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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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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9. 14:19 횃불/1991년

아내들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질서

래리 크리슨슨

레이디즈 퍼스트”(ladies first, 이 말은 연약한 여자들을 존중하여 범사에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양보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표현임 -역주)라는 발은 사회질서상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관습을 잘 표현해 주는, 우리에게 익숙한 말입니다. 그런데 가정에 관한 하나님의 질서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아내는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의 사이를 이어주는 고리이므로,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생활할 때에 남편과 자녀들을 이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이야기할 때에 아내에게 먼저 말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5:22~24).

자기 남편에게 복종한다또는 순복한다는 개념은 유능하고 지성적인, 많은 여자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여 이것을 마치 비활동적이고 하찮은 신발털개(신발의 흙을 털기 위해 현관 따위에 놓아둔 매트 따위)가 되라는 말로 오해하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이여, 남편이여, 다툼을 그치세요.

쓸데없이 고함치지 마세요.

나는 당신과 결혼한 아내이긴 하지만

당신의 노예는 아니랍니다.”-번즈-

그러나 하나님께서 순복(복종)을 다른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순복한다는 것은 정하신 권세 내지 권위에 겸손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에 관하여 주님이 주신 본()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배에 순복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굴욕이 아니라 영예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들보고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주신 이 법은 여자들에 대한 유감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들의 보호와 가정의 조화를 위하여 이 질서를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들이 흔히 직면하는 험악한 생활로부터 보호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소위 50 50민주적 결혼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100 100입니다. 아내는 100% 아내이고 남편은 100% 남편입니다.

주 예수님이 성부(聖父)에게 자발적으로 순복하셨듯이 아내들도 자발적으로 순복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2:5~9). 하나님께서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존귀케 하지 아니하시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존귀케 하십니다.

 

좋은 아내는 보석보다 더 귀합니다.”

캐더린 마아샬(Catherine Marshall)은 베드로라 불린 사람(A Man Called Peter)에서 작고한 자기 남편이 여자들을 얼마나 존중했었던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음의 내용을 자기 남편의 설교에서 인용했습니다. "현대의 여성들은 자기 남편의 수입만으로 가정을 안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여자들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간혹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유감스러우면서도 만부득이한 일로 간주되어야지 아내의 당연지사로 간주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자기 가정과 남편과자녀들에게 온 시간을 쏟고 있는 보통여자라면, 남편의 일을 이해하려 하고, 남편의 이기심을 제어하는 동시에 자부심은 세워주려 하며, 남편의 남성으로서의 자만심은 꺾으면서도 모든 희망은 격려하고, 가정 주위에 참된 친구들을 사귀려 하며 지역교회에 관계된 사항들을 가정에서 준비하는 보통 여자라면 직업을 도저히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부친이나 남편의 직접적인 권위아래에서 살지 않는 여자를 위하여 지혜로운 배려를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됩니다. 이런 여자를 위해서는 영적인 권세와 권위를 가진 교회가 보호하고 후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책임을 어떤 그룹( 6:3)에서 볼 수 있는대로 집사들일가능성이 많음)에 의탁하여 적절히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원칙은 남편이 사업이나 군복무, 또는 다른 이유로 일정 기간 동안 가정을 떠나 있는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가정을 영적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교회의인도자들에게 부탁할 수 있으며,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사업상 여행을 떠나는 경우에 이 사정을 한 명 내지 여러 명의 집사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부재중에 가족을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려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흔히 가장(家長)이 처리하던 문제에 관하여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나머지 가족들이 집사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이나 가족은 더 큰 가정인 교회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영적인 보살핌과 보호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될 것입니다.

 

