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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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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24. 15:27 말씀의 분변

방언에 관한 현대의 오류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그리고 그 일에 관하여 제시되는 교리들은 오순절파 및 은사주의 운동과 관련이 있다. 그 둘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 운동은 19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제한된 수의 교파에 한정되었다. 은사주의운동은 그러한 가르침과 관행이 다른 교파들로 확산되기 시작한 1950년경에 시작되었다. 오늘날 그 운동은 로마 카톨릭을 포함해서 대부분 교파들에 침투해들었다. 신오순절파로도 알려지고 불리우는 그 운동은, 성령으로 세례 받고 방언으로 말하는 경험에 기초한, 모든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는 공동의 교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신학에 기초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경험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것을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모든 부흥 중 가장 위대한 부흥이라고 내세우지만, 그것은 교회들을 찢고 분열시켰으며,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사역을 무너뜨렸다.

 

1. 후속(後續), subsequence)의 교리

오순절파와 은사주의 교사들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생명은 얻지만 능력은 얻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이 능력은 구원 후에 그에 따르는 경험에서 얻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자는 성령을 받고 또 그 증거로 방언으로 말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를 성령 안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성령이 회심시에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주장한다. 이 후속의 교리(모든 은사주의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에 대해서, 잘 알려진 오순절파 교사인 도날드 기(Donald Gee)는 이렇게 주장한다. 오순절파 운동을 명백히 구분된 실체로 만드는 독특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첫 증거로 나타나는 성령세례이다. 돈 바샴(Don Basham)이라는 교사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 세례를 받기 위해 반드시 방언으로 말해야 한다고 독선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정상적인 경험이라고 지적할 뿐이다(A Handbook on tongues, Interpretation and Prophecy, p.34). 그러나 그런 경험을 추구하도록 신자들을 압박한다는 증거는 논박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정확한 때를 성경에서 확정할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날 바울의 가르침을 주목하라.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3:26).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 관계는 즉각 설정된다. 이어서 4 6절에 이렇게 덧붙여졌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성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동일하게 명백하게 만들어 준다. 성령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에베소서1 13절 말씀으로 확증된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또한 로마서 8 9절 말씀으로도 확증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러한 교리적인 진술들은 베드로가 회개하여····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청중에게 촉구하던 오순절 날에 일어난 일과 완전히 일치된다( 2:38).

사도행전 8 5-17절의 사건이 후속의 교리를 증명하고, 그리고 회심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의 공백 기간에 대한 가르침을 확정하는데 인용된다. 그 사건은 매우 흥미롭지만, 그러나 거기에 기초한 가르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8:12,14-17).

확실히 사마리아인들은 성령의 선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매우 독특했으며, 성령을 보류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열왕기하 17장에 기록된 사마리아인의 역사가 그 답을 제공해줄 것이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정복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왕은 호세아였다. 23-24절은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고, 남은 백성들은 사마리아 성읍들로 강제 이주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예배를 발전시켰다. 결국에는 그리심이라는 사마리아인의 산과( 4:20), 사마리아인의 성전과, 사마리아인의 성경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과 유대인 간에 증오심이 조장되었다( 4:9). 만일 사마리아인이 성령을 받았다면, 분명 그들은 유대인을 향한 그 오랜 경쟁심과 적개심을 유지한 채로 간증과 예배를 지속했을 것이며, 그들 사이의 균열과 불화가 교회 안에서 지속되었을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되었다. 마땅히 교회는 하나로 나타나야 했다. 그런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올 때까지 성령의 선물을 보류하셨다. 사마리아인들은, 교회는 이미 존재한다는 것과, 그리고 사도들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의 출발점에서 배워야 했다. 이런 까닭에 아직(16) 성령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아직은 사마리아인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 지체함은 교회의 연합을 보존하고, 사도들의 신분과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의 상황은 매우 독특했고, 또 오늘날 일어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성령이 회심 후에 주어진다는 가르침은 본문에서 확증되고 증거될 수 없다. 또한 사도행전 2장과 유사한 현상이 없다는 점도 주목하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화해를 이룬 사실은 10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룬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거듭나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시간적인 공백이 없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이 곧 성령을 받는 순간이다.

 

2. 기다림의 문제

사도행전 1 4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신 것이 소위 기다리는(waiting or tarrying) 집회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된다. 이런 집회에서 구도자(the seeker)는 입을 열라는 권함을 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 가급적 깊이 숨을 몰아 쉬는 동시에 이제 성령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라고 지시한다(gk나님의 성회 교본에서 인용). 기다리는 집회가 열리지 않는 교제의 자리에서도, 새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촉구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소리가 나오든 그것이 그의 모국어가 아니라면 성령 세례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때로 구도자는 어떤 말을 계속 반복하라는 권함을 받는다. 생각의 흐름에 몸을 밭기고, 감정이 고조되고, 심령의 압박이 증가되면, 그 때 그는 방언으로 말을 한다.

