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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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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A. 바네스

칼빈주의는 성령님이 택한 자의 마음에서만 역사하고 그분의 권고하심은 거절될 수 없는 따라서 “불가항력의 은혜” 라고 주장한다. 다시 한번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우리의 논제가 그것들이 공존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령의 사람 안에서) 구원받으려는 누군가를 위해 일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개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명령 받고 있다, 즉 회개하라.

 

구원에서 성령님의 사역

주 예수님께서 요 16:8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셨던” 동일한 세상(요 3:16)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신 동일한 세상으로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래서 성령님은 죄, 의와 심판에 대해서 (단지 택한 자가 아니라) 세상을 책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요점은 그것이 단어의 의미하는 폭을 고려하는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관련된 헬라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빛으로 가져오는”의 의미인 ejlevgcw(엘렌코오)이다. 영어 번역에 대해 제공된 가능성 중 하나는 스트롱 사전이다(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용어사전과 일치):  “정죄, 확신시킴, 잘못을 말함, 훈계하다, 책망하다.” J.N 다비의 (새 번역)에서 “증거를 가져오다”; 영어 개정판 의 “정죄”; 로버트 제미슨, A.R. 포세, 그리고 데이비드 브라운 (완전한 성경에 비평과 해설의 주석, 1871): “확신시킴”(영어 단어의 책망은 라틴 단어 “설득하다”에서 온 것을 주목하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설득하다), 동시에 다른 번역은 “드러내는 것”을 포함한다.

 

마빈 빈센트(1834-1922)는 “그들의 실제 본성의 무지에 관해 (세상을) 정죄할 것”에 대한 의미를 확대했다(신약 단어 연구, 에드맨스, 그랜드 래피즈, 1946), 하지만 프리츠 라이네커(1897-1965)는 확대하여 “입증할 수 있는 증거와 함께 증명하려고 하는 책망”으로 유용하게 제공했다(헬라어 신약성경에 대한 언어 핵심, 존더반, 그랜드 래피즈, 1980). 또 다르게 지적했던 것은 “흠정역에서 번역된 단어 '책망하다'를 영어로 만족할 만큼 번역하기가 다소 어렵다, (그러한 의미의 충분함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 결정적인 판단, 권위 있는 시험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B.F. 웨스트코트(1901-1825)가 이전에, 영국의 캠브리지 왕실의 신성한 교수직에서 쓴 것을 주목한다: “의심할 여지없는 증거, 결정적인 판단, 권위 있는 시험과 징벌의 능력의 개념을 포함한다. 그분은 그 앞에 분명한 빛 안에서 진리를 또 다른 위치에서 ‘책망’하시는 분이시며, 그래서 그것은 진리로 보여지고 인정되어야 하며 … 그분께서 그때 거절되셨고 … 자신의 사정을 잘 알면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것을 거절한다”(성. 요한에 따른 복음서, 그랜드 래피즈, 미시간: 윌리엄 B. 에드먼즈 출판사, 1971, P. 228).

 

요약하면 우리는 “책망하다”가 죄, 의, 그리고 심판의 실재, 진리, 그리고 심각성에 대한 충분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증거 없이는 죄인들이 회개할 수 없고 회개하지 않을 것이지만, 일단 그것을 갖게 되면 그들은 회개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은 “성령님께서 말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증거를 거절할 수 있는가?” 스데반은 산헤드린에서 말했다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행 7:51). 동사 “거역하다”는 빈센트(워드 연구)에 의해 설명하듯이 “적극적인 반항을 의미하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여기에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고의적인 강한 반항의 한 예가 있다.

 

성령님의 충분한 증거가 거부되면 반드시 성령님을 신성모독 하는 (악마의 소리)(마 12:31)가 있고 그분을 모욕한다(히 10:29). 만일 이것이 지속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않을 것이다. 대홍수 시대조차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항변하다, JND) 아니하리니”(창 6:3). 이것은 심지어 그 악한 시대에 성령님이 에녹과 노아의 걸음과 증거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할 필요한 증거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벧전 3:19; 벧후 2:5-9, 유 14).

이는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 복음을 듣는 자들이 그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양심에 따라 신성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은 일반적으로 영적으로 죽었지만, 복음을 듣는 자들은 성령에 의해 이러한 중요한 문제의 진리를 보도록 충분한 증거가 제공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평형상태를 벗어나 성령을 떠난다면, 그때 우리는 복음에서 행해지는 사람의 책임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다; 일단 우리가 그분의 사역을 이해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은 가능성을 본다.

 

복음의 부르심

복음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초대이다”라고 F.F. 브루스는 썼다(에베소서, 피커링과 잉글리스, 런던, 1961). F.F. 브루스도 동일하게 썼던 것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칼빈주의 C.H. 스펄젼은 “주님, 모든 당신의 택함에서 불러모으시고 좀 더 택하소서”라고 한 번 이상 기도했다고 말했다(질문에 대한 답변, P. 198, 주기도문 출판, 엑세터, 1972).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의 진실한 선포와 함께, 성령님께서 그 진리에 관해서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그들에게 제공하여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활동한다. 그러면 그들은 회개(자신들의 마음을 변화)하고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이 있다.

 

물론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려고 할 때 주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람이 마음대로(예를 들어, 원하다) 불매 … 성령에게서 난 사람도 다 이러하니라”(요한 3:8). 즉 히브리어로 “영”과 “바람”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기 때문에 성령님은 우리가 기대하거나 이해하는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바라시고 선택하시는 구원의 때와 장소에서 일하신다.

http://www.truthandtidings.com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