순복-사회 균형의 수단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自主者)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7~28).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독립적으로 사용하여, 남자와 여자 사이에 아무 차별을 두지 않는, "사회적 동등성"을 가르치는 근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의 원래 취지에서 너무나 벗어난 가르침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에서, 또 동일한 영적 교제를 그리스도와 함께 나눈다는 점에서, 또 동일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저 높은 세계에 대한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위치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관계는 그 중 단 하나라도 이상의 사실로 말미암아 요동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파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처럼 모든 사람과 그 세상 소유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이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것은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을 도입해 들이는 현대적 계획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지위에 있어서는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시에 확립되었고, 남녀의 본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타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약성경에 확증되어 있으며, 이것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결혼이 조화를 이룹니다. 이것을 인정하기란 용이한 일인데도 이 문제를 만족하게 해결하는 부부는 거의 없는 것 같으며, 결혼관계에서 발생하는 많은 불행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동양적인 관습에 따른다면 아내는 남편의 노예 상태로 억압됩니다. 연애기간의 개념에 따른다면 아내는 마치 여주인처럼 받들려집니다. 이 둘 중에서 연애기간의 개념이 좀더 고상한 실책이긴 하지만 하여튼 둘 다 틀린 개념들입니다. 이 두 극단은 일상생활가운데에서 여전히 서로 갈등을 겪기도 하고 서로 교차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기독교의 개념은 이 둘과 다릅니다. 성경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신·구약 성경이 모두 일치합니다.  순복은 창조의 순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아담이(혼자 살 동안에는)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3~14). 그 타락 이후에 특별한 책임이 쌍방에게 지워졌습니다. 아내의 순복이 확고해졌으며, 사실, 그 책임이 가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남자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3:16~19).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반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그 효력을 상실하지 않는, 원초적인 법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한 그 법에 순복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저항이란 있을 수 없으며,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 말씀은 지금도 끊임없이 일하고 있으며, 그 장벽들은 견고하게 서 있습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지워져 있으며,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남자에게는 다스리는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저주받은 땅 위에서 고심해야 하고, 힘들게 수고해야 할 책임이 따라옵니다. 남자는 이 땅의 모든 직업에서 그 저주의 혹독함을 어떤 형태로든 맛보아야 합니다. 만일 남자가 그 고심과 책임에서 해방될 수만 있다면 다스리는 권위를 기꺼이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가장(家長)의 지위를 포기한 남자들의 숫자는 우리 시대에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여자는 그 수고를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 다스림을 사모합니다. 여자에게 가장 심각한 시련은 스스로 자기 뜻(의지, 고집)을 끊임없이 부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자와 여자에게 지워진 책임은 쌍방의 타고난 성벽(性癖)을 몹시 무겁게 내리누르도록(하나님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으며, 자연상태에서 남자와 여자는 그 책임이 참으로 저주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감당키 어려울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의당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멍에가 그들에게 너무 무거운 까닭에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생의 무거운 짐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찾으면 그 때부터 감추어진 축복이 저주가운데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무거운 짐은 절반만큼 가벼워집니다. 이 짐은 우리를 정화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이 짐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질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준비요, 교육입니다.

다른 면에는 민감한 사람들도 결혼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위배되는 방향으로 결혼을 강압적으로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동차로 비행하려고 차를 절벽으로 몰고 가서 떨어뜨린다면 이것은 비극적인 장면이 되든지 아니면 우스운 광경이 될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것은 자동차의 본질에 전혀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각 배우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분담시키셨으며, 이 각각의 역할은 결혼의 본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거나 우리 자신이 고안해 낸 것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결혼의 파탄을 초래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질문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결정이 가족을 파국으로 몰아간다면 어떻게 하죠?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는 아내가 관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순복하는 일에는 어떤 형태로든 한계가 없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3:18). 분명히 사도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또는 합당하다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 가운데에는 아내의 순종이 주 안에서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내는 명백한 죄에 대해서는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곧, 아내나 자녀들의 영적 생활에 관계된 어떤 문제에 있어서 부부간에 일치하지 않을 때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반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캘리포니아 풀러톤에 있는 안드레 부스타노비는 베드로와 바울도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무조건 순복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했다고 언급했습니다( 5:24, 벧전 3:1). 베드로가 순종의 사례로 사라를 든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보호하려고 사라가 자기 아내라는 것을 두 번씩이나 부인하여 한 군주가 후궁으로 취해 가도록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12:10~20, 20:1~8).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창기로 팔아 넘기더라도 아내가 이것을 그냥 용납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그 경우를 절대적인 의미로 말함으로써 순복의 문제에 있어서 변덕을 미연에 방지했던 것입니다. 근간 영적 각성을 체험한 브라질의 한 교회는 믿음 안으로 들어온 여자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남편들 중에는 무관심한 자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공공연하게 믿음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교회에 참석하거나 교회의 활동에 관계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때 교회의 인도자들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남편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결과 다수의 남자들이 믿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예배가 우리의 믿음의 마음을 감동시킴으로 이런 경우에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5:29). 그러나 위의 사례는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가정의 질서를 얼마나 존중하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기한 모든 상황 중에서 중요한 점은 순복비굴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의 판단이 잘못되었거나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아내가 이것을 남편에게 충고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때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러면서도 거리낌없이 정직하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판단과 지혜와 의견은 남편의 가장 큰 자산 중의 하나이며, 이것은 남편의 어리석은 실수들을 많이 예방해 줄 것입니다. 남편으로써 자기아내의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남편의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자기 남편이 가족들을 난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한 마디 의견을 건네기는커녕 오히려 "당신 생각에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세요" 라고 조용히 말하는 아내는 순복하는 아내가 아니라 노예근성을 지닌 어리석은 아내입니다. 아내는 자기 생각을 남편에게 충분히 말해야 하며, 자신의 정당한 논거(論據)를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다만, 이 때 공손한 태도를 버려서는 절대로 안되며, 그러면서도 어떤 특별한 결정에 관하여 자신의 부인할 수 없는 의심을 숨겨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선한 판단력을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결정권을 남편에게 맡겨야 합니다.

