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주의 일에 있어서의 모임의 활동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선교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회의 형성입니다.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지만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분의 증인들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복음을 통하여 잃어 버려진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살아 있고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이끌림 받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영적인 섬김이 갖고 있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4:12). 그분의 몸으로 불리는 교회( 1:23)는 모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개인 신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국가와 사회와 문화의 차이들과 상관없이 이 신자들은 구원받을 때 교회에 더해집니다.

에베소서 3:4-6절을 보면 교회는 비밀로 불립니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계획은 그 최절정에 이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비밀로 일컬었는데 그 비밀은 그리스도 자신의 비밀이 아니라 교회의 비밀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원어에 보면 관사가 들어 있고(“the Christ”) 따라서 이것은 교회(the church, 몸된교회)를 가리킵니다.

 

창세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에서 교회시대는 그분의 위대한 계획의 최절정을 이룹니다. 영원한 신성(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는 영원 전부터 동등성과 하나됨과 생명과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 아들을 위하여 신부를 예비하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신 데서 명확히 나타났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 칭해지는 교회가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부가 되어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휴거될 때 교회 시대 동안 거듭난 신자들은 한 명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이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살아 있는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신자들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서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살전 4:13-18)!

 

에베소서 4:4-6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의 삼중적인 관점을 알려줍니다. 그것들은 몸된교회, 지역교회, 영원한 상태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한 소망” : 그분의 몸된교회를 가리킵니다.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지상에서의 간증을 가리킵니다.

*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 영원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지상에서의 간증과 관련된 곳에서는 다음의 것들이 나옵니다.

* 한 주님 - 예수 그리스도는 모임 위에서 또 모임 안에서 주님이십니다.

* 한 믿음 - 단번에 주신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 3)를 가리킵니다.

* 한 침례 - 이것은 물에 잠기는 침례를 가리킵니다.

 

간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1. 개인적인 간증 -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으로서의 각 신자의 삶

2. 집합적인 간증 -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간증들로서의 지역교회들을 갖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입니다.

 

모임은 구원 받고 침례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8:20). 주님을 한가운데 모신 가운데 모임은 그분의 권위 하에서 행할 수 있고 이는 특히 침례, 교제, 천거, 질서, 징계 등에서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8:18-19절은 종종 교회시대에 주신 지상명령이라고 불립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관련된 시기에 대해 견해 차이가 나타남을 알고 있지만 교회시대이든 장차 올 시대이든 이 원리는 동일하며 그것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나와있습니다.

 

* 복음 전파를 통한 구원

*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를 공표하는 침례

* 모임의 간증을 세우기 위한 가르침

 

지역에서의 모임의 활동

복음집회에 대하여 성경에 토대를 두지 않은 견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복음 전파가 모임의 책임이 아니라 신자들 개개인의 책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모임은 복음집회를 열 책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들에게는 개인전도를 활발히 행할 것이 기대됩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집회가 전도자들의 책임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집회는 모임 장로들의 책임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자매들이 머리에 너울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볼 때 복음 메시지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고전 15).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복음 전파는 모임의 집회들 중에 들어가야 마땅하며 장로들은 모든 집회들에서 성경적인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복음 사역은 복음을 강단에서 말로 전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가가호호 방문하고, 소책자를 나누어주고, 찾아가보고 하는 준비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상당수의 여자들이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가가호호 방문 사역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복음 소책자를 넣어두고 오는 일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더 끌어 모으려는 목적을 가지고서 복음 전파에다가 뭔가를 추가하기를 좋아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편안한 다과회를 도입하는가 하면 심지어 특별 음악 공연까지 벌입니다. 또한 복음집회라는 명칭을 바꾸어 교회와 관련된 표현인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지적인 표현인 세미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인가요? 혹은 그것은 신자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연관된 문제인가요?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우리는 복음이 귀중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아는 가운데 그 복음을 전파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지를 전해주는 삶이며 이 기쁜 소식의 메시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경외심과 충성을 필요로 합니다!

 

복음집회 후에 가벼운 다과를 내놓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과 더불어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복음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아직 의문점들이 남아 있을 경우엔 더욱 그렇습니다.

