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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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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

 

교제에 대하여 세 가지 주된 측면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1) 아들의 교제

(2) 하나님의 가족 안의 교제

(3) 지역교회의 교제

 

1. 아들의 교제

고린도전서 1 1-9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많은 성경 교사들은 이 구절의 부르심을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실로, 구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절의 문맥에 일치되는 해석인가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에 그치나요, 아니면 그것은 모임 교제로의 부르심도 의미하나요?”

고린도전서 1:1-9절의 초점은 신자 개인들에게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던 신자들 무리 전체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사도 바울이 다른 교회들에서 가르쳤던 바와 똑같은 가르침이 필요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각처에서라는 표현은 신자 개인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모임이 세워져 있는 모든 곳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을 지지하는 구절들은 고린도전서 4:17; 7:17; 11:16절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때로 지역교회의 헌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 무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말 이후에(4) 바울은 그 은혜가 주어진 증거들을 언급합니다.

* 신자들의 무리로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습니다(5). 구변은 외적인 표현이며 지식은 내적인 확신입니다.

* 신자들의 무리인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했습니다(6).

* 신자들의 무리로서 그들은 은사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7).

* 신자들의 무리로서 그들은 주님의 오심 혹은 나타나심을 기다렸습니다(7).

* 신자들의 무리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9).

*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은혜가 역사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은혜가 따라왔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두 표현이 눈에 띄며 우리는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 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증거

*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의 교제

 

그리스도의 증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증거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은 이 표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곳의 내용과 부합되나요?”

 

문맥을 파악하기 위해서 해당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니 이는 곧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된 것과 같도다”(6, 흠정역).

이는 곧 같도다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꼭 마찬가지인”, “ ... 이기 때문에” “그러므로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증거는 모임을 강하게 하여 모임으로 하여금 일할 수 있게 만드는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증거가 신자들 가운데서 견고해졌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한 모임의 증거가 확고하게 세워지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그 결과로 은사들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모임 안의 모든 활동들의 역동적인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는 무엇인가?

그의 아들과의(with His Son) 교제가 아니라 그의 아들의(of His Son) 교제임을 유의하십시오. 그 의미는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모임은 그의 아들의 교제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안으로”(에이스)에 쓰인 헬라어 단어는 그의 아들이 계신 방향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을 가리킵니다(1장에서 마태복음 18:20절에 대한 설명을 보십시오). “부르신이라는 단어는 참여 혹은 공유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와 같이 면밀하게 살펴볼 때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 무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교제 안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백성 한가운데에 계시며 지역교회를 이루는 신자들은 하나님 아들의 교제를 즐거워합니다.

 

J. 헌터는 햇불주석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바울이 그분을 어떻게 묵상하는지를 보라. 그의 아들-신성, 예수-인성, 그리스도-높이 되심, -권위

 

2. 하나님의 가족 안의 교제

요한일서에 나타난 교제의 모습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입니다(요일 1:3).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이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근거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 1:7).

여기서 “ ... 하면”(if)이라는 단어에 대해 쓰인 원어는 때문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다시 어두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이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13).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거듭난 신자들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요 순종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두움과 밤과 불순종이 존재합니다. 요한일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8).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어두움 가운데서 발견되는 일은 어떻게 해서 발생할까요? 신분적으로 말하면 신자는 항상 빛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거듭난 신자를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불변하는 신분을 누리는 자로 보도록 일관되게 가르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일서 3:9절과 같은 구절들을 대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 1:7절을 조건적인 측면(if)이 아닌 구원의 확실한 결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는 말씀이 더해진 것은 신자들이 주님 및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로 이끌림 받는 원리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는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을 때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과 상호간에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 안의 교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거듭난 신자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든 간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고 또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된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을 만날 때 우리는 구원에 기초한 교제를 나누며 주님 안에서 함께 즐거워합니다. 각각의 하나님의 자녀는 귀중합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주님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17:6).

 

3. 지역교회의 교제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2:42).

인용한 이 구절에 나타난 교제의 모습에 대해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책들이 씌어졌고 많은 잡지의 글들이 씌어졌습니다. 그와 같은 다양한 설명들을 생각해볼 때 이 구절의 명확한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 보입니다. 이것은 함께 앉아서 하나님 말씀이나 복음을 들으면서 교제를 나누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윌리엄 켈리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도행전 2:42절의 교제라는 표현은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지역교회와 관련된 네 가지 활동을 말해주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을 지역교회의 네 가지 기둥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네 모습들을 깊이 생각해볼 때 그 강조점은 교제에 있는 듯합니다. 만일 교제라는 단어를 빼버린다면 전체 구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왜냐하면 모임은 교제로 인해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 사도들의 가르침은 모임 교제의 기초를 이룹니다.

* 교제는 지역교회의 기능에 필수적입니다.

* 떡을 뗌은 분명 교제의 표현입니다.

