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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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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4. 15:30 말씀의 분변

방언에 관한 현대의 오류

4. 성령 세례

교계 일각에서는 성령세례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런 표현은 신약성경에 발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도 성령이 침례자로 선언된바 없기 때문이다. 용어상의 혼동은 교리상의 혼동을 가져온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잘못된 용어의 사용은 잘못된 교리를 가져온다. 위에 언급된 교파에서는 첫 번째 축복이 회심이고, 두 번째 축복이 성령세례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 세례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살펴보자. 그 세례를 언급하는 일곱 대목이 있다(3:11, 1:8 3:16, 1:33, 1:5: 11:16, 고전 12:13). 앞의 여섯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침례자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 일곱 구절에는 이라는 동일한 전치사가 나온다. 흠정역에 의하면, 앞의 여섯 구절에서는 으로(with)로 옮겨졌으나, 일곱째인 고린도전서 12 13절에서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의하여(by)로 옮겨졌다. 이런 근거에서,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 13절에서는 성령이 침례자이며, 성령이 각 신자를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베풀며, 모든 신자가 다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구별은 매우 인위적이며, 그렇게 가르치는 교사들은 고린도전서 12 13절과 다른 구절들의 침례자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론은 그리스도인들을 두 부류, 즉 그 침례를 받은 자들과 그 경험이 없는 자들로 나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나누는 반면에, 고린도전서 12 13절은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침례는 신자들을 연합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침례는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우리가····다····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침례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위치한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관련이 있다. 30절에서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는 질문은 아니요라는 대답을 예상한다. 그러나 13절에 의하면 모두가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신약성경에는 성령으로 침례 받으라는 명령이 전혀 없다는 점을 주목하라. 명령형의 어떤 권면도 없다. 관련된 모든 구절은 서술형이다. 13절에서 동사들은 수동형인데, 이는 그 침례를 받는 대상들을 주목케 한다.

그러면 사도행전을 펼쳐서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을 말하는 능력인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교리는 2, 10, 19장의 사건들에 기초한다. 그 대목들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얼핏 보기에는 그러한 가르침을 지지하는 듯 보이나,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상황이 독특하고 또 오늘날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종종 그렇듯이, 예외적인 상황은 잘못된 교리가 기초로 삼는 얄팍한 근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것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2장과 8장에는 회심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 시간적인 공백이 있으나, 10장과 19장에는 그런 공백이 없다. 따라서 이 장들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한 일관되고 정상적인 형태를 제시한다는 주장은 매우 잘못되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암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1-4).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1:4-5).

이 약속이 사도행전 2 1-4절에서 성취되었으며, 또 그 성령은 단 한번 강림하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묘사된 사건은 역사이며, 모든 신자의 경험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이미 신자였으며, 그들은 성령세례라는 후속 경험을 한 뒤에 방언을 말했으며, 그리고 그것은 신자들의 정상적인 경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제자들이 기다린 다음 능력을 받아야 했듯이(1:4,8), 오늘날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이에 처한 제자들의 역사적인 위치를 완전히 간과한 처사이다. 그러한 위치는 오늘날 취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성령 강림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성령을 구하거나 찾으라는 암시나, 그렇게 하라고 권면을 받았다는 암시는 일절 없다. 성령은 정해진 시간에, 제자들의 행동에 영향 받을 수 없는 주권적인 행위로 임하셨다. 성령 강림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침례였으며, 분명 기념할 만한 사건이었다.

강하고 급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잘 알려져 있듯이 바람에 해당하는 단어는 성령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그 단어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어떻게 그들이 그 모든 두드러진 현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경험은 독특하고 최종적이었다. 즉 예전에 일어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독특했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종적이었다. 그 사건은 되풀이될 수 없었다. 그날은 교회의 출생일이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다음 장면은 2장 끝에 나온다. 3천명이 아무런 현상이 없이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다. 그들이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친절의 베드로의 약속으로 보아 명백하다. 그 경험은 정상적이다. 반면에 2장 서두의 이전 경험은 비정상적이며 독특했고, 또 결코 반복될 의도가 없었다. 그것은 일정한 시간에(2:1), 일정한 모형을 성취하기 위해(23:15-21), 예루살렘이라는 일정한 도시에서(1:4), 그리고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질서를 도래케 하기 위해서(14:16,17,26, 15:26,27,16:7~14) 발생했다.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10:44-48).

