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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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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3. 11:23 횃불/1988년

모든 아버지들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

클라이드 M. 네레모어

어떤 목회자가 보내준 교회 신문을 대충 읽어 넘기다가 저는 문득 다음과 같은 문장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자녀들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저는 이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누가 썼던지 간에 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아 나가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만일 모든 아버지들이 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다면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저는 너무나 자주 실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버지는 자신이 맡은 교회의 직분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신분 또는 자기 사업이나 직업의 모든 요구사항들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 곧 자기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일에 대해서는 꿈조차 꾸어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자기 아들과 딸에게 하나님을 대표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아버지들로 하여금 자기가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에 게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거의 언제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어린이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쓰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부모들로 이루어진 주교사 수양회에서 그 질문을 어린이들에게 했던 교사가 그 어린이의 어머니에게 그의 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에 숨이 막히는 소리로 외쳤습니다, “, 이런! 이것은 바로 제 남편의 모습이군요!”그리고 나서 그녀는 그 글을 다시 한번 살펴본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띤 얼글로 덧붙였습니다. “빌리가 쓴 이 모든 사항들은 자기 아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에요.” 그 어린 소년의 생각에는 자기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묘사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사람들의 개념은 자기 아버지에 관한 개념과 같으며, 이것을 지워버리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특권이자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엄숙한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땅의 아버지들이 열심히 본받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16).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들은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버지들은 사랑을 나타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오직 성질만을 부립니다. 또 어떤 아버지들은 사랑을 보이는 대신 어떤 자녀를 다른 자녀에게 비교하여 그를 나무랍니다. 또 어떤 아버지들은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바빠서 자녀들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일 틈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9:27, 딤후 4:8).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뉴스들이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죄악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라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아주 사라져 버리지나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의의 본질이시며, 그분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자기 자녀를 때때로 징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같은 모습을 요한계시록 3:19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

때로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아버지인 우리도 역시 자녀들을 징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아버지라면 자신의 분노 때문에 자녀를 후려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그(자녀)에게 유익이 되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나쁜 행실을 바로잡을 생각으로 자녀를 신중하게 징계할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의롭다는 것을 자녀가 이해할 때에 그는 또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이 공의(公義)의 속성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심리학자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인 제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에 공정치 못함은 특히 십대들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사실, 공정치 못한 대우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반항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공의로와야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먼저 모든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조급한 결론을 내림으로써 자녀를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수사학적인 질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5).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아버지인 우리들이 100% 올바른 판단을 항상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자녀들의 말을 먼저 잘 듣고, 상황을 잘 고려해 본 다음, 자녀들을 공정하게 다룰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1:18, 요일 1:9).

이것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실증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슬픈 현상은 어떤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로부터 잘못했습니다라는 말만을 계속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회개의 의미를 가르치며, 또 사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하지 않는 것은 자녀들을 치료하는 용서의 말입니다.

용서의 본질(참된 용서)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 다음에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후에 그것을 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25은 그와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 중의 하나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너무나 많은 성경 말씀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용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는데, 그는 자기 죄를 하나님께 자백한 후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아버지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죄를 계속 들추어 내어서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 결과, 수 년 동안 이 사람은 거저 주시는 주님의 온전한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어떤 사람이 그 사람과 상담을 했고, 그의 눈은 진리에 대하여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길러준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상담자와 대화를 나누어감에 따라 죄의식에서 차츰차츰 해방되어 가던 그는 얼마 안되어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심이 깊으십니다( 103:13).

오늘날의 부모들과 자녀들은 상대방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서로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해하시며, 다윗은 우리에게 귀감(龜鑑)을 남겨주기 위해 하나님의 감정이입(感情移入)과 동정심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103:13~14).

아버지인 우리들은 자기 자녀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야만 그들을 위로하고, 이해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며, 자기자신을 그들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자기 자녀들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은 중대한 사업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과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는지 자신을 잘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자녀들을 잃는다면 자기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1988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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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