순복은 단지 외적인 태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적인 태도의 문제입니다. 자기 남편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또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고, 그 결정을 수행해나가도록 허락하고 이를 만족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아내라면 비록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의견을 솔직하게 말한다 해도 자기남편의 권위에 여전히 순복하는 아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생각을 거의 입 밖에 내지 않고, 자기 남편의 결정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자기 남편의 계획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다 찬성하면서도 그 이면 깊은 곳에는 시무룩한 반항심을 품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만 간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노골적으로 폭발되어 다루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 속으로 그녀를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표면적인 행동에만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남편이라면 특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 자기 아내의 조언과 견해를 환영할 것입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영적인 실재(實在)들을 더 직접적으로 더 본능적으로 파악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가족들이 가정기도 시간과 개인 기도시간을 등한히 하고,  교회의 집회에도 빠지며, 다른 외부활동에 너무 많이 관계되는 등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이 보이면 아내는 이 통찰력을 자기 남편에게 거리낌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아내의 눈에 이것이 보이는 것은 성령님의 계시입니다. 부작위(不作爲)의 죄(The sins of omission)는 특히 기만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항들을 남편에게 이야기한다든지, 심지어는 남편을 강권하여 사태를 바로잡게 할지라도 이것이 곧, 하나님이 명령하신 순복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문제에 있어서 성령님이 자기에게 명철(이해력)을 주셨다고 생각되면 아내는 그것을 남편에게 알려 주어 그 문제를 심사숙고 하도록 하게 해야 합니다. 가족의 영적 건강과 방향은 남편의 권위와 보호에 달려 있는 것만큼이나 아내의 영적 통찰력과 관심에도 달려 있습니다.

아내는 어머니, 주부, 요리사, 상담자, 운전기사 이상의 존재입니다. 아내는 보울링이나 카드놀이, 사친회(師親會), 심지어는 교회활동으로부터도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녀가 설혹 자신의 행복의 근원을 오직 자기 남편이나 자녀들에게만 둔다 해도 이것 역시 실망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하나님) 자신을 떠나서는 만족을 찾을 수 없도록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아내야말로 자신의 주인(남편)과 자신의 주님(예수 그리스도) 모두에게 기쁨이 됩니다!(벧전 3:6 참조)

한 때 지식 추구에서 도피구를 찾던 어떤 아내는 충족감을 얻는 생활의 비결을 발견하고 최근에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예수님이 저에게 하라고 지시하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이어서 말하기를, 주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가짐을 변화시키실 수 있으며, 과거에는 단조롭고 고된 일도 기쁨으로 바꿔 놓으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에게 뿌리를 내리지 말고 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내리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자유롭게 해방되어 가치 있는 사람, 좋은 아내가 된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염려를 십자가로 가져가고, 여러분의 남편을 개혁시키는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고 권유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지 않습니다.

순복은 표면적인 태도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마음가짐입니다. 그것은 너울을 쓴 머리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에 대해존경심으로 너울을 쓰고 있는 마음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남편을 위하여 공적으로 경건한 기도를 드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아내의 영적인 각성과 관심이 남편보다 앞서는 일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아내가 위험에 빠집니다. 아내는 그것을 신성한 구실로 삼아 자기 남편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내는 생각하기를, 자기가 가정에서 영적으로 활발히 앞장서야만 자녀의 적절한 양육과 남편의 궁극적인 깨우침을 보장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종류의 신성한 영성(靈性) 뒤에는 거룩하지 못한 반항심이 엄청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17:9). 게다가 이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좌절시킨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영적으로 점점 더 무관심하게 됩니다. 반면에 지속적인 순복의 태도를 취하는 아내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적인 힘을 마음껏 사용하여 약속된 열매를 얻게 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갈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벧전 3:1~2).

언젠가 한 여성이 교회의 장로형제에게 찾아가 자기 남편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너무 비영적(非靈的)인 사람이라서 그와 생활을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을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가정예배시간을 가지려고, 모독적인 언사를 사용하지 않게 하려고. 기타 등등 수없이 노력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는 그녀의 영적인 활동을 비꼬았으며, 이것은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모독적인 행실 때문에 그녀는 심지어 자기 남편과 부부관계를 갖는 것이 옳은 일인지 의심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장로형제는 부부관계가 그녀의 남편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고전 7:13 참조). 게다가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뭔가 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이번 주에 자매님의 남편은 자매님에게 주방과 자녀들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밖으로 나가서 외식(外食)하자고 두 번씩이나 제안했는데도 자매님이 그것을 거절했다지요?”

글쎄, , 맞아요.” 그 여성은 순순히 시인했습니다. “저는, 저는 너무 바빴거든요. 할 일이 많아서····” “문제는 자매님의 남편에게 있지 않고 자매님에게 있습니다. 자매님은 반항적인 아내예요. 자매님은 남편의 권위에 분개하고 있어요. 이제 자매님이 하셔야 할 일은 집으로 돌아가서 남편에게 사과하시고, 불순종하는 아내 노릇을 한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세요. 그분에게 종교에 관한 강의는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그분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세요.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의 직무에 충실하십시오”( 5:24).

이 조언은 그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한 주쯤 지나자 그 여성의 남편이 느닷없이 장로형제를 방문했습니다.

, 형제님 한 주 전쯤에 제 아내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다면서요.”

그렇습니다만····

그 남자는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좋던데요!”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 교회의 유력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기 노력으로도 성취하지 못한 일을,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순복했을 때 바로 하나님께서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1991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