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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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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7. 16:24 횃불/1993년

그리스도의 무오(無誤)하심(2)

사복음서의 실질적인 증거

-시드니 멕스웰 -

 

이 주제는 적절히 정의 내릴 경우 우리의 복스런 주님이 무흠하고 무죄하셨다는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다. 복음서들은 그분의 무죄하심에 대해 풍성한 증거를 제시해 주며 우리에게 어떤 의심도 남기지 않는다. 무오성은 이것을 무한히 뛰어넘는다. 찰스 핫지는 그러나 이러한 우리 주님의 무죄하심은 절대무오성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그것은 단지 그분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으셨음을 말해줄 뿐이다고 말한바 있다. 복음서의 증거를 지닌 하나님의 겸손한 자녀들은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신학 이론을 철저히 거절하며 넘치는 확신과 기쁨으로 그분께서 죄를 범할 수 없으셨다고 말할 것이다.

무오하신 그리스도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망이 세워져 있는 갈보리 구속 사역의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유일한 완전한 본을 우리에게서 제거할 것이다. 주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흠없으신 완전한 상태로 갈보리에 이르셨으며 그러한 상태에 흠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 예수님이 가신 길을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살펴보면서 이 거룩한 주제를 상고해보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길을 좇아야 한다는 베드로의 권면에 주의를 기울이기에 보다 적합한 상태를 갖추게 될 것이다(벧전 2:21). 그러면 복음서 기록의 다섯 대목을 통해서 그분의 무오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분의 잉태방법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에 주어진 설명들을 보면 그 두 장이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가나 요한이 분의 놀라운 출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마가는 그분의 사역을 강조하는 한편 요한은 그분의 아들되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출생은 자연적인 일이나 그분의 잉태는 초자연적인 일이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1:36)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나시기 이전에 존재하셨던 그분께서는 스스로 인성을 취하셨다( 8:58). 이와같이 주 예수님의 무오성은 하나의 영화롭고 독특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의해 확증되었다. 처녀의 몸이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영역이었다. 다른 모든 출생은 새로운 인격체의 창조인데 비해 그분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위()가 새로운 존재 영역 안에 들어온 것이었다. 구주의 인성은 다른 이들과 같이 실제적이었으나 다른 이들과는 달리 무죄의 속성을 소유했다. 하시라도 그분의 신성을 그분의 인성에서 떼어놓기란 불가능하다. 그분은 하나님인 동시에( 1:1) 인간이시기 때문이다( 1:14).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경우에 한해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데 비해 주님은 기적적인 잉태에서 입증되었듯이 그분의 어떠하심으로 인해 죄를 범하지 않으실 수 있으셨다. 그분의 속성을 나누려 하지 않도록 하라. 그분은 곤하신 반면( 4:6) 생수의 근원이셨으며( 4:14), 그분은 무덤에서 우신 반면( 11:25)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11:43). 영광스러운 분! 이 사람을 보라!( 19:5) 너희 하나님을 보라!( 40:9).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로소이다!”( 20:28) 만일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아무 비밀도 없게 될 것이다(딤전 3:16).

 

그분의 은둔의 의미

외적인 무흠과 무오성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성부와 성자의 증거를 대할 수 있다. 이는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다( 6:18). 동정녀에게 나신 아기는 임마누엘로 불리웠으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었다”( 1:23), 이러한 그분께서 부모와 한가지로 나사렛에 내려가셔서 그들을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2:51)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필경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 상세한 내용이 우리에게 숨기워진 은혜로운 복종의 기간은 거룩한 눈길로 그 삶을 지켜보신 그분의 아버지에 의해 적절히 주어져 있다. 그분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린 것은( 3:16, 1:9~11, 3: 21~22) 이러한 준비기간 동안에 아버지께서 그분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에 고운 가루에 기름이 섞이고( 1:26~35) 누룩이나 꿀이 없이 유향의 향기만 가득히 부어진( 3:16) 소제가 있다( 2). 은둔 기간에 아들에 대해 주어진 아버지의 증거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를 보라고 한 선지자의 말의 성취였다( 42:1).

 

그분의 사단과의 싸움의 의미

우리 주님은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3:13). 그것이 회개의 세례임을 기억할 때 세례 요한이 그분께 세례 주기를 주저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여기에 아무 고백할 죄도, 아무 회개할 것도 없으신 분이 계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어준다.

이 위임의 장소에서 그분은 싸움터로 나아가신다. 온전한 거룩함 가운데 그분은 사단과 대면하셔야 했다.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모든 도덕적인 약함을 찾아낼 수 있으며, 첫 아담의 마음 속에 불순종을 부추긴바 있었던 사단은 이제 마지막 아담에 의해 패배를 맛볼 운명에 처하였다( 2:14, 요일 3:8). 동산이라는 좋은 환경에서 첫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로 판명되었다. 반면에 야생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황량한 광야에서 곤하고 주리신 주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이 자신에게는 아무 반응도 일으킬 수 없음을 입증하셨다( 4:1~11, 1:12~13, 4:1~13).