* 기도는 교제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지역교회의 이 네 가지 활동 모두를 지속적으로 힘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9절에 보면 모임의 간증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임의 간증을 세운 것은 네 가지를 계속해서 힘쓴 신자들 편에서의 충성스러움입니다. 신자들이 계속해서 충성스러울 때에만 모임은 하나님의 교회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1) 모임 교제의 범위

사도행전 2:42절은 지역교회 안에서의 교제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나고 침례를 받은 신자들이 영접될 수 있거나 출교될 수 있는 그런 교제입니다. 우리는 이를 모임 교제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임 교제를 나누는 각 신자들은 그 의미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인 실행들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이것이 사도들의 교제와 관련된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 교제는 오직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임 교제의 특권들과 책임들

모임 교제에서 우리는 특권들과 책임들을 철저하게 공유합니다.

모임 교제를 나누고 있는 모든 신자는 특권들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책임들을 담당해야 합니다.

 

2) 모임 교제의 특권들

* 모임은 예배의 자리입니다.

* 모임은 배움의 자리입니다.

* 모임은 은사를 발전시키는 자리입니다.

* 모임은 섬김의 자리입니다.

* 모임은 보호의 자리입니다.

 

3) 모임 교제의 책임들

* 모든 집회에 충성스럽게 참석해야 합니다.

* 장로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임의 질서가 유지됩니다.

* 모임의 모든 집회에서 활발하게 섬겨야 합니다.

* 모임의 전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4) 모임 교제의 기초

널리 퍼져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모임의 신자들이 한 몸 진리에 근거해서 함께 모인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붙드는 모임들에는 두 무리가 있습니다.

 

(1) 거듭나고 침례 받은 신자들을 그들이 주의 상이라고 부르는 떡을 떼는 집회에 영접하는 모임들. 그들은 모임 교제가 이 아닌 생명에 근거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6세에서 8세까지의 어린이도 구원받으면 모임 안에서 자기의 좌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임 교제의 근거를 생명에 두는 것은 모순됩니다.

(2) 전 세계의 교제권 모임들에 속한 신자들만을 영접하는 모임들. 그들은 주의 상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그릇된 적용!). 또한 이 교제권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악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에 근거해 함께 모인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보았을까요? 예루살렘 모임이 세워졌을 당시에 한 몸 진리가 알려졌을까요? “한 몸에 대한 진리는 사도 바울에게 비밀로 맡겨졌습니다. 비밀은 예전에는 숨겨졌다가 이제는 계시된 진리와 관련됩니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 하셨으니”( 3:4-5).

한 몸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발견되며 두 서신 모두 주후 63년에 씌어졌습니다.

 

첫 번째 모임은 오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눈에 띄는 구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조차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10:15)는 교훈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사도행전은 모임 간증의 이런 초기 상태로부터 좀 더 성숙한 상태로 가는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소유했다는 점에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시의 부흥의 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초창기에 가르쳐진 바는 주님의 위격 및 그분이 가르치신 것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께서 이 땅에서 공적 사역을 행하실 때에 그분을 따랐던 이들인 까닭이었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지역교회의 교제, 떡을 뗌, 기도집회 등의 유익을 얻으면서 살았습니다.

 

모임 교제의 기초는 무엇인가?

이것은 중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도들의 교리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들의 순종과 헌신을 충성스럽게 나타냈습니다. 이 가르침은 분명히 일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비한다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 모임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간증을 드러냄에 있어서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특히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가르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지역교회의 기능을 가르쳐주는데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른 모임 안에서의 규례들 몇 가지를 간략히 언급해보겠습니다.

 

* 오직 거듭나고 침례 받은 신자들만이 모임의 교제를 나눕니다.

* 신자들은 끊임없이 교제에 힘써야 합니다.

* 장로들은 모임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징계를 행해야 합니다.

* 모임을 세우기 위하여 영적인 은사들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 형제들은 집회 때에 공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 자매들은 모임 안에서 너울을 쓰고 잠잠해야 합니다.

* 신자들의 삶은 깨끗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임의 어떠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개인생활에서, 결혼생활에서, 가정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모임생활에서 사도들의 가르침 전부가 지켜져야 합니다. 거듭난 신자가 이 땅에서 간증을 드러내는 궁극적인 목표는 모임 교제를 위해서이며 주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모임들은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교제를 나눕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교제의 다섯 가지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1) 영적인 교제 - 동일한 생명을 공유함(요일 1: 3,7)

(2) 빛의 교제 - 진리에 관한 동일한 빛을 공유함( 2:42, 고전 1:9)

(3) 사회적인 교제 - 상호간의 사랑을 공유함( 2:46; 16:34)

(4) 활동상의 교제 - 섬김의 수고를 공유함( 1:5)

(5) 실제적인 교제 - 물질적인 소유를 공유함( 4:14-15)

 

우리는 5장에서 제시된 다양한 교제의 기초가 다음과 같다고 결론내립니다.

(1) 그의 아들의 교제는 지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거(진리의 본체)를 견고케 합니다.

(2)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피차에 교제함은 구원 안에서 아버지 및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3) 지역교회의 교제의 기초는 사도들의 가르침(진리의 본체)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