 

먼 지역들에서의 모임의 활동 : 확장 사역과 개척 사역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본으로 제시됩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살전 1:8).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졌습니다. 심지어 지역의 경계선을 넘고 나라의 국경선을 넘으면서까지 말입니다. 지역교회들은 복음을 들고 뻗어나가고자 늘 힘써야 하며 모임이 복음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들을 개척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확장(outreach) 사역이나 개척(pioneering) 사역의 표현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우리에게 친숙하며 우리는 그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1. 확장사역

확장 사역은 현재의 모임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거리의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서 이 확장 사역을 발견할 수 있나요? 사도행전에 기록된 누가의 기록의 상당 부분은 뻗어나가는 선교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전도자 빌립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고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1:8).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주님의 명령은 복음을 전파하고, 침례를 주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임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간증들인 모임들을 세우시는 것이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렇게 하여 첫 번째 모임은 예루살렘에서 세워졌는데, 거기서는 핍박이 행해졌고 따라서 그곳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8:1).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멀리까지 갈 수밖에 없게 하셨고 그 결과 복음 메시지가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9:31).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4).

비록 핍박 아래 확장 사역이 이루어졌지만 그 사역을 수행할 책임은 여전히 예루살렘 교회에게 있었습니다.

확장 사역의 좋은 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 각처에 퍼지므로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우리는 말씀이 그들에게 이른 것을 봅니다(5). 또한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음을 봅니다(“말씀을 받아’ 흠정역. 6). 또한 그 말씀이 그들로부터 퍼져나가는 것을 봅니다(8). 이렇게 넓은 지역들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상업에 종사하는 형제들이 복음을 들고 그 지역들로 갔기 때문일 수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이 확장 사역에 모임 전체가 관여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역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지역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며 그분은 완전한 주님이십니다! 모임 밖은 사단의 영역입니다. 지역교회들에게 주신 이런 권위를 생각할 때, 주님의 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지역교회에 의해 행해져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몇 명의 형제가 복음을 전할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부담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가르침은 소속이 없는 일문들에 의해 행해지는 사역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몇 형제들에게 엄청난 열심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열심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주님을 뒤따라야 합니다. 무슨 일을 먼저 시작하고서 그런 다음 주님께 그 일을 기억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성경의 모본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 기간이 필요하며 주님의 명확한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놀라운 축복의 때입니다!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모임은 그 확장 사역을 지원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도로써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장 사역은 시작부터 교제 기운데 또 모임과의 협력 가운데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신자들이 현재의 모임보다 확장 사역에 더 커다란 노력을 쏟아 붓는 경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장 사역은 현재의 모임을 위한 사역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확장 사역에서의 집회시간이 현모임의 집회시간과 겹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들에 그 확장 사역에 열중하는 형제들은 모임에 모습을 별로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확장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동기의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본 모임에 만족하지 못하던 형제들이 또 다른 사역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기가 깨끗하지 못하며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토요일 저녁에 집회들을 갖지 않기도 하는데 이는 주일의 집회들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앵글로색슨계 나라들만의 관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토요일 저녁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을까요? 혹은 그것은 오직 말씀 증거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나라들에서 토요일 저녁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다가갈 최고의 시간인 것이 확실합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노력을 쏟으면 이 저녁 집회에 가장 많은 인원이 참석합니다. 왜 토요일을 확장 사역에서 복음집회를 갖는 데에 사용하지 않나요?

 

확장 사역을 행하는 목적이 성취되어 새로운 모임이 세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이 세워진 모임에서 책임 있게 일할 형제들을 결정해야 하는데 이 일은 현재의 모임에 많은 지혜를 요구합니다. 조화를 이룬 신자들의 무리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모임에 젊은 형제들뿐 아니라 보다 나이 많은 몇몇 형제들도 포함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2. 개척 사역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곳은 본국에서 아주 새로운 지역일 것이며 복음이 결코 들어간 적이 없는 지역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대한 원리들은 본국에서 일하는 주님의 종들이든지 아니면 외국에서 일하는 주님의 종들이든지 동일합니다. 이러한 원리들은 사도행전 13장에 설명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선교 사역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본이 되는 선교 사역의 시작