유혹에 대한 누가의 묘사는 도덕적인데 비해 마태는 그때”, “등의 반복된 표현이 보여주듯이 시간적인 순서에 충실했다( 4:1,5,8). 첫 시험은 네 자신을 기쁘게 하라는 것이었고, 둘째 시험은 네 자신을 과시하라는 것이었고, 세째 시험은 네 자신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헌신의 길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그 거룩하신 분 안에는 외부로부터 오는 악에 반응할 아무것도 없었다. 시험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뢰한 분과 그분이 사용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쫓겨났다. 여기서 만일 주님께서 죄를 범할 수 없으셨다면 왜 시험을 받으셨는가 라는 질문이 종종 제기된다. 그것은 그분이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2:18)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인품이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악의 시험을 당할 때의 고통은 그만큼 크게 마련이다. 요셉이 그 예이다. 금속은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욱 뜨거운 불로 정련된다 그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을 때 그분의 무오하심이 나타났다( 4:14). 이후에 그분은 시험을 받으시고 갈보리에서 보다 큰 승리를 거두신 결과로 우리를 체휼하시는 합당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영광의 보좌에 돌아가실 수 있으셨다( 4:14~16).

 

그분의 성별의 정도

그분의 공생애와 사역의 마감시점에 가까이 오면 올수록 우리는 그분께 경배드리며 찬송시 작가와 함께 할렐루야! 놀라운 구주로다!”고 고백하게 된다. 여기에 충만함의 절정에 이른 무오하심이 있었다. 그분의 발자취는 항상 아버지의 뜻 안에 있었다. 그분은 완전한 확신 가운데 하늘을 우러러 나는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8:29). 요한복음 8장에서 그분은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시는 한편 인성 안에서의 자신의 온전한 순종을 밝히고 계신다. 그분은 자신의 거룩한 성품 가운데 흠을 찾아내려고 부단히 애쓰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물을 수 있으셨다( 8:46). 그분은 전능하심의 찬란한 빛을 받으며 하나님의 임재의 불꽃 속에 서서 아버지께 온전히 바쳐진 심령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선언하신다( 17:4). 요한복음 14:30에서 그분은 조용한 확신 가운데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라고 선언하신다. 사단은 광야에서( 4:1~11), 그리고 베드로를 통해서( 16:21~23) 거듭 시험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의 복스런 주님의 무오성은 결코 훼손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이 진정한 인간이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단순한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변화산상에서의 멧세지

변화산상에서 주님은 자신의 내적인 완전함을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내셨다( 17:1~8, 9:1~8, 9:28~36). 마가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기록했다( 9:3). 이 산에서 들린 성부 하나님의 칭찬의 음성은 요단강에서 시작해서 마지막 일주일까지 이르는 그 짧은 기간에 대한 인침이었다( 17:5). 당대의 훌륭한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성품에 있어서 결함이 있었던, 지난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사라져야만 했고 당황한 제자들은 예수님 외에 아무도 보지 못할 수 밖에 없었다( 17:8). 그분은 무오하심 가운데 홀로 서셔야만 했으며 어떤 사람의 아들들도 그분 곁에 나란히 설 자격이 되지 못했다. 갈보리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분의 현재의 모습은 아버지를 향한 깊은 사랑을 나타내었으며, 이에 성부의 음성이 다시 들려와 그분에게 주어진 영광을 확증하셨던 것이다( 12:27~28).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들었다. 그러면 이 글을 마치기 전에 다른 음성들을 들어보자. 귀신들도 그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인정했으나 그 기원이 사단인 까닭에 그러한 증거는 거절되었다( 4:34).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겠노라고 인정했으며, 십자가 위의 강도는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덧붙였으며, 로마 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외쳤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그분과 같이 되어 보좌에 둘러 한 소리로 그분의 비할데없는 가치를 노래할 그날을 고대하게 된다( 5:9). 이상 복음서를 통해 그분의 무죄하심의 외적인 증거를 살펴보았는데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가 겨우 희미하게 포착하고 있는 내적인 뛰어남과 완전함을 그분 안에서 발견하며 흡족해 하셨다는 점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흠없는 삶과 그 고결한 발자취를 보니

모든 면에서 진실하고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 계시네

아침마다 부패한 세상 한 가운데 깨어나셨으나

아무 해로운 얼룩도 주님의 영혼을 더럽히지 못했고

아무 죄도 주님의 기도를 방해하지 못했네

 

(1993 1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