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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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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교회의 집회들

 

지역교회의 집회들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절은 각 모임을 위한 모본으로 제시되어 있는데 신자들은 다음의 일들을 끊임없이 힘썼습니다.

(1) 사도의 가르침

(2) 교제

(3) 떡을 뗌

(4) 기도

이것들은 이른바 지역교회의 네 기둥들이며 그 터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신약성경에는 최소한 일곱 가지 집회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 떡을 뗌(고전 11:23-27; 20:7).

* 말씀집회(고전 14; 11:26).

* 기도집회( 1:14; 2:42; 4:31).

* 복음집회(살전 1:8).

* 선교보고 집회( 14:26,27).

* 징계 모임(고전 5:4,5).

* 장로 모임( 15:6; 20-바울은 장로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1. 사도의 가르침

당시에 사도의 가르침은 구두로 전하는 말씀증거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이 신약성경의 서신서들로 보존되어 있고 모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들은 반드시 이 사도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행해져야만 합니다. 신약성경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 사복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은 사도시대 동안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책입니다.

* 사도들의 편지들( 21) 중에서 13권은 사도 바울의 손에 의해 씌어졌습니다. 이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가르침과 교회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배웁니다.

*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서 유일한 예언서입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의 기초를 사도행전의 사건들에 두는 교파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의 행동들(행위들)과 사도들의 가르침 간의 차이점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의 사도행전”(Acts of the Apostles)이라는 책은 사도시대 동안에 모임이 어떻게 간증을 드러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행동의 책입니다. 그러나 모임 간증의 초기에는 모임과 유대 성전 및 전통 간에 여전히 공통점들이 있었으며 따라서 분명 사도행전은 과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임들의 영적인 성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계시들이 증가해 감에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그것을 똑같이 나누도록 인도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들의 가르침(서신서들)에서 그것이 명령으로 주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해진 바는 그것이 모임 안에서 행해졌던지 또는 모임에 의해 행해졌던지,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서 발견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전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을 게을리 할 경우 거짓 가르침이 득세할 수 있습니다. 실행이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 계시된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한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는 다음과 같은 집회들입니다.

* 말씀집회

* 성경읽기(Bible reading) 집회

* 복음집회

 

어떤 이들은 복음집회는 모임의 집회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복음집회나 선교보고 집회는 전도자나 선교사의 책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이러한 견해를 실천에 옮긴다면 그것은 이러한 집회들이 감독과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이며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절과 고린도전서 15:3절에 나타난 사도의 권위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곳들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바를 성도들에게 전해주었는데, 첫 번째 구절에서 그것은 떡을 뗌이었고 두 번째 구절에서 그것은 복음의 교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진리들을 예루살렘의 최초의사도들로부터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주님께 직접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교리들을 자신의 서신서들에 충성스럽게 기록해놓은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절을 보면 복음 메시지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속한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주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서 우리는 복음 메시지가 포함된 사도들의 가르침을 충성되이 보존함에 있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모본을 따라야만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모임의 전도의 열심이 주변 지역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칭찬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살전 1:8). 복음집회는 모임의 집회로서 지속되어야만 하며 이런 집회를 하는 동안에도 성경적인 질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떡을 떼며 주님을 기념하고 또 영광스러운 복음 메시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스럽게 전파하는 모임에 우리가 속해 있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2. 교제

이것은 지역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만 가리킵니다. 신자들은 한 모임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들은 또한 출교될 수도 있습니다. 교제에 관한 주제는 5장에 가서 별도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3. 떡을 뗌

주일 오전 집회를 가리키면서 그 동일한 집회를 놓고서 여러 가지 표현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일치될까요?

(1) 주의 상

(2) 주의 만찬

(3) 떡을 뗌

(4) 기념 절기

이 중 어느 표현을 사용해야 할까요?

