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전략~
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구체적인것은 교회의 직분에 있습니다. 이번 새로운 임원 발표에 있어 목사님은 전년도와 조금은 다른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모든 임원의 자리는 하나님이 세웠다고(모세의 예를 들며, 저는 이것이 잘못된 예라 여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직접 부르신 위대한 종이며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하며 잘 순종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작년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인정하자고 하셨습니다. 이 둘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많은 직분과 이에 대한 불평에 대한 해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주님의 일을 행하는데 있어 효율적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언제가 주님의 인도하심보다는 시스템과 전도인의 확장적 복음 욕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것은 사실입니다. 말이 길어짐을 거듭 양해바랍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저희 교회처럼 세밀하고 계급적으로 구분된것이 아닌) 성령에 의해 세움(지명됨)을 받는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때 목사님의 말씀이 틀린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데 또한 말씀에는 너희 가운데 믿음이 있는자를 의논하여 세우라는 말씀도 있는것을 보면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목사님의 결정이 곧 성령의 결정이며 오류가 없다고 봐야하는지(목사님은 후자의 경우로 말씀하신듯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이 음성으로(혹은 빙의) 목사님을 통해 지명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씀에 무지한 관계로 성령에 의한 세우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 대리하는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렇게 받아들여지는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답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내 믿음의 시선이 사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해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말씀드립니다. 님의 모이는 거기에 주 예수님께서 참으로 머리가 되시며, 사람의 권위가 아닌 주님의 권위가 행사되며, 주님을 주님의 자리에 돌리고 있는지요?
오늘날 제도적인 교회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실입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경배를 한다지만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기 현상으로 거의 대부분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마치 마태복음
오늘날의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행위들을 들추어내어 본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님의 질문도 그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와 연관된 것들을 말씀드리려면 책을 써야 되겠지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9절)
오늘날 자칭 타칭 많은 분들이 구원받았다고 말을 합니다만, 참으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려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계시록에 일곱 교회가 주님께 모두 책망과 권면을 받는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칭찬만을 들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칭찬의 내용 중에 무엇을 많이 하고 공적을 이루고 많이 이루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오늘날처럼 직분을 가져야만 많은 일을 하고, 이루고, 남기며, 잘 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으면 지나쳐서 하나님의 성도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까지 나섰는지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새인,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빌3장)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섬긴 것이 아니라 너무 열심히 섬겨서(주님 계실 때 바리새인들처럼) 주님을 알지 못했고, 주님의 말씀(심지어 구약에서 나타내는 것까지)이 무언지 알지 못했기에 일어난 현상이지요. 그 당시에 사울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이후 그의 변화된 모습은 물론 주님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일들을 해냈고 이루었습니다만,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 바탕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보면 첫째가 주님을 주님 자리에 둔 것이지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자신이 무엇을 하며 이루었는데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 말하고 행하고 전파하고 기록하고….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주장했습니다.
poimhvn <포이멘> 목자(영어 흠정역에서는 shepherd, 엡 4:11에서만 pastors;목사)
마
마 25:32 < shepherd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마 26:31 내가 < shepherd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막
막
눅
눅
눅
눅
요
요
요
요
요
엡 4:11 혹은 < pastors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히
벧전
이상 신약 전체에서 인용된 구절은 목자(포이멘)로 올바르게 번역을 했는데, 유독 에베소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빌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벧전
여기에서 감독과 장로는 같은 칭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가) 나를 섬기라가 아니고 주님을 섬기라이며 이렇게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을 보여 주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 기독교체제의 師와 者가 차이가 나는가요? 주님께서는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목자가 본을 보이면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존경하고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도 나를 따르라, 믿으라, 하시면서도 그분은 섬기셨던 분이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시지요! 사도 바울도 나를 본 받으라고 하면서도 그의 삶은 성도들을 세우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자비량하면서…
하나님과 성도들의 중간 계급의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중보되신 우리 주님외에는…
그런데 신약의 어디에도 목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곳은 없군요. 유일하게 에베소서
장로들(감독들, 목자들)은 지역교회 안에 항상 복수(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의 블로그에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만 다음의 글들을 보시면서 아울러 큰 카테고리 “교회진리” 안에 있는 소 카테고리 안의 주제들과 “빛 가운데로 걸으며”, 특히 하나님의 교회(안상홍증인회가 칭하는 것이 아님)…등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http://onyang.tistory.com/1017 목사가 없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사람들
http://onyang.tistory.com/819 장로의 임명
지역교회 안에 직임은 장로(목자는 여기에 속함)들과 집사들 두 종류가 있으며, 특히 형제들은 교회 안에서 입을 열어서(?) 제사장직으로 섬겨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목사 혼자 설교하고 진행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지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즉 틀에 매인 주보 순서가 없이) 형제들이 감사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예배를 진행해 가는 것입니다. 옛 구약의 제사장들은 죄인이 제물을 가져오면 일사천리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에 순서에 따라서 진행했습니다만, 신약교회에서는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목사가 하나님과 소위 평신도 사이에 중간역할을 하는 가르침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단순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형제요, 자매이며, 높고 낮음과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며 주님 앞에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주님을 향해 섬기는 것이지요. 이렇게 섬겨가면 형제 자매들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고 성도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섬김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원함을 가지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을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효과적으로 내가(우리교회가?) 주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보다 어떻게 한 말씀 한 말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는 참으로 개인과 집단에게 모두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하고 실언도 하고 모순이 많은 제자였지만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가룟유다는 돈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졌는데 도둑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의 삶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엄청나게 많은 지역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좋은 교회였습니다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안에서 자기들이 주인 노릇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 모습입니다. 주님이 함께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문을 두드리시는데도 못 들었는지 안 듣는지 여전히 주님은 안에 들어 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없이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오늘날 넘쳐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고 줄이겠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어가는 시스템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전혀 무관할 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증거에 대해서 어떤 분의 주석에 기록된 것을 인용합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려니” “말하시며”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영광에 관한 예언적인 문제들 역시 그분이 증거하시는 범위 안에 들어 있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이 보여주실 것들은 “내 것”(15절)이다. 이는 그분의 증거가 본질적으로 아들에 관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이 모든 증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신약성경의 기자들에게 직접 계시될 것이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그분의 증거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고전
성령의 인도하심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알려 주시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주님의 것을 가지고 인도하십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 성령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잘못 적용되며 호도되고 있는지요?
사람의 지혜로 만든 시스템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훌륭한 조직으로, 가장 큰 부흥으로, 엄청난 업적과 성과를 이룬다 할지라도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하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닐까요. 보석은 작고 숨겨져 있고 주인이 가까이 두고 귀히 여기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은 덩치도 크고 요란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부디 성경을 보시면서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많이 캐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잡하고 요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때에 성경말씀 안에서 주님을 더욱 발견하고,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서 올바른 섬김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묵상하고 생활에 적용하면서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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