오늘날 성행하는 방언을 오랜 동안 조사한 끝에, 존 킬달(John Kildahl)방언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peaking in Tongues)에서, 많은 경우가 학습된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을 말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유사한 어휘와 소리가 관찰되었다. 이것은 왜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입증되는, 성령의 선물로 묘사된 것을 받으라고 가르침 받아야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또한 사도행전 1 4절은 갈보리와 오순절 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 제자들은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순절 이전의 그들의 위치가 오순절 이후에 사는 신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지지할 수가 없다. 게다가, 신약성경에는 기다리는 집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신자들은 정상적으로는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으며, 신자가 성령을 구했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위해 기도했다든지 하는 기록도 전혀 없다. 각 신자가 성령을 받았을 때는 오순절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홀경의 주절거림이나 감정의 고조나 영혼의 정화 따위에 대한 언급이 없다.

 

3. 방언의 성격

5-13절로 보아,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방언은 논란의 여지없이, 정상적인 교육과정으로 그것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말한 외국어였다. 본문은 신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방언에 대한 가장 명료한 묘사를 제공해준다. 다른 곳에는 그렇게 명백한 기록이 없다. 우리는 이 기사를 신약의 방언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묘사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이후에 나오는, 이보다 별 분명한 방언에 대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지침이 마련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기록들을 화자(話者)가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 사실들이 이러한 견해를 지지해준다.

1) 글로싸라는 헬라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50번의 대목마다 그것은 (tongue)내지 혀들(tongues)로 옮겨졌다. 16번은 몸의 지체인 혀를 가리키고, 한번은 불의 혀 같은 혀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33번은 언어를 가리킨다. 또한 구약성경의 초기 헬라어역인 70인역에는 약 30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인간의 언어를 가리킨다.

2) 사도행전 2 4,6절에 방언(tongues languages)으로 옮겨진 헬라어 단어는 각각 글로싸디알렉토스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방언(언어)으로 들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지방어로 들었다. 여기서 디알렉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들이 연결이 되지 않는 문구나 문장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관용어구를 사용해서 마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말했다는 만족스런 증거이다. 그러한 구별(언어와 지방어)은 황홀경의 언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을 리 없다. 8-11절에는 언어의 다양함이 나타나 있다.

3) 글로싸라는 동일한 단어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모두에 사용되었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처럼 이 단어가 사도행전 2장의 언어들과 이후의 좀 다른 어떤 언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논리에 맞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는 그 단어가 항상 복수형으로 나오며, 이는 다수의 언어를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4)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사용되는 방언이 오순절 날의 그것과 달랐다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런 암시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둘이 다르다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5)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훨씬 뒤에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 당시 방언으로 말하는 문제가 이후의 상황과 달랐다고 일절 암시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는 역사를 기록하는 중이 아니었느냐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요한도 21 19절 상반절에 영감 받은 해설을 포함할 때 그렇게 했다고(즉 역사를 기록하는 중이었다고-역주) 답할 수 있다.

6) 고린도전서 12 10절은 각종 방언을 말하는데, 이는 다양한 어군 내지 어족의 언어들을 암시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언어들을 가리킨다.

7) 고린도전서 14 21절은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앗수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가리킨다. 다음 구절은 그러므로 방언()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방언의 성격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윌리암 사마린(William J. Samarin)인간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Tongues of men and of Angles)에서, 여러 나라에서 오순절파와 신오순절파의 집회에 참석한 일을 말하며 이렇게 촌평했다. 나는 대규모 공중집회만이 아니라 가정집의 조그만 모임에도 참석해보았다. 나는 뉴욕시 북부의 브롱크스구의 푸에르토 리칸과, 애팔래치아 산지의 뱀을 다루는 사람들과, 로스엔절레스의 러시안 몰라칸 등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들을 보았다. ····나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과 대담을 하고, 셀 수 없이 많은 방언들을 녹음하고 분석해 보았다. 그 모든 경우에, 방언(glossolalia)은 언어학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외관상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다. (토론토 대학 언어학 교수로 재직하던 1972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에서 인용).

신약성경에서 방언의 은사는 그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오늘날 방언을 말한다는 주장들은 허위라고 단정할 수 있다.

(전도출판사간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발췌)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