 

1) 주의 상

이것은 가장 흔히 사용되는 표현일 것입니다. 주의 상에 대해서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저자들이 많이 언급했습니다. 이 표현은 기도할 때 또 말씀집회 때에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우리는 이 표현이 그것의 정확한 성경적 의미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주의 상이라는 이 표현을 성경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이것은 고린도전서 10:21절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성경들에서는 단락마다 제목을 붙여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번역자들 혹은 출판사들의 작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영감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습니다. 그러한 성경 역본들에 보면 다음의 단락들에 이러한 제목들이 불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22 - “주의 상의 거룩함

고린도전서 11:17-22 - “주의 상의 무질서

고린도전서 11:23-34 - “주의 상의 순서와 의미

이 세 단락의 제목들에서 주의 상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이 성경 번역자들은 주의 상이라는 표현을 떡을 떼는 집회와만 관련지어 사용했음이 분명합니다. 11장의 단락들을 읽어볼 때 거기서는 주의 상이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표현을 넣어서 제목을 붙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흠정역은 10장의 단락에 대해서는 우상숭배를 피하라” 11장의 단락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예배에 대한 명령주의 만찬등의 제목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 본문에 대하여 흠정역이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전서 10장 단락의 주제는 떡을 뗌이 아니라 교제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동시에 세상과 교제할 수 없음을 그리스도인들 각자는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 다와 교제할 수는 없으며 이편이든 저편이든 양자택일해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1).

 

고린도전서 10장의 가르침은 고린도후서 6:14-18절과 일치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우리는 세상의 사회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면들과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분명 무늬들이 새겨져 있는 가구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떡을 떼는 것의 영적인 의미와 관련되지도 않습니다. 이 표현은 그보다 훨씬 더 폭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님과 교제하는 중에 누리는 모든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서 1:3절을 인용할 수 있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다윗은 주의 상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 23:5).

고린도전서 10장에서의 주의 상은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을 가리키며 귀신의 상은 사단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각각은 그분의 상에 끊임없이 앉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또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것은 신분에 관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인 경험으로 누려져야 합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4:4). 따라서 우리는 세상이 제공하고 있는 바로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참고사항 : 교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6장에서 더 설명하려 합니다.

 

2) 주의 만찬

이 표현은 성경에서 한 차례만 등장합니다. , 고린도전서 11:20절에서만 나옵니다. 문맥상 이 표현은 애찬”(아가페)과 구분되어 사용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들 중에서 한 가지를 끄집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주님을 기념하는 일보다 자신들의 애찬들을 더 중시했다는 점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주님을 기념하는 일이 아가페 만찬(애찬)과 완전히 구분되게 주의 만찬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3) 떡을 뗌

떡을 뗌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1) 떡을 뗌은 누가복음 23:14-20절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2)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3-30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떡을 떼라고 가르쳤습니다.

(3) 사도행전 2(예루살렘)과 사도행전 2(드로아)에 기록된 대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떡을 뗌을 실행했습니다. 드로아에서 행해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떡을 뗌이 주의 첫 날에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떡을 뗌이란 표현은 이중적으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 기념집회

* 식사

 

떡을 뗌은 그것이 주님을 기념함에 대한 표현으로 알려지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식사에 대해서 흔히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물음과 대답이 오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저녁 몇 시에 떡을 떼었나요?” 그 뜻은 이러했습니다. “당신은 몇 시에 저녁 식사를 했나요?”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다 모인 다음 6시쯤에 떡을 떼었어요이는 그 가족이 6 저녁 식사를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떡을 뗌이라는 표현이 식사를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도행전 2:46.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0:11. “떡을 떼어 먹고

크고 납작한 떡 한 덩어리를 상 위에 놓고 그것을 여러 조각들로 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13-35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 낯선 이를 자신들의 거처로 같이 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앉아서 즐겁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그분의 손을 내밀어 떡을 취하실 때 두 제자는 그분의 손에 못 자국이 나 있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갈보리의 흔적이었습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30).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1).

그러자 그들은 그 낯선 이가 주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서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주님이 떡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35).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떡을 뗀 것의 시작은 예루살렘 지역교회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의 강림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에 나온 기록은 떡을 떼는 집회에서 떡을 뗀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주님을 기념하는 떡을 뗌이 제정되었고 이 표현에는 예전의 일반적인 의미에다가 또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습니다. “떡을 뗌으로 그분을 기억하도록 한 주님의 명령과 연관된 구절들은 사도행전 2:42절과 사도행전 20:7절인데, 이 구절들은 떡을 뗌을 지역 교회에서 행해지는 기념집회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23-30절에서 떡을 떼는 집회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을 때 그는 이 집회를 어느 때에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는 지정해주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단서는 그것이 드물게 행해지면 안 되며 지주”(고전 11:26)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필요로 하는데 거기에 보면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첫 날에 떡을 떼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20:7). 주의 첫 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20:1,19).

