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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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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1. 12:04 횃불/1994년

4

 

계 경 자

 햇살이 따스한 봄이다.

앞 마당에는 지금 막 튀겨낸듯한 팝콘처럼 눈이 부시도록 하얀 목련이 피어있다. 여고시절에 배운 박목월씨의 사월의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 멀리 떠나라.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 멀리 떠나라.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무어든 읽고, 쓰고, 생각하고, 꿈꾸며 속삭이듯 재잘대며, 또 깔깔 웃어대던 여고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제는 그날들을 그리워하며 중년의 문턱에 서서 마음을 움츠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지금이라도 뭐든 읽어야 할 것 같다.

이제라도 뭔가 써 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렇게 급히 지나쳐가 버리는 순간 순간들을 잠시나마 내 곁에 더 머무르게 해두고 싶은게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건 알 수 없지만, 이미 흐트러져버린 책상 서랍 안을 시간내어 차곡 차곡 정리해 가는 것처럼.

다닥다닥 붙은 높낮이가 다른 앞뒷집 건물들 너머로 도봉산이 아주 가깝게 깨끗하게 보인다. 엊그제 내린 봄비로 찌든 매연이 씻긴 때문이겠지.

며칠 전, 꽃샘 추위에 칠 꽃봉오리가 얼어붙어버리지 않을까 마음을 조이며 애태웠었는데, 얼어붙기는커녕 활짝 아주 활짝 피었다. 그 곁에 서 있는 대추나무는 아직 움도 돋으려하고 있지 않는데. 봄을 서둘러 맞으려는 목련의 부지런함이 나의 게으름을 책망하는 듯 하다. 그러나, 따스한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봄을 즐기기에는 아직 바람이 차다. 옷깃을 여미며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문득 신발장 위에 올려둔 검은색 구두에 가서 눈길이 멈췄다.

겨울 동안 특별히 춥지 않은 날이면 나는 이 구두를 즐겨 신었었다.

이미 10여 년간이나····.

 

결혼 전이다.

그때, 내 나이 30이 넘은 때였으니 누가 봐도 나는 노처녀였다. 어느 날, 퇴근 길에 중년의 어느 자매님께서 내가 근무하고 있던 사무실에 오셔서, 내 곁에 앉으시더니 퇴근 후에 약속이 있느냐시며 조용히 물으셨다.

밤낮으로 혼자 바쁜척 동분서주하던 때였으나 마침 그날은 별 일이 없는 것 같아 아무 일이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럼 퇴근 후에 자기와 함께 어딜 좀 같이 가 줄 수 있겠느냐셨다.

엉겹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해놓고 생각해 보니 왠지 걱정이 되었다. 어딜 갈 것이냐고 여쭈어나 보고 대답을 할 것을 여쭙지도 않고 덜컥 대답을 해 버렸으니 이제와서 못 가겠다고 할 수도 없고, 혹시 중매를 서시려는 것은 아닐까?

30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냥 별스럽지 않게 만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재미있는 얘기들을 나누며 지내는 것은 좋지만, 중매인의 소개로 사람을 만나고, 결혼이라는 목적 하에 자기를 소개하고 또 상대방의 여러 면들을 애써 알려고 하는 일들이 피곤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기에 누가 사람을 소개해 준다고 하면 만나는 일 자체가 두려워 거절하기가 일수였다. 혹 그렇잖고 어쩌다 만나봐도 모나고 급한 나의 성격 탓일까 만남 자체가 어색하여 이러한 만남에서 어떻게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 도무지 의아했었다. 그러니 누가 결혼 상대자를 소개시켜준다고 하면 일단은 거절을 하는 편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소문을 들으시고 소개시켜 준다면 따라 나서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이 자매님은 이렇게 퇴근길에 납치하다시피 나와 동행하시려는가 혼자 생각에 잠겼다.

결혼!

모든 사람이 다 꼭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고 하였다면, 결과적으로 시집가는 자도 잘하는 것이지만,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더 잘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더 잘하겠다는 결정에 왜 이렇게 주변의 이해를 받기가 어렵습니까?)라고 가끔 궤변섞인 항변을 하곤 했다.

물론, 나도 30을 넘기기 전에는 결혼에 대해 퍽 초조해 있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성장해 오는 동안 부모님께 특별한 일로 효도를 해드린 적도 없었지만,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적도 없었다고 자신해 왔다. 그런데 듣자하니 딸 자식의 결혼이 늦어지면 바로 그것이 불효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의 마음도 자연 초조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이 내가 마음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결국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30을 넘겼고, 30을 넘기고 나니 이젠 할 수 없지 하는 포기랄까 그때부터는 결혼하는 것보다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것이라신대로 더 잘하는 길을 스스로 택한 양 아전인수격으로 말씀을 적용하기도 했다.

또 한가지 내게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다른 부모님들은 과년한 딸 자식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빨리 시집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직접 간접으로 그 딸에게 결혼할 것을 종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나의 부모님은 예외이셨다. 도리어 나의 아버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내게 혹시라도 나이가 많아졌으니 누구하고든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서둘러 아무데나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시며 심사숙고 할 것을 이르셨다. 그러시면서 불행한 결혼을 하는 것보다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다. 또 요즈음은 옛날과 달라 여자들도 결혼하지 않고도 세상에서 자기 일을 하며 잘 살수 있으니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에만 매여 살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 사시다가 임종을 며칠 앞두고 병환 중에 주님을 믿으셨다. 그런데도, 과년한 딸의 믿음의 길을 인정해 주셨고,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마음이 맞지 않기에 불행한 결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주셨던 것 같다.

그러니 그 나이가 되도록 빨리 시집가라는 재촉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친척 어른들로부터는 꾸중도 꽤 들었지만.

이런터에, 또 이 나이에 누구를 소개받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가.

퇴근 후, 이미 한 약속대로 잠자코 그 자매님을 따라 나섰지만,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가서 누구를 만날 것인가? 괜스레 시간 낭비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이어가다가 그 자매님과 함께 다다른 곳은 시내 유명 구두점들로 가득한 큰 길가였다. 그 자매님은 태연히 한 제화점 문을 여시고 들어서면서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엉거주춤 들어선 나에게 자매, 마음에 드는 구두로 골라요. 며칠 전에 남편이 구두 티켓을 선물로 주셨는데, 내 구두만 하기에는 돈이 남을 것 같아서 자매를 생각하고 같이 온 거예요. 한 켤레씩하면 어떨까? 돈이 모자라면 더 보태면 되니까하시는 것이었다.

난 역시 상상에 빠른 어리석은 자였구나. 일의 결국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다니.

진열된 구두들을 둘러보고는 까만 구 한켤레를 골라 들었다. 조그마한 나비 모양의 세무 리본이 달린 나지막한 굽이 있는 구두였다. 그 자매님도 비슷한 것으로 고르셨다.

그 자매님과 제화점 앞에서 헤어지고 나는 흔들리는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는 혼자 소리없이 웃었다.

노처녀의 상상은 이렇게 구두 한켤레로 끝났구나.

눈이 부시도록 하양게 핀 목련꽃 그늘 아래서 난, 베르테르의 편지가 아닌 지난날 노처녀적의 추억이 담긴 까만 구두를 더욱 까맣게 닦으면서 그 때와는 달리 오늘은 목련의 큰 잎사귀가 만개되면서 냈을만한 큰 소리를 상상하며, 역시 혼자만의 웃음이지만, 이제는 마음껏 소리내어 크게 웃어본다.

 

(1994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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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