선교 사역의 시작은 사도행전 13:1-4절에서 발견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성령님의 인도 아래서 주님의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모임 안에서뿐 아니라 주님의 종들의 삶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1. 주님의 일을 위한 준비

 

전임사역자가 되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준비는 지역교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젊은 형제가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아직 보여준 것이 없다면 또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섬김을 나타낸 것이 없다면 그가 선교지에 가서 달라질 거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누군가를 선교사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전임의 섬김으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이미 안디옥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선교지에 나가기 전에 성경학교나 신학교를 거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파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모임은 영문 밖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한 간증입니다. 모임들은 교파 교회들 혹은 조직적인 단체들과 섞일 수 없습니다. 모임에게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하게 확실한 근거로 남아 있는 것은 성경의 모본뿐입니다. 그런데 신약 교회들의 실행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은사들이 개발되는 곳으로 계획한 곳은 지역교회임이 분명합니다. 디모데후서 2:1-2절에서 사도는 가르침이 계승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지역교회 안에서 성경은 열린 책이며 신자들은 그 책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진실로, 지역교회는 은혜 속에서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자랄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외국에서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 역시 성경의 원리들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는 또한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신의 지역교회 및 주변의 모임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보냈던 몇 년 간의 준비기간을 언급했습니다( 1:17). 그는 최초의 사도들에게 배우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주님께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추었습니다(고전 11:23; 15:3). 주님은 이 사도를 복음 전파뿐 아니라 모임들을 세우는 데에도 사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더욱이 최소한 13권의 서신서를 쓰는 데에도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있었고 그의 글들은 성령님에 의해 영감되었습니다.

 

2. 그분의 종들을 부르심

안디옥 교회는 교사 혹은 선지자로서 자신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다섯 명의 형제들을 갖는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 다섯 명의 형제들 중에서 두 명만 특별한 섬김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그 두 형제가 다른 형제들보다 사역 면에서 더 나았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부르시면서 그분이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아셨습니다. 바울에 대하여 말해본다면,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최소한 다섯 가지의 언어를 구사했던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아람어, 아라비아어 등을 사용 할 수 있었고 따라서 당시에 세계 어느 곳이든지 가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의 교육 배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분명 그 역시 몇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 덕분에 오늘날의 세계는 예전보다 훨씬 더 좁아졌습니다.

젊은이들이 외국을 방문하기도 쉬워졌고 선교 사역을 잘 알게 되는 것도 쉬워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흥미를 일으키거나 감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정한 선교지에서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직 부르심이 아닙니다. 자극, 감동, 공감, 필요, 어느 선교사의 호소 등이 주님이 부르셨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또는 어디로 가든지 필요는 많이 있습니다. 가족들 가운데서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의 필요가 여전히 크게 존재합니다.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집 밖에서도 그러한 필요는 크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딤전 2:3).

 

부르심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어떤 형제가 주님께로부터 온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것은 그 모임에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임은 주님께서 행하고 계시다는 완전한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3. 그 모임에 대한 지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 각각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이들은 전임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들은 일을 위하여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종들의 사역은 광범위하며 자신만의 수고의 영역을 가질 것입니다. 그 중에는 의료 사역, 교육 사역, 번역 사역, 인쇄 사역, 출판 사역 등과 같은 특별한 사역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민자들과 망명자들 가운데서의 사역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주님의 일이 다양하다 할지라도 그 목표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모본을 오늘날에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침례, 지역교회의 교제에 더해짐입니다.