 

어떤 지역들에서는 한 떡 대신에 떡 조각들을, 그리고 한 잔 대신에 개인 잔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떡과 한 잔을 떡 조각들과 개인 잔들로 대체한다면 그 상징들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그분을 기념하게 하려고 떡을 뗌을 제정하실 때에 주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많은 떡 조각들로는 주님의 몸을 상징할 수 없으며 따라서 떡은 반드시 하나여야만 합니다. 그 한 떡이 빵 한 덩어리인지, 둥근빵인지, 팬케이크의 일종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워서 만들기만 했다면 그렇습니다.

또한 한 떡을 먹기 위해서는 그것이 떼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떡을 뗌이 주님의 찢어진 몸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2:1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22:19).

신뢰할만한 성경 사본들을 보면 고린도전서 11:24절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라”(흠정역)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구절의 참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다비역).

따라서 주님의 몸이 찢어졌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구절은 성경에 없습니다. 육체는 찢어지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려면 뼈도 꺾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언의 성취로서 요한복음 19:33절에 기록된 바는 무엇인가요?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이에 관한 예언을 우리는 시편 34:20절에서 발견합니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또한 출애굽기 12:46절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한 떡을 먹는다는 사실은 그분의 몸이 찢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어떤 모임들에서는 기념집회를 행할 때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논거는 누룩이 죄를 묘사하기에, 또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떡에 누룩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떡에다가 의미를 추가하는 것입니다. 기념집회에서 사용되는 떡은 주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누룩은 죄의 상징입니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을 기념한다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데도 두 번째 상징을 보존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동일한 문제가 한 떡이 전 세계 모든 신자들의 연합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상징으로 나타날 때에도 발생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8장을 보십시오. 한 떡). 고린도전서 5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누룩을 유월절 어린양과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는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을 당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무교절과 관련되며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모임의 깨끗함과 관련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던 떡은 음식으로 먹었던 떡과 똑같았다고 믿습니다. 그 떡 안에는 누룩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제 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잔과 관련해서도 주님은 오직 한 잔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 라!”( 22:20).

한 떡과 한 잔을 바꿀만한 성경적 근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때로 위생상의 이유를 들어 개인의 잔들을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따라야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를 때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포도주 속에 든 알코올이 병균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염병이나 심한 유행성 감기에 걸렸을 경우 당사자는 장로들에게 잔을 제일 마지막으로 마실 수 있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도 모임의 질서를 따라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휴가지에서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떡을 뗍니다. 그러나 떡을 떼는 집회를 편의를 따라 갖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떡을 떼는 집회는 지역교회의 간증에 속한 것입니다.

 

4) 기념 절기

떡을 떼는 집회가 절기로 언급되고 있나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이야기할 때 모세는 다음의 이유들을 제시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5:1).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8:1).

노예로 살았던 땅에서는 예배나 섬김이 바쳐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4:25절에 보면 유월절이 절기(feast)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기라는 단어는 유월절 후 7일간 이어지는 무교절에 대해 쓰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요시야 왕 시대에 유윌절은 엄숙히 지켜졌습니다.

그 때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을 지키고 연하여 무교절을 칠일 동안 지켰으니”(대하 35:17).

에스겔 45:21절은 그 왕의 천년왕국 통치를 말하고 있는데 그 때에도 유월절이 지켜질 것입니다.

정월 십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유월절은 무교절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유월절의 결과가 무교절입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었을 때는 세상의 상징인 애굽에서 구속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야 우리는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고(feast)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해방은 갈보리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거기서 주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더없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feast, 명절),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구원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서 명절(feast)이라는 단어는 단 한 차례만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5:7-8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feast)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이 구절이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라

여기서는 강조점이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헬라어 파스카가 사용된 이유는 다음을 묘사하기 위해서입니다.

