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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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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1. 15:32 횃불/1990년

성령님의 역사(役事)

성령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요소

 

이 주제에 관련된 말씀들로는 이사야 63 10, 히브리서 1028, 29, 에베소서 4 30, 데살로니가전서 5 19, 20절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다섯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가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되 어 사용되었습니다. 그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심케 하다(vex)”, “거스리다(resist)”, “욕되게 하다(insult, 10:29의 다비 번역성경)”, “근심하게 하다(grieve)”, “소멸하다(quench).”

성령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억지로 그분 자신의 뜻에 굴복하도록 경고하시거나 설득하시거나 애쓰시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을 거스리는 것은 그분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거절하는 것이며,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경멸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는 아무도 이와 같은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0 28,29절 말씀은 한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했다가 다시금 헛된 유대교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모든 진리를 거부해 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무시했으며, 그분이 흘리신 보혈을 짓밟고, 그 피의 효험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을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거짓 신자들의 그릇된 태도에 대해서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믿는 자들의 생활 가운데서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의 활동을 방해하는 위험들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5 18절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분명한 권고임을 이미 주목해 보았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케 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입기 위해서는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재를 책으로 완전히 채우려 찬다면 책상이나 쓰레기통, 스탠드, 의자 등 모든 것들을 옮겨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 방은 책으로만 가득 채워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령님의 거룩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결별할 마음이 있는가? 나는 범사에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진실된 소원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분이 모든 것이 되실 수 있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지만 기독교가 하지 말아야 될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보고 충만해지라고 적극 권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입니다.

똑같은 표현을 요한복음 1929절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신포도주로 가득히 적셔진 해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적셔졌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포도주에 적셔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주 예수 그리스께서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성령님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4:30).

성령님은 쉽사리 근심 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이 거룩하신 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을 근심시키는 일은 무엇일까요?

 

[1] 작위(作爲)의 죄

문맥을 살펴보면 이것에 관하여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 24~32절에 열거된 것들을 살펴보십시오.

① 거짓말(25),

② 화를 내는 것(26),

③ 무엇이든지 마귀에게 기회를 주는 것(27),

④ 도적질과 탐욕,

⑤ 더러운 말(29),

⑥ 모든 악독 그리고 화를 내는 갖가지 형태들(31),

⑦ 불친절함 또는 용서하는 마음의 부족(32, 아마 이것은 우리가 자주 실패하는 것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부작위(不作爲)의 죄

『성령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거룩하지 못한 것들은 그분을 슬프시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분은, 겉으로는 아주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대단히 슬퍼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떤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친구의 부인은 한 사진첩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친척이랍니다. 참 좋은 분이죠. 지금은 남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 사람의 훌륭한 삶과 한 일에 대하여 열심히 나에게 설명해줍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고는 내가 그녀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리의 어떤 움직이는 물체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나의 무관심은 그녀를 매우 실망시킵니다. ‘내가 이 사람에 게 앨범을 보여줄 필요가 없겠군하고 그녀는 속으로 자신에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앨범을 덮고 옆으로 밀어둡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장 훌륭한 사진이 담긴 앨범을 가지고 계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상기 시켜 줍니다. 그 사진은 영광스러운 분과 똑같으며,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아름다움과, 그분의 사랑과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관하여 설명해 주시는 일에 몰두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있거나 혹은 다른 어떤 대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엉뚱한 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성령님은 매우 슬퍼하시며 그 앨범을 덮으실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심어주시는 일을 그만두실 것이며, 우리의 영혼이 참 기쁨과 위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H. P. 바커).

내적인 원천이 되시는 분을 근심가운데 계시도록 방치해 둠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평안, 그리고 능력이 결여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힘이 없고 가련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십니다.

『어떤 신사가 약 1년 정도 외국여행을 갔다 오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는 집 문을 잠그고 가구들을 따로 보관하는 대신 관리인을 고용하여 그가 집을 비우는 동안 그것들을 잘 관리해 달라고 부탁을 한 다음 떠났습니다 얼마 동안은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방에서 무엇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깨어지는 소리가 틀려왔습니다. 관리인은 소리가 난 방으로 급히 뛰어가 보고는 그 소리가 천장에서 떨어진 커다란 석고 플라스틱 조각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석고 조각은 천장에서 방 안의 몇몇 가구들 위로 떨어져 내려 큰 흠집을 입히고 가루는 방안에 온통 흩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 때문에 짐을 꾸려서 가버리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집을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그는 파손된 곳을 고치는데 힘을 쏟습니다. 석고 기술자를 불러다가 천장을 수리하게 하고, 상처가 난 가구들도 역시 기술자에게 맡기곤, 방안을 깨끗하게 치웁니다.

이 것은 믿는 자가 성령님을 근심시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성령님께서는 너무나 신실하신 관리인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을 근심시켜 드릴 때조차 우리를 떠나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곧 우리의 영혼 안에서 영적인 상처를 치유하시는 일에 몰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우리의 마음에 기쁨과 위안을 가져다 주시는 본래 그분이 하시는 일 대신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판단하고 자백하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다시 회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H. P. 바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

여러분들은 창세기 24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리브가의 부모들이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을 허락했을 때 아브라함의 종은 어서 빨리 되돌아가기를 원하여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기들의 딸과 그렇게 빨리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적어도 열흘 동안을 그들과 함께 머물다 가라고 강권했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의 종은 그들에게 이와 같이 간청했습니다. “나를 만류치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56).

그 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의 신부 된 교회를 데려가려고 오신 성령님에 대한 상징입니다. 복음으로써 우리를 찾으신 성령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한 순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께 드리려는 그분의 일을 완수하고 싶어하십니다.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는 이 일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은 나를 만류치 마소서라고 부르짖으십니다.

이러한 방해는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시려고 할 때 그것을 마치 불을 꺼버리듯 꺼버림으로써 생길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그분은 다양한 도구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이야기를 듣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방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맙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말라는 명령은 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지만 소멸치 말며라는 명령은 개인에게나 하나님의 지역모임,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는 섬김의 통로를 제한하계나 억제함으로써, 혹은 성령님께서 자유로이 사람을 선택하셔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함으로써, 모임 안에서의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문법적인 오류가 없이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른바 평신도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과 덕을 끼치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성도들의 마음에 그 말씀을 전해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 안에 깊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습니다. 그 경우에 그 사람은 성령님께서 사용하신 도구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짜놓은 조직이나 혹 그것에 의해 진행되는 집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와 같은 사역을 방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이것은 무지(無知)와 잘 준비하지 않은 설교에 대한 구실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게 주신 복음전하는 자와 목자와 교사 등의 은사를 자신의 교회에게 주신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의 존귀한 모임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소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언제나 그분이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모임 가운데 자유로움을 유지함으로써 예언을 멸시치 말고라는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은나팔이 아니라 양각 나팔을 통해서우리에게 전해 진다고 해서, 다시 말하면 교육을 잘 받은 형제가 아닌 그렇지 못한 형제를 통해서 전해진다고 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낮게 평가한다면 그것은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임재 해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1990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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