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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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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 16:55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3) - 서신서의 빛

 

의학교육의 전통적인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여기에서 고찰해 보고자 하는 진리에 대하여 좋은 본을 얻을 수 있습니다. 훈련과정의 첫 해 동안에는 인간의 신체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때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관하여 집중적인 교육을 받습니다. 어떤 질병이나 비정상을 공부하기 전에 정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 철저히 파악해야만 비정상이나 질병을 분명히 간파하고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의 병리학적인 현상들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이상(理想)이 무엇인지를 말씀에서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보는 것들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 굶주리고 정욕에 쫓기는 세상은 헌신을 편의주의로, 일생동안 연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혼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필자의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장(前章)에서는 창세기에 제시된 원칙들을 고려해 보았는데 본장(本章)에서는 풍성한 자료를 제공하는 서신서를 살펴봄으로써 빛을 얻도록 해보겠습니다.

 

결혼의 원칙들

결혼한 아내와 남편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배우려면 바울과 베드로의 글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 5장은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널리 오해받고 있는 부분입니다.  아내들은 순복하고, 남편들은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바울의 말의 뜻이라고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한 쪽은 다른 한쪽의 태도에 따라 반응해야 할까요?

아내의 태도에 관한 말씀을 먼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사랑에 관한 말씀이 나오기 전에 아내의 복종에 관한 명령이 먼저 나오는 것은 무계획적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복종해야 하며, 아내의 복종은 주께 하듯해야 합니다.

아내의 복종은 노예적인 속박이나 맹목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1:3에 제시된 순종의 진리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잘못을 오래 전부터 대결했어야 했습니다. 성경적인 복종은 남편의 머리됨과 인도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지, 사람 자체에 있어서나 지능에 있어서 어떤 열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51에서 주님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그 완전하신 분이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아내가 지녀야 할 애정은 디도서 2:4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에게 자기 남편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무데도 주어져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바로 거기, 디도서에서 아내는 자기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지시받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의 단어가 아가페(agape) 사랑이 아닌, 필레오(phileo) 사랑입니다만 그렇다고 이 사랑이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랑은 나누는 사랑이요, 누리는 사랑입니다. 아내는 비이기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자기 남편에게 나타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랑은 순전히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나타내야 할 성질의 것이지만 아내는 동반자의 사랑, 함께 나누는 사랑, 따뜻한 사랑을 소유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아내의 애정은 자기 남편과 가족을 위해 비축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또 아내에게 부여된 권위의 영역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디도서 2:5과 디모데전서 5:14에 보면 아내는 가정을 다스리는 자인데 다로 이 영역에 아내의 재능과 지성이 최대한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바로잡고 세상에서 구별된 성소를 창출하는 일은 결코 열등한 재능과 지성으로 되는 사업이 아닙니다. 사업계의 어떠한 여성보다도 가정의 그리스도인 여성이 훨씬 더 크나큰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성들도 직업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떠한 여성해방론자들보다도 가정을 잘 다스리는 그리스도인 여성, 하늘의 분위기를 땅 위의 가정으로 옮겨오는 그러한 여성이야말로 자신의 지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남편에게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 포괄적인 용어 속에 몇 가지 개념을 포함시키셨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비이기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부과된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보답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즉 교회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신의 표준과 영원한 본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내를 복종케 할 목적으로 표현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되받을 사랑을 더욱 용이하게 받을 목적으로 표현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랑은 오로지 다른 사람의 유익만을 추구합니다. 아가페 사랑은 결혼의 모든 문제들과 상처들을 극복합니다. 이 사랑은 이 혼인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묻지 않고, “이 혼인에다 나는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섣불리 일반 법칙화 하기란 어렵고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의 태반 문제들이 이기주의 라는 근본문제에 기인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겠으며, 따라서 비이기적인 아가페 사랑이야말로 그 해독제인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 사랑의 요구 사항은 세상의 어떤 개념보다도 고차원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단어를 너무나 허술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이 단어는 고차원적인 의미와 요구사항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혹자는 자기 아내를 위해 죽을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일상의 수많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날마다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대신 나무에 달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때때로 아무 불평없이 가게로 가서 물건을 사다 줄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포기하기보다 먼저, 아내가 이야기할 때 들고 있던 신문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희생적인 사랑은 나의 시간과 나의 관심을 요구합니다. 나는 나의 아내를 위해 나의 시간을 기꺼이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아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관심사들을 두번째 위치에 놓아야 합니다. 결혼이란 이러한 원칙들에 대한 헌신입니다. 이러한 원칙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결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며, 따라서 차라리 인내하면서 혼자 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결혼이란 그저 나의 관심사들에다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관심사들을 새로운 우선순위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나의 관심사들이 더욱 충족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결혼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접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성경의 참다운 관점은 몹시 다릅니다. 이 자기 희생적인 사랑은 에베소서 5장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조(援助)해 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의 진가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에게 근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사항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양육하여 보호하기를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세워주고, 덥혀 주며, 격려해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 골로새서 3:19에서 거친 태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으며, 진가를 인정하고 감사할 줄 아는 태도가 결여된 것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 직업으로부터 상당한 만족감을 얻습니다. 봉급인상, 승진 등은 자신의 수고가 제대로 평가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 아내가 가정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그 진가를 인정하고 몹시 고마워하고 있다고 자기 아내에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기 아내가 자녀들을 잘 돌보고 있으며, 가정을 다스리는 일을 훌륭히 성취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필자 역시 한 남편으로서 고백하거니와 남자들에게는 자기 아내의 수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밖에서 하는 일들은 진짜 일이고, 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아내의 일들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置簿)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필자는 지금 집안 청소라든지 가사(家事)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오아시스를 창조하는 일, 집을 가정으로 바꾸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상호간의 존경과 배려, 이해와 사랑을 기초로 하여 형성되어야 합니다. 우리 남편된 자들은 자기 아내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표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철학이 우리 마음 속에도 스며있을 때가 흔히 있는데, 그것은 곧 가정을 가꾸는 일을 비교적 덜 중요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혹은 집밖의 사업전선에서 하는 일들만 진짜 일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잘 배려해 주려면 당연히 자기 아내와 그 필요를 잘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엄마를 동시에 요구하는 여러명의 미취학 자녀들을 5시간씩이나 돌보면서 하루를 보낸 자기 아내가 어떤 상태에 있겠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흘린 쥬스와 컵을 소제하고 여러 시간 동안 자녀들과 놀아준 후 아내는 감정적으로도 녹초가 될 수 있습니다. 더우기 기껏해야 한 두 단어로 된 말이나 할 줄 아는 아주 어린 자녀들을 둔 여자라면 심지어 자기 나라 말조차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식사 때에 귀가한 후 밀린 일감을 가지고 자기 서재로 곧장 직행하는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잘 배려해 주는 친절한 남편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인 연구와 회의 준비 등을 위한 시간이 필요한 줄은 필자도 아는 바이지만 모든 일에는 균형도 필요합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만큼 여러분의 아내도 여러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일을 위하여 여러분의 아내가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으며, 필자는 이것을 기록하면서 지금 누가복음 18:2830 14:26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서로 합의된 희생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희생을 치러야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먼저 자기를 희생하고 그 다음에 자기 배우자와 합의된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베드로도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3:7에 제시된, 남편들에 대한 그의 조언은 동반, 배려, 교제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자연의 영역에 있어서 아내와 차이점을 인식해야 하며(“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아내와의 동등성을 인식해야 합니다(“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동반관계를 개발하는 일이란 쉽지 않지만 이것은 베드로의 명령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관심사, 내적인 사고생활(思考生活)을 함께 나누는 일을 요구합니다. 천성적으로 남자들은 아내와 함께 나누는 일에 어려움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약점 중의 하나라고 고정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누는 가운데 참다운 동반관계와 동거생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밀은 바울과 베드로에게 관계된, 그저 이론적이고 신비적인 사업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표현될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일입니다.