 

선교 사역의 초기에, 성령님은 그분이 지니신 목적에 대하여 그 모임에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 모임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이 두 형제를 그 지역교회의 교제로부터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을 위하여” - 이것은 먼 곳들에서 행해질 일이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 바나바와 사울이 받은 이 부르심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시도록 완전히 내어드림을 의미했습니다. 그 모임에 대한 지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천장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와 같은 기적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들 중 하나의 사역을 통해서 왔습니다. 선지자는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할 수 있는 은사를 부여받은 이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표적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사도의 은사와 선지자의 은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또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안디옥 모임은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금식이라는 단어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서는 태도를 나타내며 기도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향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그 단순한 지시를 받은 후에 그 모임은 두 사람에게 안수함으로써 그들의 교제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성직 수임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전해주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은 동일시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 모임은 은사가 탁월한 두 형제를 떠나 보낸다는 사실에 슬퍼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음성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어 그들을 보내주었습니다.

 

4. 그분의 종들을 파송함

3절의 보내니라는 단어는 정확한 의미를 나타내주지 못합니다. “보낼수 있는 권위를 가진 것은 그 모임이 아닙니다. 4절에서 알려 주는 대로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 모임이 해야 했던 일은 그들을 놓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종이 주님의 명령을 따르고자 움직일 때 그를 제한하는 요구들은 사라졌습니다.

 

두 선교사가 그 해안가를 떠나기 전에 고별집회가 열렸습니다. 고별집회에는 흔히 다른 모임들에서 온 형제들도 참석합니다. 그리고 많은 형제들이 인정과 격려의 말들을 전해줍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위한 고별집회는 어떠했나요? 안디옥 모임은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나요? 그렇다면 고별 집회에서 들려지는 온갖 좋은 말들 대신에 살아 있는 기도집회가 더 필요하지 않나요? 고별집회는 주님께서 그분의 종을 사용해주시도록 간절히 구하는 영적인 집회여야 합니다.

 

5. 모임의 천거

* 천거의 의미

* 천거의 범위

* 천거의 근원

* 주님의 종들을 지원함

 

(1) 천거의 의미

시편 119:105절에 표현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지침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신자가 성경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의 길은 올바를 것이며 주님께서 그에게 복 주실 것입니다. 모임 역시 성경을 따라 행동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경의 원리들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천거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4:26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모임의 천거를 받은 후에 떠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져갔을 때 새로운 장이 열렸는데,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두 형제뿐 아니라 안디옥 모임 편에서도 이 주님의 일에 있어서 적극성을 나타냈습니다. 그 모임은 주님의 일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주님의 두 종을 천거함으로써 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했습니다.

 

성경에서 선교사역의 모본을 볼 때 지역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일꾼들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주님은 각 지역교회에게 권위를 주셨는데 영접, 출교, 천거 등이 그러한 권위의 실행들이며 주님의 종들은 한 지역교회의 천거를 받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각 지역교회는 천거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숙함의 증거들을 보지 못했는데 너무 일찍 천거해주는 경우들도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영역에서는 많은 말들보다는 입증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의 경우처럼 모임은 그 부르심이 참되다는 증거를 소유해야 하며 이것이 천거에 대해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일 불확실함이 남아 있다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런 경우 그 모임은 인도하심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젊은 형제가 주님 기다리기를 배우는 것은 그릇됨이 전혀 없고 이 기간은 그분의 부르심의 증거들이 더욱 나타나는 시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이를 천거할 수 있음은 그 모임 편에서 볼 때 커다란 특권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커다란 책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천거를 한 후 주님의 종은 그 모임의 감독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 모임이 그 주님의 종의 사역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결정권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거할 때 그 모임은 그 주님의 종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인간들로부터 오는 지시가 아닌 위로부터 오는 지시를 따르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가 흔들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선교지에 나간 형제가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올바르지 못한 행실을 나타내거나 도덕적인 죄에 빠지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모임은 책임을 지게 되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조치를 취할 권위를 행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형제들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그 문제를 다루지 말아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사자를 만나서 그에게 해명 혹은 시인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언제나 중요합니다. 형제들이 공정하게 행할 것을 기대합니다!