10장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한 결정적인 상황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흘러나가 그들을 교회로 통합시킬 때가 이르렀다. 이것은 엄청난 진일보였으나 나름의 어려움과 문제들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하나님에게 택함받은 사람은 사도 베드로였다. 이 선택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회심하고 또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받은 사건만큼이나 극적이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해 강한 편견이 있었다. 그 편견은 나중에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대로 강하게 표면화되었다. 그 때 어떤 유대인 무리가 그로 하여금 이방인 신자들과의 교제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사도행전 10장은 그분의 뜻을 성취하고, 또 이 새로운 사역이 그 충격과 목적에 있어 보편적이 되게 할 그분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 고넬료(1-8,30-33)와 베드로(9-16, 28-29)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일을 기록한다. 그 메시지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 의도되었으며, 또 그러기에 온 세상을 포용한다. 하나님께서 이제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 그리스도 안에서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셨다(2:14-15). 이제 곧 새로운 일이 일어나려 했다. 이방인이 유대인과 동일한 기초에서 교회로 통합될 참이었다. 그 당시에 교회를 구성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받으셨다는 것이 논박의 여지가 없이 확실히 증명되지 않는 한, 그런 일에 절대로 동의하길 원치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듣는 이들에게 임했고,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 45-46절의 표현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유대인들(여기서는 할례 받은 신자들로 불리운다)은 그런 일이 이방인들에게 일어났다는 것과 이방인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방인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은 것을 어떻게 유대인들이 알았을까? 46절에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설명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그 일이었다. 사도행전 11장에 이 사건이 다시 기록된 것을 본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는 그 동안의 행적 및 이방인과 접촉한 일을 해명하라는 요청을 받았다(3). 다행히 그는 자신의 진술을 입증할 증인을 곁에 두었다(10:23, 11:12). 11 15절에서 베드로는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성령이 저들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베드로가 그 때 본 것은 사도행전 11 16절에서 말하는 대로 오순절 사건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의 독특성과, 또 그 일이 오늘날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방인들이 통합된 일이었다. 오늘날은 어디서 그런 상황을 발견하겠는가? 그것은 오늘날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순절과 관련된 독특하고 구별된 세대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오늘날은 교회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0장에서 방언을 말한 것은 이방인들이 영입되는 증거였다. 또한 메시지를 받아들였을 때 성령도 받았다는 것을 주목하라. 성령을 받기 전에 아무런 시간적 공백이 없었다. 또 성령을 구하거나 소원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 선물은 하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부여되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일어난 일과 동일했다고 증거했다. 그는 그 일을 오순절과 관련시킨다(2). 그 두 사건 사이의 기간에는, 방언을 말하는 일 없이 믿는 순간 성령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방언의 증거가 나타날 것은 그 사건의 독특성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1 17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다고 증거한다. 분명 그 글로쏠라리라는 사도행전 2장의 그것과 동일했다. 같은(이센, 동일한)이라는 단어가 선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둘 다 동일한 선물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음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19:1-7).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이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들의 상황이 정상적이 아니라고 분별한 듯하다 두 가지 시험적인 질문이 그들의 상황이 정상이 아님을 밝혀준다. 첫 번째 질문은 너희가 믿음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였다.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성령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그들의 상태를 드러내준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만일 그들의 침례가 오늘날과 같은 정상적인 침례였다면, 그들은 성령강림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침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28:19). 그들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요한의 침례로라. 여기에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오순절 이후에 요한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그들이 요한의 메시지를 믿고 요한의 사역기간 동안 침례를 받았다면, 그들의 침례는 유효했을 것이다. 제자들 중 아무도 오순절 이후에 다시 침례를 받지 않았다. 그들의 침례는 요한의 침례든 주님의 침례든 거기에 순복할 당시에는 유효했다. 이제 이들은 요한의 메시지나 침례가 유효하지 않던 오순절 이후에 그의 메시지와 침례를 받아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지식과 경험에 있어서 이전 세대에 속했으며, 이제 복음을 들어야 할 입장이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4), 그들은 그것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재침례가 언급된 유일한 대목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를 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이제 요한의 가르침을 대체한 사도들의 권위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어떻게 바울이 알았을까?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