 

실체의 모형인 결혼

바울과 베드로가 간략하게 제시한 기준은 거의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그 비범한 사랑에 필요한 은혜를 어디에서 얻는단 말입니까?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는 은혜를 어디에서 획득한단 말입니까? 에베소서 5장을 펼쳐서 바울의 생생한 묘사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전에 아마도 두가지 사항을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람들에게 실물로 교수하기 위해 적당한 것을 찾지 않으셨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이것을 염두에 두고 결혼을 제정하셨지, 좋은 모형을 찾으시다가 우연히 만났다든지 혹은 뒷궁리를 하시다가 문득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한 진리를 마음에 품고 결혼을 의도적으로 계획하여 인생들이 이 결혼을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련된 사항들을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종종 접하게 되는 또 다른 오류는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편에 해당되는 것들이 그 대응물에도 동일하게 해당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결혼이 그 위대한 진리의 모형 혹은 표현입니다.

자기 남편에게 기꺼이 순복하는 아내는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역할을 묘사하는 큰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려면 반드시 그 머리의 통제를 따라야 하듯 가정에서도 머리와 몸 사이에 갈등이 없으려면 적절한 질서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또 몸의 구주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영적인 몸의 보존이라는 개념은 결혼의 연합이라는 주제로 전용(轉用)되어,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 결혼이 최선으로 보존된다는 의미를 던지고 있습니다.

남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부과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은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최상의 잠재력 위치까지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신분적인 정화(淨化)와 신분적인 성화(聖化)를 창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교회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자기(그분) 앞에 세우는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분이 사랑의 대상에게 축복과 존귀를 끼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는 점에서 비이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은 자기 아내를 가장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자기 아내로 하여금 가장 여자답게, 가장 아름답게, 하나님을 위해 가장 유용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원칙들은 자기 아내를 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높여 줍니다.