 

일반적으로 선교사는 선교지에 있는 한 모임과 교제를 나누는데 그 모임에서 그 형제를 징계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된다면 그들의 결정은 그 형제를 천거한 모임에도 알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모임은 그 선교사를 불러들일 책임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는 장로들과 만나 선교지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상황 설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그릇된 가르침이나 범죄의 문제라면 그 형제에 대한 천거는 철회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천거의 유효함은 그 주님의 종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들이 유혹을 겪는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선교지에서는 본국에서보다 유혹이 훨씬 더 강렬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하고 부도덕한 세상에 살고 있고 우리에게는 아직 육신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0:12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2) 천거의 범위

바나바와 사울을 특정 지역으로 천거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안디옥 모임은 다만 그들을 주님의 일을 위하여 천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져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음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또한 여러 가지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바울의 뛰어난 능력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는 당시에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는 대략 3,000가지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어들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행하는 사역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한 나라로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선교사가 또 다른 나라로 옮겨가도록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는 경우라면 그는 그 문제에 대해 먼저 그의 본 모임에 알리는 것이 옳습니다. 선교사들이 질병이나 노령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경우라면 그러한 결정들은 주님 앞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은퇴한 선교사도 여전히 그 선교지에 단기간 방문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3) 천거의 근원

천거의 의미를 생각할 때, 오직 하나의 모임만이 주님의 종을 천거할 권위를 갖습니다. 물론 우리는 전임 일꾼이 많은 천거를 받는 것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존중받는 이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 모임의 권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복수의 천거들은 그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복수의 천거들은 그 주님의 종을 많은 모임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상태에 처하게 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맞지 않는 일종의 중앙 감독 형태까지 만들어낼 기능성이 있습니다.

 

뒷받침할만한 직접적인 성경 구절들은 없지만 다른 모임들이 천거를 인정해주는 것이 용인될 수도 있습니다. 최초의 천거는 일반적으로 본 모임에서 하는 것이지만 다른 모임들이 그 최초의 천거를 보증하여 그들의 동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 본 모임은 자치권의 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직업에서 은퇴한 형제를 주님의 일로 천거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됩니다. 일꾼들의 필요는 항상 존재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9:37-38).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하나요?’ 나이가 많든 적든 한 형제를 주님의 일로 천거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퇴직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형제를 위한 천거는 그의 형편을 감안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유럽의 모임들에서는 퇴직한 형제가 주님의 일로 천거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거서에는 그가 자비량’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임들이 그의 생활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은사가 뛰어난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은 모임들에게는 축복된 일이며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유익을 얻는 모임들이 그들의 여행비용은 부담합니다.

 

(4) 주님의 종들을 지원함

바울과 바나바가 주님의 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지원에 대해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원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성경의 원리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사도들의 시대에 그랬듯이 말입니다. 주님은 그분이 부르시는 이를 인도하시고 보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모든 것은 주님이 정말로 그를 부르셨는지에 달려 있고 만일 그렇다면 다른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이는 그 선교사가 어려운 시기를 만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앞서간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매일의 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현시대는 물질주의가 모임들과 주님의 종들의 영적인 상태를 약화시키고 있는 때입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매일의 필요를 위해 주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이 교훈은 주님을 섬기려는 준비를 갖추어나감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인격은 시련과 어려움의 때에 빚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종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사울을 천거할 때 은혜의 보좌 앞에 그들을 맡기는 것 외에 다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종들은 주님의 은혜에 의탁되며 이것이 전부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주님이 친히 돌보시는 예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물질주의가 만연한 현 시기에 주님의 종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참으로 막중하며 우리는 이 부유한 시대에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의 종은 그의 삶과 사역에서 오직 주님만을 의뢰하는 이로 나타나야 합니다!

 

연보를 보냄에 있어서 동일한 주님의 종들에게 정해진 액수를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각 모임은 이 일에 있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할 필요가 있는데 연보를 많은 종들에게 골고루 보내는 것이 더욱 좋은 방법임이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이 일에서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인 태도를 견지할 때 주님께서 본국과 해외에서의 그분의 일에 사용되는 모든 돈에 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각 모임은 신뢰할만한 사역을 지속해온 주님의 종들에게 자유롭게 연보를 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원리들을 붙드는 형제들에게 연보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보내는 모임과 받는 주님의 종 사이의 영적인 하나됨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선교 사역의 일부분을 담당할 수 있음은 특권이며 각 모임은 그 특권을 누림으로써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