이 사건의 독특성을 다시 주목하라. 오늘날은 요한의 메시지와 침례만 아는 열두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찾거나 구하지 않았으며,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 시간의 경과도 없었다. 또 방언을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현상도 없었다. 사도행전 10장과 19장에는 사도행전 2장처럼 급한 바람이나 혀같이 갈라지는 것도 없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독특성을 증명해준다. 이와 같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입증된, 성령을 받은 세 경우는 아주 독특했으며 그 후로는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는, 19장에서 살펴봤듯이, 사도행전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에서는 오늘날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사건들과, 사도들이 그 사건들과 관련해서 경험한일들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또 그와 동시에 많은 것들을 영구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명백히 영구적인 것은 그대로 보존된다. 그렇지 않으면 과도기의 교회와, 과도기 이후의 교회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뿐이며, 그 교회는 과도기의 문제들과 상관없이 성장했다. 조셉 딜로우(Joseph Dillow)방언(Speaking in Tongues, p.66)에서 아주 유용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사도들의 경험을 가르치는 비극적인 실수를 범하지 말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경험해야 한다. 사도들의 경험은 사도행전이라는 과도기적인 책에서 발견되는 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위한 길잡이인 서신서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한편으로는 방언을 말하려는 과도한 집착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방언을 말하려고 노력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런 경험이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인상을 갖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가복음 16 17, 사도행전 2, 10, 19, 고린도전서 12-14장 등에 방언이 언급되어 있다. 방언에 대한 언급은 후기 서신 중 어디에도 없으며,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의 은사 목록에도 없으며, 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메시지에도 없다. 히브리서 기자, 야고보, 베드로, 요한 및 유다가 모두 그것에 대해 침묵한다. 적어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끝으로, 방언이 증거의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을 주목하라.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 현상은 무리를 놀라게 하고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메시지에서 베드로는 증거의 목적으로 나타날 방언의 기적을 상기시켰다(32-33).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아 나사 하나님 우편에 높이 올리우신 증거였다. 분명 이것은 베드로에 의해 제시된 다른 진리들과 함께, 메시지를 믿은 3천명에게 각성과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 성령에 의해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0장의 상황은 다르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메시지 증거와 그것을 받아들인 일에 뒤따랐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신자들에 의해 불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불신자들이었던 자들이 방언을 말하여 신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일이 베드로와 11장의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이 정말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증해주었다. 방언은 또 다시 증거의 가치가 있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성령을 받아들인 증거로 방언이 나타난 이 세 경우 모두에 사도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사도행전 2장과 10장에는 베드로가 있었고, 사도행전 19장에는 바울이 있었다. 또한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을 때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라. 고린도전서 14 21-22절은 방언이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방언의 증거의 목적이었다. 이 구절을 적절히 이해한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의 과오에서 해방되었다. 방언은 성령을 받았다는 표적이나 축복의 관문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이상에서 제시된 진리들을 정리해보자.

(1) 성령은 모든 믿는 자에 의해 회심시에 받아들여진다.

(2) 후속의 교리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3) 성령 침례는 일부분이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4) 신약성경에는 기다리는 집회를 정당화할 아무 증거가 없다. 모든 참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찾거나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5) 신약성경 어디에도 성령을 위해 구하거나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6) 신약성경 어디에도 성령을 받은 증거로 방언을 시도하거나 말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7)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말하는 대목은 한결같이 독특했다.

(8) 회심 후에 성령을 받아들인 두 경우는(2, 8) 예외적이었고, 오늘날 적용될 수 없다.

(9) 그 모든 독특한 경우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대표하는 사도들의 동석을 요구했다.

(10)은사주의자들이 인정하는 많은 요소들은 초대교회 때 행해졌던 역사와 아무 관련이 없다.

(전도출판사간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발췌)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