이상의 원칙들이 결혼 안에서 성취되는 모습은 아마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생활 가운데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의 잠재력에 대한 표본

이 부부는 사도행전 18장에서 우리에게 처음 소개되고 있는데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첫번째 특징은 그들의 연합(하나됨)입니다. 항상 그들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연합이 가장 잘 표현된 구절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브리스가와 아굴라(2인이므로 複數임)에 관하여 언급할 때에 자기의 목(원어적으로 그들의 목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목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므로 單數임-역주)이라도 내어놓았나니라고 말하고 있는 곳입니다. 권위와 복종은 사도행전 18:14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로마에서 강제출국 당하여 고린도로 이주한 일에는 아굴라가 앞장섰고 브리스길라는 자기 남편을 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부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서를 주목하면 교훈을 얻게 됩니다. 필자가 사용하는 성경에는 이 부부의 이름이 6번 언급되는데 그 중 3번은 아굴라의 이름이, 동일하게 3번은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도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는 아굴라가 먼저 언급되고, 가정에서 접대하는 일에는 브리스길라가 먼저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굴라의 쓰임받음은 브리스길라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볼로에게 더 많은 진리가 필요했을 때 이 부부는 자기 가정과 마음을 개방하여 그를 영접했고, 바로 이 가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도()를 그에게 더 자세히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일들이 가정에서 이루어지며, 이 일에는 자발적인 아내가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는 쓰임받은 많은 형제들의 복된 사역이 함께 협력한 그 아내들로 말미암아 가능케 되었음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과 로마서, 고린도전서, 디모데후서 4:19에 제시된 그들의 섬김을 죽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의 충절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이 충절은 사도 바울에게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도 표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처음 소개된 이후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이름으로뿐만 아니라 영()으로도 여전히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결혼이란 것은 두 사람의 서로에게 대한 일생의 헌신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결혼의 순결

2장을 끝맺기 전에 결혼생활에 있어서의 육체접촉에 관하여 언급하고 싶습니다. 현대의 작가들과 사상가들은 밀실의 육체관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위 균형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그것을 집 앞의 잔디밭 위로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결혼 안에서 어떤 위치에 두셨는지 살펴보고 그 진가를 헤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바울의 서신서들은 성도들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낭독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의 순결에 관계된 성경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3:4에서는 결혼의 육체 접촉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교훈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의 거룩성과 부도덕의 죄악성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결혼 안에서의 육체관계는 어떤 면으로 생각해도 더럽거나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부가적인 매력이거나 또는 인생의 다른 문제들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혼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서, 결혼의 하나됨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결혼을 강화하고 단단하게 묶어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부부 사이에 수치심이라든지 망설임 따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배우자가 육체관계를 통해서 한껏 즐길 수 있도록 서로 솔직히 의사소통을 해야 마땅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8에는 순결에 대한 명령과 동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좋은 아이디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도덕은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의 쾌락을 제한할 목적으로 부과하시는것도 아니요, 인간을 즐거움의 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감옥도 아닙니다. 도덕이란 오히려 어떤 엄청난 가치와 기쁨을 지닌 것의 주위를 두르는 방호벽과도 같아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해치고 망치는 침입자들로부터 그것을 보호하시고자 애쓰십니다.

혼전 성관계는 정서적 연합이나 법적 연합이 없는 육체적 연합을 이루어줍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육체적 연합은 오로지 혼인한 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우리는 도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어도 6가지의 이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마땅하며, 하나님은 부도덕을 다루시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관이 있으며, 내주하시는 성령과 연관이 있으며, 형제를 해하는 잘못입니다.

결혼의 육체관계에 관한 주요 문단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결혼의 상호관계를 배우게 되는데 육체관계에 있어서는 상대방을 생각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우자의 쾌락과 기쁨을 먼저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3). 현대의 성() 치료요법학자들이 강조하는 바는 자기를 추구하라는 것이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상호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내 몸은 더 이상 내 몸이 아니라는(4) 뜻은 머리됨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차원높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관계 중에서 가장 밀접한 이 관계를 위하여 배우자와 그 요구를 기꺼이 고려해 주고 싶습니다. 육체관계에 있어서 이기주의란 있을 수 없으며, 사람들이 하는 섹스게임은 비성경적입니다. 필자가 지금 언급하는 바는, 자기 배우자를 벌 줄 목적으로 육체관계를 이용하거나 거부하든지 심지어는 어떤 목적을 성취할 의도로써 그것을 이용하는 부부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서로 인정하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얼마간 육체관계를 피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런 경우에도 반드시 상호간의 합의가 있어야만 합니다(5).

결혼 안에서의 성관계는 배우자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배우자에게 줄 수 있는 쾌락이자 특권입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며, 거룩하고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목적을 위해 그것을 도구나 주기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만약 방심하다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신성한 이 부분을 저 사악한 원수가 악용할 것입니다.

 

(1995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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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