* 마태복음 26:2절에서와 같이 유월절을(“feast”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이탤릭체로 표기되어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이는 이 단어가 원문에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 마가복음 14:12절에서와 같이 유월절 어린양을

* 고린도전서 5:7절에서와 같이 그리스도 자신을

 

고린도전서 5:8절의 절기를 지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이 절기가 유월(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이 절기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에 기초하여 구원을 받은 신자들로서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함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즐거워하게 해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악과 부도덕에서 떠나야 하는 신자의 삶을 가리키는 그 절기를 지키도록 합시다. 자유를 얻은 사람들로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헌신으로 그 절기를 지킵니다!

 

결론

실행의 책(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주의 상주의 만찬에 관한 표현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저녁 시간에 떡을 뗌을 제정하신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을 주의 만찬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떡을 떼면서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모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2:42; 20:7). 이와 마찬가지로 모임의 신자들은 주의 첫 날에 떡을 떼면서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이 표현 속에는 떡 및 포도주가 채워진 잔이라는 두 상징물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4. 기도집회

기도 시에 우리는 하나님을 듣는 이로 모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그 하나님께서, 긍휼이 풍성하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성경은 모임의 기도집회에서 형제들이 공적인 기도에 참여하도록 확실하게 말씀합니다(딤전 2:8). 따라서 각 모임은 성경을 통해서, 자매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함을 명확하고 충분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고전 14:34,35; 딤전 2:10). 잠잠함은 수다스럽게 이야기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해석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헬라어를 살펴볼 때 28절과 30절에 사용된 단어는 완전히 똑같은 단어이며 그 뜻은 잠잠하다입니다.

 

W. E. 바인은 이 구절이 모임의 집회가 아닌 경우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이 지역교회의 집회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임의 기도집회에서 지역교회를 이루고 있는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가 기도합니다. 이 때 잠잠히기도하는 자매들에 대해 매우 자주 이야기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도 주의를 기울이신다는 점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모임에서 기도집회를 갖는 목적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모든 신자는 그냥 자기 집에 머물면서 혼자 기도하면 됩니다. 모임의 기도집회는 개인기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집합적인 다가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자매들은 잠잠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전체 모임을 대표해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각 형제는 신자들 전체 무리의 대변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12:5).

교회 전체가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선 형제는 인칭대명사 단수인 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항상 복수인 우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전체 모임이 아멘이라는 말로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모임의 일치됨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우리는 들리는 소리로 아멘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들에서는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나라들에서는 기도가 끝날 때마다 아멘을 크게 합니다. 어쨌든 모임의 기도집회에서 드려지는 모든 기도는 모임 전체의 기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형제들의 기도들에 차별을 두지 마십시오! 어떤 기도들은 아멘그렇습니다의 말이 확실하게 들리는 반면 다른 기도들은 어떠한 말도 얻지 못하고 철저히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기도 중에 아멘이나 그렇습니다할렐루야나 그 밖의 다른 소리들을 크게 내는 것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끝날 때마다 아멘을 말하는 것에 대한 성경의 지시를 계속 이행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기도 후에 들려 오는 아멘소리는 참으로 커다란 격려를 줍니다. 특히 젊은 형제들에게 그렇습니다.

 

두 구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고전 11:4).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고전 11:5),

그의 견해가 어떻든 W. E, 바인은 여기서는 올바른 내용을 적어 놓았습니다. “명백한 성경구절을 아주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1) 기도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듣는 이로 모실 수 있습니다.

 

(2) 기도는 목적을 가집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해야만 함을 거듭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영으로 또 마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14:15).

 

(3) 기도는 책무입니다.

기도집회를 가질 때 때로는 기도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11:33절의 권면 때문인가요? “내 형제들아 서로 기다리라그러나 여기서의 주제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할 필요가 있는 너무나 많은 제목들이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에 생각하면서 모임의 기도집회 때에 시간을 선용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용어이며 다른 표현들도 사용됩니다.

* 간구 - 간절히 청함( 5:7).

* 중보 - 다른 이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 8:26).

* 구할 것 - 원하는 바를 표현함( 4:6).

* 감사 -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냄( 5:4).

 

주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좋사오며”( 92:1).

기도의 토대는 감사이며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