주의 웃을 도박한 것이 있습니다. 믿음을 위한 증거는 부활에 관한 기록의 모든 점에서도 역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그 증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은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1:3). 이 확실한 증거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일에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증거들에 대해 오늘까지 하나님께 더욱 감사를 드리는 것은 빈 무덤 속에 있는, 비어 있는 수의와 자기 몸에 죽음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는, 살아계신 주님 보다 더 강력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도 도마와 함께 서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했던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끝나지만 사랑은 영원합니까?

소망이 끝나고 믿음이 보이는 것에게 길을 비켜주게 될 순간을 묘사하는 말들이 지금까지 많이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들 안에는 많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고린도후서 5:7의 분명한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 문맥적으로 살펴볼 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가 몸이라는 집에 있을 때와 관계가 있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천국 집에 있을 때와 관계가 있습니다. 차후의 문맥은 우리가 신음하는 현재의 장막의 한계성 및 썩어 없어질 것들을 모두 삼켜버리고 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에 관한 기대감과 관련 지어져 있습니다. 점점 쇠퇴해 가는 이 썩어질 몸 안에는 우리를 위해 예비된 영광의 미래에 관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아는 것이지 보이는 것으로 알지 않습니다. 이 문맥 안에는 믿음과 보이는 것이 명백하게 대조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것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믿음이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과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보다 휠씬 사실적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믿음의 극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벧전 1:9). 그리고 우리의 현재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것은 사실이지만( 11: 1) 이 믿음은 실제로 끝나게 될까요?

아마도 문제는 우리 자신이 내리는 정의(定義)에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 예수님을 보는 그 순간에 믿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란 것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 두는 온전한 확신으로 이해한다면 보이는 것은 믿음을 확고히 하고 강화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토록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 것입니다.

로마서 8:24-25에 나오는 소망은 몸의 구속(救贖)과 관계 있습니다(23). 이 중대한 사건이 일단 발생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축복은 계속될지라도 그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래에 대한 전망을 수반하지 않는 소망은 전혀 없는 것 같으며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자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2:7). 거기에는 우리의 영혼을 영원토록 사로잡는 "윗 쪽으로 향하는 것", "더 높은 것", "더 큰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믿음과 소망에 관한 올바른 정의라면 이것들도 사랑과 더불어 영원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19873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