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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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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6. 18:18 횃불/1988년

회복

 

밑바닥에 떨어지기

조만간에 위기가 닥쳐옵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정 떠나갈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필연코 다가오는 것입니다(이 밑바닥을 찌꺼기라고 볼 수도 있고, 껍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 밑바닥은 황량한 어느 겨울 날 그가 서서 쳐다보는, 열린 무덤 속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관이 될 수도 있으며, 혹은 그 사람 혼자만이 기적적으로 살아 남게 되는 사고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것저것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병원 침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의 어느 경우도 아닌, 그저 인간의 인내의 한계로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이것을, 자포자기와 완전한 좌절의 때라고 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도피구가 모두 막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갈등과 싸움은 무익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소망이 없다.”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음과 같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젠 소망이 없다.”

애써 봐야 전혀 소용이 없겠군.”

너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필연적인 결과와 협력하는 거야.”

어쨌든 사태는 결코 예전과 같아질 수 없어. 날개가 부러진 새는 다시는 높이 날지 못해.”

너는 이제 기회를 잃어버렸어.”

너는 이제 귀환불능지점(the point of no return, 돌아오지 않는 지점.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흐르는 강의 어떤 지점을 가리키는 말로써 누구든지 이 지점을 통과하여 밑으로 내려가면 반드시 폭포 밑으로 떨어지고 맘-역자 주)을 넘어가 버렸어.”

그리고 그 목소리는 길고 텅 빈 회랑을 따라 다음과 같이 울려 퍼져 내려갑니다.

이젠 소망이 없다.”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

되돌이킬 수 있다.”

불가능이다.”

 

집으로 돌아오라

하지만 이 어둡고 쓸쓸한 시간에 또 다론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희망에 넘치는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과거는 용서를 받고 지워질 수 있다 쌓이고 쌓인 수많은 죄들은 일순(一瞬)에 깨끗해질 수 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사태는 과거와 같이 좋아질 수 있다. 아니, 더 좋아질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팟종이가 먹어버린 세월을 회복시키실 수 있다.”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전혀 없다. 네가 당하는 일도 그분에게는 어렵지 않다.”

집으로 돌아오라.”

 

중대한 결심

그 다음에는 중대한 결심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은 갈등하는 생각들 때문에 갈갈이 찢어집니다. 한 핀으로는 자신의 죄와 실패를 인정 하는, 낯 뜨거운 수치가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집으로 돌아가 사태를 바로잡으려는 강렬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가 뒤로 돌아”(방향 전환)을 생각하자마자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마귀들이 자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는 인간의 몸이 그처럼 격렬하면서도 상반된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 때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원한을 품은 신랄한 음성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의 음성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14:1~2).

그 다음에는 중대한 결심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버티고 있던 마음의 긴장이 세차게 허물어져 내리면서 상한 심령으로부터 복받쳐 오르는 흐느낌과 더불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교만하고 곧은 목을 가졌던 타락자는 구주의 발 아래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그의 입술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51:1~17).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15:18, 19).

이제 큰 안도감이 있습니다. 무거운 짐이 제거된 것입니다. 밝은 빛이 비취기 시작했으며, 새 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말이 그의 마음에 떠오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는 마치 모든 컷이 이 약속에 달려 있기나 한 것처럼 이 약속에 달라붙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탕자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리고 왕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환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20~24).

그는 특히 아버지가····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 일이 자기한테도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직도 상거(相距)가 먼데도 그를 보시고 달려가 그를 껴안으시며 입을 맞추셨습니다. 그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입맞춤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옷····

손에 가락지····

발에 신····

그리고 살찐 송아지····

 

나를 마라(괴로움)라 칭하라!

그의 영혼 속에서 종이 이미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리스도인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로 돌아가는 데에는 아직도 큰 장애가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들을 대면하고 나서 느껴야 할 부끄러움 때문에 움찔합니다. 그는 그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냉담한 태도로 나에게 거리를 두지는 않을까? 그들은 나를 피하지는 않을까? 흑 그들은 나를 비판하지는 않을까?

그는 구약의 나오미를 기억합니다. 그녀가 모압 땅에서 얼마간 타락의 길을 걷다가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이가 나오미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나오미(희락이라는 뜻)라 칭하지 말고 마라(괴로움이라는 뜻)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빈 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1:19~21).

그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나야. 나를 괴로움이라 칭하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하지만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자기를 어떻게 영접할까 하는 것에 관한 그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처럼 그를 놀랍게 환영합니다. 그들은 그의 손을 잡고 따뜻한 악수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그를 껴안기도 하고, 눈물을 마구 쏟기도 합니다. 서로 비난하는 일도 없으며 아무도, “그것 보세요. 내가 뭐라고 말했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 가족과 지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슬픔을 갖다 준 것에 대해 사과를 하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그들은 용서의 말로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해 감사를 표명합니다. 그는 그들이 자기를 땅바닥에 기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사랑과 자비로 자기를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흥분된 그의 심장의 고동소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주님과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교제를 다시 나누게 된다는 것,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 받는다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입맞춤을 경험한다는 것.”

사실, 그것은 거듭나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그의 마음 속으로 스며듭니다. ‘예전에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었나?’ 하지만 이 의문은 학구적인 것처럼 느껴 집니다. 설혹 그가 예전에 구원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지금 구원을 받았으며, 바로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안도감이 그를 압도합니다. 더 이상 주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일도 없고, 그처럼 교만하지도 않으며, 부서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도 않으며, 한없이 달아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쁨들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일 좋은 옷! 손에 가락지! 발에 신! 살진 송아지! 시작된 이후로 결코 끝나지 않는 즐거움! 그리고 잃었던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바라는 형이 없다는 것!

-- 다음 호에 계속

 

(1988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